닿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이다

by 어슴푸레
지나온 것은 지나온 것이요
닿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이다
-박목월, <가교> 중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꿈을 꾸었다.


전 직장에 우연히 들렀는데 도서실에 초등학생, 성인들이 모여 있었다. 갑작스레, 그동안 낸 책으로 강연을 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직장 청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시계를 확인하고 15분 뒤에 하겠다고 했다. 도서실을 나와서 친했던 사람들 자리에 가서 인사를 했다. 이후 이전 팀장님께 안부 인사를 하려는데 장면이 바뀌더니 팀장님이 숙직실에서 전라로 엎드려 있었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데 이번엔 딸애가 옷을 모두 벗은 채로 들어왔다. 다시 장면이 바뀌고. 강연하러 도서실에 갔는데 석사라 2,000만원에서 1,000만원으로 강연비를 내렸다는 말과 함께, 여기서 이렇게 갑자기 강연하면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경력이 20년이 넘는데 이런 법이 있느냐고 억울해하자 주변의 청중과 지인이 같이 항의해 주겠다고 떨쳐 일어나면서 강연은 무산됐다. 결정권자를 만나러 갔다. 외부 출장을 나가서 만날 수 없다는 말을 전 실장님이 전해 주셨다. 발걸음을 돌려 뒤돌아 나왔다.


전날 밤. 올해 벌이에 대한 고민이 깊었던 탓일까. 잠에서 깨 처음 든 생각은. 사업이 없을 모양인가, 예지몽인가였다.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찝찝함이 영 떨쳐지지 않았다. 결국 AI 프롬프트에 꿈 내용을 적고 해석을 기다렸다. AI는 한마디로 이 꿈은, '심리적 결산 보고서'로서 "나는 충분히 쌓아 온 사람인데, 평가 절하 당했고. 그로 인한 분노와 보호 본능이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로 요약된다고 했다.


또한 '올해도 전 직장에서 용역이 들어오려나?, '계획을 어떻게 세워야 하지?', '금전적으로 계속 이 구조가 맞나?' 등은 단순히 돈 생각이 아니라, '나는 아직도 저 조직에 기대고 있는 사람인가?', '나는 독립한 전문가인가, 아니면 미완인가?'의 질문이 꿈이라는 무대에서 전부 펼쳐진 것이라고 했다. 그 질문의 핵심은 '나는 언제까지 저 조직의 잣대를 내 가치 판단 기준으로 쓸 것인가?'라고 했다. 따라서 이 꿈은 올해도 용역은 들어올 가능성이 높고, 조건은 크게 바뀌지 않을 수 있고, 그때마다 존중받지 못한다는 감정이 재연될 가능성을 미리 경고하는 꿈이라고 했다. 해석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 직장을 평생의 동거인으로 남게 할 수 없었다. 인정받고 싶은 나와 증명된 나를 완전히 분리해야 했다.



지난 월요일. 윤희 샘을 만나 점심을 먹었다. 원을 나와서 아쉬운 건 귀여운 샘을 사무실에서 매일같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샘 안 늦었어요. 돌아와요. 윤희 샘이 활짝 웃으며 내게 말했지만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뇨. 돌아갈 마음 없어요.


원을 나오고 3년이 지났다. 그동안 채용 시험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한 번도 서류를 넣지 않았다. 퇴사를 결심할 때 이미 마음먹은 일이었다. 조직의 인정을. 타인의 시선을. 더 이상 내 삶의 의사 결정 기준으로 삼지 않기로 결정했었다. '완성형 인간'이 아닌, '진행형 인간'이 되기로. 그렇게 삶의 방향을 바꾸었었다.


초심은 잃기 어렵고. 마음은 무언가를 자꾸만 붙잡으려 한다. 내려놓으면 불안이 제일 먼저 올라오므로. 꿈은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이미 조직 밖에서 정체성이 생겼음에도 조직 기준의 족쇄가 아직 마음에 남아 있음을. ‘정리되지 않은 서사’를 스스로 붙들고 있음을.


그래서 다시 나를 정의한다.


나는 조직의 사람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이고, '쓰는 사람'이고, '사유를 생산하는 사람'이다. 박사 학위는

어느 조직에 속하기 위한 표식이 아니다. 내 생각에 공식적인 저작권을 부여하는 장치다. '이 주제에 대해 말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봉인해 두는 것'이다. 학위는 내가 원하면 완성할 수 있는 선택지 중 하나다.


지나온 것은 지나온 것이요, 닿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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