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고싶어서 잊었다

by 디카라떼

언제부터인가 가식의 인사가 보편화된 작은 사회를 마주하게 되었다. 진심은 아니지만 밝게 웃으며 인사해주고, 실제 관계에서 여러 사정을 붙이며 벽을 만들어내는 방식. 감사하게 여기고 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애달프게 여기는 '가면'의 인사.

인사는 진심을 다 교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짧게 마음을 담아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여기고는 있었는데. 사용 용도의 다양성을 마주하면서 참 요즘은 신기한 사회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한 영화의 엔딩에서 이런 대사를 했다. "Good morning! In case I don't see ya, good afternoon, good evening, and good night." "좋은 아침입니다! 나중에 못 볼지도 모르니, 좋은 오후, 좋은 저녁, 좋은 밤 보내요." 이제 영영 헤어질 것을 담은 마지막 인사였다.


소중하다고 생각하지만 트러블이 많이 나는 지인에게서 경험해보지 못한 특이한 인사를 몇번 연달아 받은 일이 있었다. '안녕하세요~(안녕) 가세요~?(응) 잘가세요~' 앞선 인사처럼 뭔가 대화의 여지를 갖지 않겠다는 다짐이 들어간것처럼 보였고, 그게 몇번씩 반복된 상황에서는 나도 마음의 문이 닫히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이 상황이 특이한 건 서로 반대방향에서 오가는 인사였다면 모르겠지만, 같은 방향 비슷한 속도와 보폭으로 가고 있는 상태에서 서둘러 보내려고 하는 듯한 인사였다고 느낀 부분이었다. 내가 한번도 시도해보지 않았던 그 '떨어내는 인사'를 그 사람에게도 따라 해주었다. 첫번째는 의뭉스러운 태도로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넘어가고, 두번째부터는 무슨일 있냐며 뭐가 문제냐며 묻고, 세번째 하려 했을 때는 왜 삐져서 그러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하라는 다툼의 상황이 생기게 되었다. 자기가 그렇게 한 데에는 나도, 자기와 같이 있는 타인도 소중히 하는마음에서 모두를 신경쓰느라 발생한 관심의 표현이었는데 대체 어떻게 해주길 원하냐고. 어차피 또 만날건데 질투하냐고, 가볍게 하면 뭐 어떠냐고.
나는 '삐졌다'라는 표현이 거북했지만 그 서운함의 표현을 표면화했을 때,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탓이라는 공고한 논리가 무척 답답했고. 그런 인사를 할거라면 차라리 하지 않음보다 못하니 간단한 신호로 다음에 연락하겠다 한마디면 충분하다고 설명해주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서로에 대해 잘 이해하게 된 많은 트러블과 화해가 있었음에도, "우리가 봤으면 얼마나 봤으며, 얼마나 안다고" 라는 대답은 이 관계의 허망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의 질문이 그 대답을 만들어낸 거다. "그렇게 대화하고도 아직도 날 모르는거야?" 나는 어떤 희망스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화해하는 동안에 자기의 말은 표면뜻과 다르게 해석의 맥락이 있잖냐는 변명이 있었지만, 왜 남이 이해하는 것을 탓으로 돌릴까. 에너지 고갈이 왔다. 각자의 영역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으니까 차라리 '너는 그런 마음이구나' 하고 인정하고싶었달까. 근데 그렇게 경험해보고도 아직도 모르는건, 그 사람이 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우리는 소통되지 못한다는걸.


며칠 후 그 아이의 sns프로필이 단적으로 바뀌었다. 주요 정보가 다 사라지고 일반적 관계에서 누구나 접근 가능할 것 같은 단계로 보였다. 그런 갑작스런 변동에는 개인 사정이 있겠지만, 내가 사전에 알고있던 정보에 의하면 친분관계의 층위가 있는데, 거기서 재조정을 거친 자기만의 분류가 아닐까 싶었다. 처음 우리가 형제와 같이 지내던 날들에, 누군가와 틈이 생겼던 때에도 '부인함'에서 시작했다가 친근한 인사와 함께 절연하는 단계는 몇번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때마다 '내 차례는 몇번째일까' 궁금하기도 했었다. 그 사람은 자기 관계의 진일보가 있을 때 기존 인원은 맥만 유지한 후 새 터전에서 울타리를 단단히 세운다거나, 후퇴시 후방 지원이 필요할 때 찾아오는 행동을 자주 보였다. 나는 후방 지원군으로 늘 응원을 했지만 현저히 떨어진 인사의 반응속도나, 대답의 깊이나, 변명과 울타리에 이미 많은 믿음을 잃어버린 상태였던 것 같다.
그래도 오해를 충분히 풀어낸다면 회복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또다시 많은 시간을 들여 늘 마주치지만, 먼 곳에서 기다리듯 관여하지 않는 형제처럼 믿음의 회복으로 관계를 정돈해두고 싶었던 것 같다. 근데 그 정돈에도 불구하고 떠나보내려 애쓰는듯한 그 인사는 받아들이기가 어렵도록 서운했던 것 같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까지 돕냐고 물을때에도 내가 정 들여 세워주려 했던 나의 욕심이 그 관계를 내려놓지 않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찌됐든 그 이벤트 끝에 이제는 진짜 내 차례가 도달한 것 같다. 시작도 양쪽에서 하나씩 담아낼 때 나타나지만, 끝냄도 나만이 아니라 상대에서도 하나를 내려놓아야 이뤄지는것 같다. 어떤 이유를 찾았든 이제는 내려놓을 명분을 그 사람도 찾았겠지.

진심을 감추기 위해 더욱 친근해지는 인사의 모습. 과연 어떤 날에 나는 그 인사를 믿을 수 있을까? 한편으로는 믿음이라는건 서로 잘 모를때 발생하는건 아닐까도 싶다. 그 사람이 말했듯이 우리가 알면 얼마나 알았겠나. 차라리 서로 잘 모름을 통해서 서로를 믿을 수 있다면, 그 선택도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 짧지만 오랜 기간을 즐거웠던 추억으로 해석할 수만 있다면, 모르는 사이가 되어 이제야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서로를 위해서 모르는 사이가 될 용기가 나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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