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 꽂히면 열리는 우리 집 쇼핑몰

by 어슴푸레

-오늘 밤은 우리 네 식구, '쇼핑몰 놀이' 해요.


딸애가 방에서 색연필, 필통, 종이 뭉치를 가져와 말했다.


-갑자기?

-네. 아빠도 출장에서 돌아오시고 불금이기도 하고. 엄마는 발 마사지 숍 관리사 하기!

-시장에서 음식 사 오려면 시간 별로 없어.

-조금만 사 오면 되죠. 가기 전에 엄마는 시술표 그려요. 나는 쇼핑몰 가이드 북 만들게.


아이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A4 한 장을 세로로 두 번 접고, 가로로 한 접어 8등분이 되게 한 다음 펼쳤다. 정가운데에 가로로 칼집을 내고 가로로 반 접어 양손으로 잡고 밀었다. 가운데가 벌어지자 종이 네 면이 십자가 되도록 만나게 밀어 접고 다시 반을 접어 넘겨 가며 책 모양을 잡았다. 8쪽짜리 미니 북이 뚝딱 완성되었다.


딸은 푸드 코트, 카페, 영화관, 올영, 세러피 숍(therapy shop), 보드게임 카페 등이 있는 대형 쇼핑몰을 특히 좋아한다. 그래서 한 번씩 필 꽂히는 날. 먹거리, 볼거리, 놀거리를 즐길 수 있게 집을 쇼핑몰로 꾸며 남편과 큰애에게 서프라이즈를 한다. 그때마다 아이의 정성과 그럴듯함에 두 남자의 얼굴에 기쁨과 행복감이 만연하니 신나서 규모가 점점 커진다. 상황이 이러니 나는 나대로 옆에서 거들 일이 많다. 학교 다닐 때 엄마는 미술이 제일 싫었어. 해도 안 봐준다. 뭔가를 반드시 만들어 내야 한다. 1시간쯤 걸려 마사지 시술표를 그리고 외투를 챙겨 입고 밖으로 나왔다. 어디부터 가야 하나. 음....... 사야 할 음식의 종류와 가게 위치로 머릿속이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으, 낭패다.


방신시장의 이름난 닭강정집. 내 앞으로 벌써 넷이나 서 있다. 30분 넘게 걸릴 각. 어쩔 수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앞의 두 사람이 포장을 해 가고. 줄이 앞으로 당겨졌다. 사장님이 반죽을 가지러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한참을 나오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깊고 커다란 흰 플라스틱 통을 들고 나온 사장님이 옆 화구에 불을 올려 기름을 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40분이 지나고. 대짜로, 소스 뿌리지 말고 주세요. 무도 같이요. 현금을 건네고 고소한 기름 냄새가 폴폴 나는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다음 장소로 향했다. 딸기 한 팩이랑 블루베리 세 팩 주세요. 속전속결. 뛰다시피 걸어 도착한 곳은 시장 초입의 왕만두 가게. 고기만두 네 개 주세요. 양은 솥뚜껑이 열리자 흰 김이 얼굴에 훅 끼쳤다. 사각의 스티로폼 용기에 만두 네 개가 살을 맞대고 담기니 군침이 돌았다. 이걸로 안 될 거 같은데. 핸드폰을 열어 집 근처 김밥집에 전화를 걸었다. 참치김밥 두 줄 포장이요. 까만 비닐봉지만 양쪽으로 합이 네 개. 다 됐나? 김밥을 찾아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오른쪽 길 옆의 오픈된 파란 다마스 안에서 다코야키 사장님이 꼬챙이로 익기 시작한 동그란 반죽을 휙휙 돌리고 계셨다. 딱 여기까지만. 아들, 다코야키도 좋아하니까.


-잘 다녀왔어?

-다녀오셨어요?

-응. 잘 있었어?


남편이 도어 록을 여는 소리가 나자 현관에 나가 인사했다. 손을 씻으러 간 사이 분주하게 식탁에 음식을 차렸다.


-어이쿠 이게 다 뭐야.

-아직 먹으면 안 됩니다. 따님의 안내가 있을 예정입니다.

-엥?

-아빠. 오늘은 쇼핑몰 데이예요. 자 여기 안내책. 한번 읽어 보세요.


딸애가 열심히 만든 미니 책을 하나씩 돌렸다. 아이가 설명을 끝내고 식탁을 등으로 가리고 말했다. 다들 눈 감으시고. 자 뜨세요. 짜잔!


찰칵. 찰칵. 자리에 앉기 전에 남편과 아들이 사진을 찍었다. 냉장고에서 사과맥주와 콜라를 꺼내 왔다. 컵에 따르고 짠! 하고 부딪쳤다. 음식이 빠르게 줄기 시작했다.


-박 여사님. 날로 손이 커져서 큰일이야.

-모자란 거보다 나아. 애들 급성장기잖아.

-엄마, 너무 맛있어요.

-많이 먹어. 닭강정도 많아서 반만 담은 거야. 더 있어.


5만 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4인 가족이 이렇게 다양하고 배부르게 먹기란 요즘 물가에 쉽지 않다. 닭강정과 치킨 무가 10,600원. 딸기 1팩이 6천원. 블루베리 3팩이 10,000원. 고기왕만두 4개가 4,000원. 참치김밥 2줄이, 10,000원. 다코야키 중짜가 9,000원. 합이 49,600원. 배가 너무 불러서 과일과 닭강정은 다음 날까지 먹었다.


밥을 먹고. '안방 올영'에서 제품 시연을 해 보고 각자 좋은 것으로 '야매 구매'를 했다. 남편 방에서 빙고를 돌려 말랑쫀득 스퀴시 랜덤 게임을 했고. 넷이 거실에 드러누워 유튜브로 꼬꼬무 <1984 서울 대홍수>를 봤다. 어느새 12시가 넘었고. 씻고 나온 순서대로 안방에서 발 마사지를 받기로 했다.


한 명당 아로마 오일을 발라 30분씩 손+발 마사지를 해 주니 가족들은 방전된 배터리처럼 스르르 잠이 들었다. 남편과 아들과 딸애가 차례로 잠에 빠졌으나 나는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손으로 압을 주면서 각성이 된 탓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속으로 같은 말을 세 번 되뇌었다. 설 연휴를 앞둔 금요일. 모든 것이 평화롭고 편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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