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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트 Dec 06. 2019

허먼 멜빌의 '모비딕'

고래에 대한 것이면서 고래에 대한 것이 아닌







 어쩐지 내가 읽었을 거라고 주변에서 짐작하고 있기에 항상 마음속 부채와도 같던 책, 벼르고 벼르던 모비딕을 드디어 읽었다. 생각만 하던 완역본을 독서모임 통해서 읽은 건 돈키호테 이후 모비딕이 두 번째. 


 읽으면서 계속 든 생각은 멜빌이 왜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했는지 이유를 너무나 잘 알겠다는 것. 일단 말이 지나치게 많고, 서술 형식이 파격적인 데다 지금 읽어 봐도 작품이 상당히 현대적인 동시에 난해한데 1850년대에 이게 먹혔을 리가.. 시대를 앞서가는 천재일수록 외로운 생을 견뎌야 하는 게 숙명인가 싶기도 하다. 결과적으로는 그래서 이 괴물 같은 작품 모비딕을 후세에 남기게 되었으니 생전에 못 얻은 명성을 역사 속에 새기고 작가로서는 영원히 살게 되었구나.

 워낙에 해석이 다양하게 뻗어 나올 수 있는 작품인 데다 아무말대잔치로 난 이렇게 물구나무서기 하며 읽었다고 주장해도 누가 맞다 틀리다 가려줄 수도 없고, 그런 면에서 독자의 특권을 마음껏 즐기기 좋은 책인데.. 모임에서는 다소 안전하고 평이한 이야기들이 오가서 그 부분이 살짝 아쉽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모비딕은 읽는 독자의 심리나 마음 상태에 따라 서로 다른 부분이 와 닿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광기로, 또 다른 누군가는 인간의 자유 의지로, 아니면 집착으로, 혹은 운명에 대한 도전으로, 무모함으로, 진리에의 추구로도, 미지를 향한 맹목으로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대자연과의 갈등이었다고 말하거나 권위에의 순응으로 보더라도, 또는 19세기 미국 또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자체의 작은 축소판이라고 설명하더라도, 그저 무덤과도 같은 신념과 철학을 그린 거라고 느꼈다고 해도 모두 일리가 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의 포용력은 실로 탁월하다.

 그러나 결국 문학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이 소설이 인간의 심연으로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 그것을 작은 조각으로 분해했다가 다시 짜 맞추고 또 풀고 엮는 작업을 반복했던 멜빌의 내면을 그대로 쏟아부은, 일종의 아름다운 모자이크였다고 생각한다. 또 작품의 수백 페이지에 걸쳐 고래에 대해 방대한 양의 정보를 늘어놓고 있지만 그것은 마지막에야 비로소 맞닥뜨리게 되는 '모비딕'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우리는 스스로 무언가를 잘 안다고 믿고, 가끔은 그것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정작 대상의 실체를 마주했을 때 그 모든 정보들이 한 줌 공허한 파편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가 있다. 작품을 내내 관통하는 고래에 대한 어마어마한 서술, 지루할 정도로 많은 그 내용들은 정말 모비딕에 대한 것인가? 오히려 모비딕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수없이 많은 그 페이지의 말들을 아무리 열심히 모으더라도, 그것이 모비딕이라는 존재 자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말과 서술과 실체 사이의 거리는 그만큼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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