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례함을 참을 수 없어서

by 어슴푸레

지난 월요일. 용무가 있어 은행에 갔다. 통상적인 점심시간이 10여 분쯤 지난 시각. 창구가 마주 보이게 놓인 직사각 검은 스툴에 앉아 차례를 기다리는데 정적을 깨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거참. 사람 성가시게. 그것도 하나 못 해 줘요?

-해 드릴 수 있으면 벌써 해 드렸습니다. 불가합니다.

-다른 은행에선 다 해 줘요.

-........

-되게 빡빡하게 구네. 지점장실 어디야?

-안쪽에 있습니다.


유리 칸막이를 사이에 두고 예순쯤 돼 보이는 초로의 남성이 마흔 중반의 여성 행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직원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흑빛이 돼 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정황상 뭔가 조회를 해 달라는 고객의 요구를, 신용정보보호법 등의 이유로 들어줄 수 없다는 것 같았다. 욕은 하지 않았지만, 강압적이고 착 내리깐, 남성의 목소리는 듣고 싶지 않아도 귀에 계속해서 꽂혔다.


그는 몹시 언짢은 얼굴로 의자에서 일어나 쌩하고 지점장실로 들어갔다. 띵똥. 다음 번호를 알리는 차임이 울리고. 다음다음 번호의 사람이 길쭉한 사인 패드에 인적 사항을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문제의 그 남성이 서류 뭉치와 통장을 들고, 패드에 사인을 하고 있는 사람 등 뒤에 서서 은행원에게 다짜고짜 말했다.


-나. 저 방에서 처리하고 가요. 어?


굳이 굳이 저렇게까지 하고 가야 직성이 풀리는 건지. 숨이 턱 막혔다.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이미 다른 용무를 보고 있는 직원에게 와서 자신이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으로 한마디 더 얹고 가는 모습에서. 분란이 더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윗선이 민원을 처리해 주었을 것이 짐작됨에도 어찌 저리 당당하고 무례할 수가 있는지. 고구마가 목에 걸린 기분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을 때였다. 유리문을 닫고 나갔던 그 노인이 다시 들어왔다. 사회복무요원이 그에게 다가갔다. 1년치 통장 정리가 필요하다고 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 텐데 괜찮겠냐는 말에 그렇다고 하고는 현금 인출기 앞에서 복무요원이 처리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거 드세요.

-엇! 아니에요. 비싸 보이는데. 괜찮습니다.

-아니에요. 점심도 못 드신 거 같은데. 표정이 너무 안 좋으세요.

-....... 그럼 한 개만 먹을게요.

-괜찮아요. 다 받아 주시고. 이따 드세요.

-감사히 잘 먹겠습니다.


가방에서 견과류가 박힌 피낭시에 두 개를 꺼내 직원에게 건넸다. 까만 패드에 정자 서명을 하고 있는데 직원분이 자리에서 일어나 캐비닛을 열었다. 의자를 당겨 앉더니 내 앞에 보라색의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핸드크림이었다.


-이거라도....

-아.......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오지랖이 넓었을까. 그런 면이 없지는 않았다. 남일 같지 않았다. 하루 꼬박. 사람을 대하며 감정 노동을 하다 보면 쉴 새 없이 머릿속으로 흘러드는 구름 같은 생각들에 곤두박질치는 걸 그 누구보다 잘 알았다. 직장이라는 필드에서 매뉴얼에 맞게 처리하는 일들이 고객에게 불친절과 불만족이 될 때 오롯이 감수해야 하는 언어적,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폭력적이고 무자비했다. 하루 종일 시달리고 퇴근해서는 가정이라는 두 번째 필드에서 엄마 노릇, 아내 노릇으로 멘털이 가루가 될 것이 눈에 그려졌다.


다음 날 아침. 카톡 창이 번쩍거렸다. 감사 메시지였다. 전날 금융 서비스를 이용한 창구 고객에게 설문 링크가 발송됐었다. 평소 같으면 '채팅방 나가기'를 눌렀을 거였지만. 그 직원분이 걱정됐다. 혹시나 그 초로의 남성이 인신공격성 답변을 남겨 놓을까 봐. 링크를 눌러 칭찬하고 싶은 사항을 길게 적었다. 원칙적으로 일을 처리한 은행원은 내게도 원칙적으로 업무를 처리해 주었다고. 친절하고 신속하게 서비스를 제공받았다고. 앞앞앞 무례한 고객에게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그 내용을 확인했던 것일까. '감사 인사' 메시지를 읽으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엄마, 또 착한 일 했네?


이야기의 전말을 듣고 딸애가 말했다. 그저 나는. 무례한 사람으로 인해 선한 이가 부당한 일을 겪게 될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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