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기억 중, 가장 생각나는 걸 그림으로 그려 보세요.
-그림이요? 글이 편한데. 글로 쓰면 안 될까요?
-내담자의 마음이 그림에서 더 잘 드러나기도 해서요. 한번 해 볼까요?
-네.
-몇 살 때인가요?
-네댓 살 때인 거 같아요.
-초기 기억이 남아 있으시네요.
-네. 더 오래전 기억도 있는데 그게 꿈인지, 동생하고 저를 착각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이걸로 그렸어요.
-구매탄아파트? 살던 곳인가 봐요?
-네. 이 아이가 저예요.
-머리 방울이 있어 그럴 거라 짐작했어요. 그림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여기 살았고. 꼭대기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밖을 내다봤었으니 높은 층이었던 것 같아요.
-아이가 어딜 가려고 나왔네요.
-네. 아버지 만나러 가려고요.
-꽤 먼 거리로 보이는데요.
-네. 버스로 20분. 어른 걸음으로 40분? 아마 아이 걸음으론 1시간쯤 걸었을 거예요. 아버지한테 자주 갔어요. 동수원에서 삼성전자 앞까지. 수원 잘 모르시지요?
-네. 그 먼 거리를 반복해 간 이유가 있을까요.
-집에는 저밖에 없었어요. 오빠는 새마을유아원에 있었고. 엄마는 동생 업고 남문에 양복지 끊으러 갈 때가 많았어요. 혼자 집에 있으면 심심하기도 하고 무서워서 아버지한테 갔어요.
-길이 무섭지는 않았나요?
-그러진 않았어요. 나무도 풀도 많았고. 한 유월? 초여름 때였고. 흑염소가 좀 겁났던 거 빼곤. 비탈 같은 데서 풀 뜯고 움직이질 않으니까. 딴 데 가면 걷고 뛰고 뭐 그랬지만. 걷는 건 좋았어요.
-아빠 만나러 가면 혼나지 않았나요?
-애 없어졌다고 엄마는 난리였지만 아버지는 혼내지 않으셨어요. 가면 아버지는 컵라면 국물에 찬밥 말아 드시면서도 면발은 다 저 주셨어요. 아버지가 옷본 만드느라 재단지 자르면. 저는 자투리 종이로 낙서도 하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아버지가, 쓰기 부드라우라고 계속 비벼서 주시고 그랬어요.
-업고 걸리고 같이 시장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어머니는 동생만 데리고 갔을까요?
-힘드시고 성가셨겠죠. 몸도 마음도 피곤하니까.
-아버지 양복점 근처엔 제 또래의 친구가 있었어요. 그애랑 놀 수도 있고, 아버지는 제게 소리 지르거나 구박하지 않고 예뻐해서 엄마가 볼일 보러 나가면 매일같이 아파트 문을 열고 나왔어요.
-저는 이 그림을 보고 큰 인상을 받았어요. 약간 충격도요.
-내담자분은 단단하고 성숙하게 태어나신 것 같아요. 팔삭둥이긴 했지만 인큐베이터에서 죽지 않고 끝끝내 살아났고. 모든 힘든 상황을 나이에 맞지 않게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요. 일반적으로 네 살, 다섯 살 아이는 이러지 않아요. 엄마하고 사이가 안 좋으면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집 안의 떼쟁이가 되거나, 눈치를 엄청 보며 비위를 맞추죠. 그런데 그러지 않으셨어요. 자갈 많고. 울퉁불퉁하고. 꾸불꾸불한 이 멀고 긴 길을 두 팔 딱 벌리고 "나, 갈 거야!" 하고 나서잖아요. 이 그림이 박선영 님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거 같아요. 지금까지 힘든 길을 혼자서 찾고 또 찾으며 살아오셨다는 게 그대로 느껴져요.
-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인생의 서막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도 같네요.
-이 아이에게 마지막으로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뭐가 있을까요?
-모두 다 너를 사랑했단다.
-!......
-엄마도 나를 사랑했다는 걸 이제는 아니까요. 단지 사는 게 힘들었을 뿐. 딸인 내가 당신의 운명을 닮을까 봐 나를 차갑게 다하고 당신의 모든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을 내게 투사했지만. 엄마도 널 사랑했다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말해 주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이 꼬마는 뭐라고 할 것 같나요?
-말해 줘서 고마워.
할 거 같아요.
반 년 만에 상담을 재개했다. 상담 선생님께서는. 아이의 주 양육자로서, 딸애를 코칭하는 게 목적이었던 그간의 상담과 달리. 이제는 인간 박선영 속으로 들어가 차근차근 마음을 들여다보자고 했다. 꽤 오래. 꽤 많이. 작업을 해 왔다고 생각했다. 내적으로 놓아주었다고. 그러나 오산이었다. 모두 다 너를 사랑했단다. 그 말을 내뱉는 즉시 눈물이 굴러떨어졌고. 슬퍼하지 말라고 말할 때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말해 줘서 고마워. 내면아이에게 위로를 전할 땐 그 아이의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어둠 속에 숨어버린 그 꼬마를 찾는 여정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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