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2020년 3월 21일 작성한 글입니다.

by Pato

'오줌싸개'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피신'은 꼬마 시절부터 남다른 의지력을 가진 아이였다. 'pissing' 대신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동급생들 앞에서 원주율 '파이'의 소수점 뒷자리를 칠판 세 개가 가득 차도록 외워서 적어 보일 정도로. 청소년이 된 아이는 더 큰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화물선에 승선한 파이와 그 가족에게 무자비한 태풍이 덮쳐 온 것이다. 파이는 홀로 살아남아 지난하고 외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파이'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시절 읽은 책 <파이 이야기>를 통해서 였다. 매 주 4 권의 책을 가져다 집 앞 문고리에 걸어다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부모님의 의지로 시작한 터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대로 반납한 적이 많았다. <파이 이야기>는 도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 몇 년의 시간 동안 완독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당시에는 파이의 표류기 그 자체를 탐독했던 것 같다. 망망대해에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단 둘이 남겨진 파이. 그는 어떻게 살아남게 될까. 이야기 표면의 서스펜스를 관전 포인트 삼았던 것이다.



돌고 돌아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파이'와 재회했다. 영화 모임의 표제작이어서였다. 처음엔 의무감에 영화를 틀었지만, 마지막 장면을 본 뒤 내가 기억하는 '파이 이야기'는 잊혀졌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었다. 다시 들은 '파이 이야기'는 '신앙 이야기'였다. 무신론자로서 신을 믿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생애 최초로 종교인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이 이야기는 다소 믿기 어려운 '첫번째 이야기'와, 있을법한 '두번째 이야기'로 나뉜다. [ 하이에나는 다친 얼룩말을 죽였고, 이에 오랑우탄이 대들자 그 역시 공격한다. 분노한 파이가 하이에나에 반격하려 할 때, 구조 보트 한 켠에서 쉬고 있던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하이에나에게 먼저 달려든다. ] [ 요리사는 다친 선원을 죽여 낚시를 위한 미끼로 썼고, 이에 분노하여 대든 파이의 어머니마저 죽여 바다에 버린다. 분노한 파이는 칼을 들어 요리사를 죽이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체를 미끼로 낚시를 하며 살아남는다. ] 영화 속에서 두 버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작가와 일본 조사관들)은 모두 첫 번째 이야기를 믿기로 한다. 어쨌든 두 이야기 모두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없을 때, 믿기 힘들지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첫번째 이야기를 믿기로 '결정'하는 것. 내가 직접 내 삶의 진실을 선택하는 것. 그게 바로 신앙이라는 게 '파이 이야기'의 보다 깊은 메시지였다. 상처받은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믿음 말이다.



종교보다는 과학이 더 친숙한 나는 줄곧 일면 믿음을 폄하해왔다. 하지만 과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엔 많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할 때가 그렇다. 파이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듯이, 가슴 안에 있는 걸 설명하기에는 종교가 더 적합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와 기독교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은 '창조론'이다. 다윈의 증거들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모든 생물은 각자가 살아남기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라는 게 내가 믿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전제로서의 '생의 의지'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새로이 깨달았다. 태초의 생명체는 왜 삶을 소중히 여겨 최대한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는가. 생명체에게 삶이란 늘 축복일 수 없다. 파이에게 그랬듯이 예상치 못한 역경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보다 삶을 선택하려는 본능, 파이가 험난한 표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근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으로의 '의지'야 말로 신앙을 통해서야 비로소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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