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동안의 코로나와의 공존
20대 때는 남의 눈치를 보느라, 특히 말 많은 파라과이 한인 사회에 씹을 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무난히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서른이 되고 나니 '나도 이제 꽤 어른이다,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 하면서 고삐뿔린 망아지처럼 '20대 때 못해본 것들을 마구 하고 다닐 거야' 하며 현실도피성 마인드로 두 달에 한 번꼴로 비행기에 몸을 싫고 일을 핑계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기도 했고 주말만 되면 이런저런 모임들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다닌 결과 통장은 텅장이 되었지만 내 주위에는 늘 사람들로 가득했고 누가 뭐라든 그냥 즐거웠다.
아시아에서 1-2월부터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코로나 바이러스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남미까지 점령하는데 1달 채 걸리지 않았다. 1월 말부터 무시무시한 바이러스 출몰에 대한 소식을 매일 접했지만 '설마 여기까지 오겠어? 남미에 이런 바이러스가 퍼지면 우린 방역체계는 물론 제대로 된 의료시설도 갖추지 못했는데 다 죽고 말 거야' 라며 두려움에 떨며 지내다가 이내 내가 사는 파라과이까지 바이러스가 순식간에 퍼져버렸다.
파라과이에서의 첫 번째 감염자 소식을 뉴스로 접했다. 전 세계와 동일하게 이곳 또한 마스크 대란이 일어났고 그 외에도 소독제와 방역 물품들이 모자라 가격이 치솟는 등 불안정한 상태가 일어났다. 며칠 전까지 주말에는 줄을 서서 들어갈 만큼 북적이는 술집에서 지인들과 모여 올해 목표를 각자 다짐하며 술자리를 가졌었는데, 1주일 후 파라과이는 전국이 LOCK DOWN에 들어갔다.
우리는 역사책에서만 듣던 'Cuarentena'라는 것에 돌입했다. 또 다른 말로는 '자-가-격-리'. 전 국민이 국가의 통제 아래 강제 집콕 생활을 시작했다. 집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약국과 식료품 구매'를 위한 외출이 전부였다. 국경이 모두 막혀 오고 가도 못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한 달로 예정됐던 자가격리는 상황이 나아지지 않아 그 기간을 5회나 연장하며 약 2 달반의 기간 동안 우리는 세상과 단절한 채 살아갔다.
상황은 악화되가기만 했지만 빈곤 수준이 23,5%나 되는 파라과이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는 굶어 죽는 비율이 높아질 것을 우려해, 'Cuarentena Inteligente'라는 '스마트 자가격리' 방침을 내놓았다. 그 이후 상황에 따라 혹은 2주~1달 사이로 업그레이드된 방침들을 지속해서 내놓으며 점차 모든 것들이 정상화되어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모든 시설에는 들어가기 전 손을 닦는 세면대와 바닥에는 소독제가 있는 발판이 설치되었다. 어딘가에 들어가려면 손을 닦는 것과 마스크를 착용하는 게 의무화돼버린 세상. 친구를 만나고 가족이 모여도 불안함에 떨어야 하는 세상이 되어버렸다.
확진자가 한때 200명 수준을 몇 달 동안 유지했으나 최근엔 1천 명 언저리까지 치솟았다. 연말이나 연휴가 되면 새벽시간 통제 외에는 큰 규제를 두지 않고 있고 10월부터는 막혀있던 국경과 하늘길이 열렸다. 11월부터는 입국 시 자가격리 또한 더 이상 필요 없어졌다. 우리 모두가 무뎌졌고 나조차 가끔 집으로 친구를 초대하기도 하고 밖에서 커피 한잔의 여유를 즐기기도 한다.
파라과이는 인구의 70%가 35세 이하인 젊은 국가라서 그런지 '무증상자'가 많다. 어쩌면 확진자가 일 1천 명보다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고, 60대 부모님과 살고 있는 나는 늘 불안하다. '알코올을 뿌려라, 마스크를 잘 써라, 나가지 말아라' 등 잔소리가 늘었고,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서 친밀감은 싸였지만 과연 좋기만 한지 의문이 들 만큼 말싸움도 잦았다.
아마 2020년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지인들과 얘기를 나누다 보면 2020년이 워낙 최악의 해라 '외계인이 침략'을 하거나 '지구가 곧 멸망'한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올해가 끝날 때 즈음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들은 '올해는 코로나 말고는 아무 기억도 안나' 혹은 '살아남느라 수고했어'였다.
2021년에도 잘 버텨내서 "라떼는 말이야..."를 웃으며 말할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