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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ato Aug 03. 2020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2020년 3월 21일 작성한 글입니다.

'오줌싸개'라는 별명을 가진 소년 '피신'은 꼬마 시절부터 남다른 의지력을 가진 아이였다. 'pissing' 대신 '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위해, 동급생들 앞에서 원주율 '파이'의 소수점 뒷자리를 칠판 세 개가 가득 차도록 외워서 적어 보일 정도로. 청소년이 된 아이는 더 큰 역경을 마주하게 된다. 인도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 위해 화물선에 승선한 파이와 그 가족에게 무자비한 태풍이 덮쳐 온 것이다. 파이는 홀로 살아남아 지난하고 외로운 항해를 시작하게 된다.



'파이'를 처음 만난 건 중학생 시절 읽은 책 <파이 이야기>를 통해서 였다. 매 주 4 권의 책을 가져다 집 앞 문고리에 걸어다주는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부모님의 의지로 시작한 터라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고 그대로 반납한 적이 많았다. <파이 이야기>는 도서 배달 서비스를 이용한 몇 년의 시간 동안 완독한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당시에는 파이의 표류기 그 자체를 탐독했던 것 같다. 망망대해에 호랑이 '리차드 파커'와 단 둘이 남겨진 파이. 그는 어떻게 살아남게 될까. 이야기 표면의 서스펜스를 관전 포인트 삼았던 것이다.



돌고 돌아 <라이프 오브 파이>라는 제목의 영화로 '파이'와 재회했다. 영화 모임의 표제작이어서였다. 처음엔 의무감에 영화를 틀었지만, 마지막 장면을 본 뒤 내가 기억하는 '파이 이야기'는 잊혀졌다.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야기를 들은 느낌이었다. 다시 들은 '파이 이야기'는 '신앙 이야기'였다. 무신론자로서 신을 믿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본 기분이었다. 생애 최초로 종교인에 공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이 이야기는 다소 믿기 어려운 '첫번째 이야기'와, 있을법한 '두번째 이야기'로 나뉜다. [ 하이에나는 다친 얼룩말을 죽였고, 이에 오랑우탄이 대들자 그 역시 공격한다. 분노한 파이가 하이에나에 반격하려 할 때, 구조 보트 한 켠에서 쉬고 있던 호랑이 '리차드 파커'가 하이에나에게 먼저 달려든다. ] [ 요리사는 다친 선원을 죽여 낚시를 위한 미끼로 썼고, 이에 분노하여 대든 파이의 어머니마저 죽여 바다에 버린다. 분노한 파이는 칼을 들어 요리사를 죽이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사체를 미끼로 낚시를 하며 살아남는다. ] 영화 속에서 두 버젼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작가와 일본 조사관들)은 모두 첫 번째 이야기를 믿기로 한다. 어쨌든 두 이야기 모두 사건의 전말을 밝힐 수 없을 때, 믿기 힘들지만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첫번째 이야기를 믿기로 '결정'하는 것. 내가 직접 내 삶의 진실을 선택하는 것. 그게 바로 신앙이라는 게 '파이 이야기'의 보다 깊은 메시지였다. 상처받은 사람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가기 위한 도구로서의 믿음 말이다.



종교보다는 과학이 더 친숙한 나는 줄곧 일면 믿음을 폄하해왔다. 하지만 과학으로도 설명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엔 많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특히 사람의 마음을 이야기할 때가 그렇다. 파이의 어머니가 말씀하셨듯이, 가슴 안에 있는 걸 설명하기에는 종교가 더 적합할 때도 있는 법이다.



나와 기독교 사이의 가장 큰 장애물은 '창조론'이다. 다윈의 증거들이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모든 생물은 각자가 살아남기 유리한 방향으로 진화한 것이라는 게 내가 믿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대전제로서의 '생의 의지'는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번에 새로이 깨달았다. 태초의 생명체는 왜 삶을 소중히 여겨 최대한 오래 생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화했는가. 생명체에게 삶이란 늘 축복일 수 없다. 파이에게 그랬듯이 예상치 못한 역경이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보다 삶을 선택하려는 본능, 파이가 험난한 표류 생활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근원.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생명으로의 '의지'야 말로 신앙을 통해서야 비로소 설명될 수 있는 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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