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오늘을 놀고 나는 과거를 놀았다

by 디카라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초등 저학년 쯤 돼 보이는 아이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너랑 놀아도 돼?" 대답은 거절이었나 보다. 그 아이는 아쉬운 마음을 접어 오늘 이뤄지지 못한 만남을 엘리베이터에 떼어 놓고, 모르는 내게 인사를 한 뒤 내렸다.

놀 수 있냐는 전화에서 느껴지는 간절함과 짙게 묻어나는 아쉬움의 목소리가 너무 생생하게 전달돼서, 잠깐 '같이 논다'는게 뭘까 생각해보게 됐다.

놀자는 것을 좀 더 단순화 하면 같이 웃자는 신호를 보내는 게 아닌가 싶다. 싸우고 따지려고 놀자하지는 않을테니까. '같이 웃자, 무엇을 하든 너랑 같이 서로를 대하고 비추어 웃을 일을 만들어 가자.' 아이들은 특별한 맥락을 가지고 말하진 않았을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걸림 없는 웃음 그 자체로 자기 존재함을 끌어 올리고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것 같다.


나도 근래에 통화를 하면 '넘어갈게' 혹은 '들를게, 잠깐 놀러갈게' 같은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실제 만나 얘기를 하다보면 같이 '웃을 수 있어서' 즐거운 날들은 많지 않았더라. 대개는 하소연이었고, 놀러 간다 하더라도 몇마디 하소연 뒤엔 티비로 튼 음악을 배경으로 할말없이 리듬만 타고 있을 뿐. 몇마디의 안부 점검 후에 해결책 상의같은 상태가 꽤 오래 반복돼 오고 있었다는걸 돌아보게 된다.

어떤면에서는 나이에 따른 논다는 형태의 변화일수도 있겠지만, 같이있던 친구의 '애들이랑 놀 때' 라는 표현에서 경계면이 또 존재하는 것을 통해, 내가 노는 방식이 어떤 면에서 모양이 결여된 형태로 있었는지도 모르겠더라.

나는 언제 노는 상태가 되는거였나? 마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의미에서의 놀다가 아니라, 웃지 않는 상태의 즐김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모임처럼 만사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떠들썩 웃으며 보내는 시간, 언제였을까?

때때로 내게도 무장해제하게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때 인연이라고 그때에도 '이렇게 웃는 날이 한정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그 마지막을 이미 지나간 삶의 흔적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점은 놀랍게도 한다. 이제는 그런 만남의 짧음을 알게되면서 기억에 남길 장치들을 더 사용하기도 하고, 최대한 그 시간을 눌러 담으려 하기도 하는 중이다. 그러다보면 자꾸 나도 모르게 철이 다 떠난 사람처럼 즐기지 못하는 순간들도 보이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처럼 놀지 못했나보다.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낼 마음의 상태가 변해버린 것 같다. 시작에 이미 마지막을 점치고 있었기 때문에 웃음보다는 사라질 날에 대한 애도함이 더 컸던 날도 때때로 있었다. 내게서 '놀러 갈게' 라는 의미의 비중이 많이 변해왔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 노는 순간에 나의 마음을 풀어놓지 못했다. 그리고 논다고 생각하는 역할로서 선택한 것이 기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매 만남에서 나는 나를 풀어놓기보다 붙잡기를 선택했지만, 돌아보면 추억으로 두고싶지 않을만큼 틀어진 날들도 많았던 것같다. 붙잡은 날이 마냥 즐거운 기억이 아닐때는 그 시간 통채를 비워버리게 되거나, 마주하지 못할 날로서 내버려 두게 되었던 거다.

아이를 통해서 느낀건, 나이를 떠나 사람으로 살면서는 꾸준히 아이같이 사는 모습도 있어야 하겠다는 부분이었다. 내가 붙잡은 날들을 완전히 곁에 둘만큼의 용기가 부족한것도 있지만, 그 날을 통채로 비우게 되었을 때 적어도 웃었더라는 감정만큼은 남았으면 좋겠다. 내가 그날은 뭘 했는지는 모르지만 잘 놀았던 것 같다고, 기억은 못해도 아낌없이 충전했다고. 나의 사랑하는 마음에서 남기는 행위들이, 때로는 그 행복을 너무 중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을 위한 기록의 다양화도 중요하지만, 남기지 못한 기록속에서 나중되어 드러나는 소중함 그리고 아쉬움도 의미있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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