산책을 나가자는 아이의 말에 검은 롱패딩을 꿰입었다. 줄김밥이 따로 없네. 밤색 체크무늬 목도리를 두르고 살구색 마스크를 양쪽 귀에 걸었다. 대충 머리를 손으로 쓸어 하나로 묶자 뻗칠 대로 뻗친 옆머리가 왼쪽 눈썹에 걸쳐 신경을 거슬렀다.
-어? 상은 이모랑 제현 삼촌 온다.
-어디? 저 앞에.
꼴이 말이 아니어서 못 알아보겠거니 했다. 예상은 빗나갔고 상은 샘이 웃으며 달려와 폴짝폴짝 뛰었다.
-새애애애앰!
-크크. 안녕! 어쩜 아직도 이렇게 귀여워. 점심시간이라 산책 나왔어?
-네. 잘 지냈어요?
-응. 어, 제현 샘! 왜 이렇게 말랐어요? 몸 어디 안 좋아요?
-배에 살만 쪄서. 완전 이티야 이티.
-어디가 그래요? 전혀 안 그런데.
-딸?
-네.
-안녕하세요.
-못 알아보겠다. 언제 이렇게 컸어? 엄마만 하네.
-몇 학년이야?
-중 1요.
-와. 벌써?
-.......
-그럼 또 봐요. 산책들 잘하고.
-잘 가요.
-애기야.
놀이터 옆 나무 벤치에 다가가자 진초록의 풀숲에서 고양이가 어슬렁어슬렁 나왔다. 몸의 무늬가 등 푸른 고등어를 닮은 검정 코리안 숏 헤어였다. 스트레칭하듯 앞발을 내밀어 몸을 길게 펴고는 총총거리며 딸을 반겼다.
-이리 와, 애기야.
딸애가 벤치에 앉아 손을 둥글게 하고 옆자리를 톡톡 두드리자 고양이는 폴짝 뛰어 애 무릎에 꼬리를 말고 몸을 파묻었다. 콧잔등 위의 털을 꼬집듯 어루만져도, 등을 연신 쓸어내려도 잠자코 있었다. 검은 털빛에 회색 줄무늬를 한 고양이는 동네 공원에서 인기가 많았고 누가 버린 집고양이인지 사람을 잘 따랐다. 봄부터 친해진 둘이 교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고양이는 가끔 얼굴을 들어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기도 했는데 딸애는 그걸 두고 '간택의 눈빛'이라 했다. 그러나 고양이는 늘 딸한테만 몸을 기댔다.
12시 반이 넘어가자 공원을 도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오전 10시면 운동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나 현장 학습을 온 어린이집, 유치원생 아이들이 주를 이뤘지만 점심때가 되면 중장년의 남녀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네에 앉아 고양이와 딸애를 보고 있는데 전 직장 사람들로 보이는 무리가 삼삼오오 지나갔다. 누군가와는 길게 눈을 마주쳤다. 으, 낭패다. 서둘러 휴대폰을 열어 관심도 없는 기사들을 휙휙 넘겨 댔다.
-엄마. 방금 상은이 이모네 또 지나갔어.
-어 그래? 인사하는 거 못 들었는데?
-그냥 쓱 보다 걸어갔어.
-응.
집에 돌아와 카톡을 켰다 껐다 켰다 껐다. 예전 같으면 인사를 남겼을 거였다. 잠깐이지만 만나서 반가웠다든지, 해가 지나기 전에 점심 같이 하자든지, 애시 브라운으로 염색한 아이의 머리 스타일에 대한 언급으로 시작해 현재 학교 밖으로 나와 쉬고 있으며 2년 가까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든지, 그동안 말하지 못해 미안하다든지 하는. 전적으로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에만 혈안이 돼서 구구절절 TMI로 쏟아냈을 거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았다.
회사를 다닐 때 딸애는 샘들에게서 넘치도록 사랑을 받았다. 1층 로비의 둥글고 흰 탁자에서 퇴근 시간까지 기다리다가 시간이 다 돼서 둘이 3층 사무실에 올라오면 샘들이 딸을 둘러싸고 간식을 주며 말을 걸었다. 퇴직 후 아이가 내게 더 이상 자랑이 아니게 됐을 때 샘들에게서 사이를 벌려 나갔다.
마음이 아프고 학교에 가지 않게 되면서 아이는 외형적으로 많이 변했다. 불규칙한 생활로 17킬로가 늘었고 머리를 기르지 않고 짧디짧은 숏컷을 했다. 두 달에 한 번씩 머리색을 바꿨고 안경을 벗고 컬러 렌즈를 꼈다. 강한 인상으로 화장을 했고 짧고 파인 옷을 입었다. 그러는 동안 수도 없이 부딪쳤다. 가치관과 가치관이 부딪치고 감정과 감정이 부딪쳤다. 지금의 모습을 받아들이기까지 긴 시간이 흘렀다.
그네에 앉아, 고양이와 노는 딸을 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넌 늘 그대로였는데 난 널 제대로 보려 하지 않았다는 걸.
넌 한 번도 변함없이 날 사랑했는데 난 그러지 않았다는 걸.
넌 항상 현재를 살아갔는데 난 생각에 갇혀 있었다는 걸.
같고 같고 또 같게
넌 줄곧 여여(如如)하게 존재했었다는 걸.
그것이 상은 샘에게 카톡을 남기지 않은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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