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이 된 이유
“페트병 라벨 떼서 버려주라, 빈 캔은 꼭 꾸겨서 버려주라, 주라, 주라 환경 생각해 주라, 떼라, 떼라 박스 테이프 떼주라, 분리수거 잊지는 말아 주라 환경, 환경 친환경 하자”
김신영이 분리배출의 중요성의 알리는 환경 공익 광고에서 부른 노래 가사의 일부다. 분리배출이 일상화된 지는 오래지만 제대로 된 분리배출을 하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가끔 미국이나 선진국을 다녀온 사람들은 분리배출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나라의 분리수거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하지만 분리수거 보다 더 중요한 건 이렇게 수거한 재활용품이 얼마나 재사용되는지 이다. 우습게도 우리나라는 분리수거율에 비해 재사용률은 50%가 되지 못한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활용 투명 플라스틱을 일본에서 수입해 왔을 정도다. 왜 그럴까? 제대로 된 분리배출이 어렵기 때문일까? 물론 이 역시 하나의 이유이기도 하다. 위 가사에 나온 대로 페트병 라벨 떼기, 빈 캔은 구겨서, 박스는 테이프를 떼서... 3가지인데 가까운 아파트 분리수거장을 가서 살펴보면 위 3가지를 100% 지키며 배출된 재활용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왜일까?
비건이야기는 뒤로 하고 생뚱맞게 재활용 분리배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이 사람은 뭔가? 바로 나의 비건은 이 분리배출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맞벌이에서 전업주부가 되자, 갑작스럽게 살림을 잘하는 프로 주부가 된다던지 아이들의 교육에 집중하는 맹모가 된다든지 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럼에도 전업주부가 되었으나 전보다는 살림에 조금은 더 신경 쓰고 아이들이 미래를 염려하는 이 두 가지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나름의 중압감이 있었다. 그러다 내가 돌린 시선은 우리 아이들의 미래 지구의 모습이었다.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시대가 좀 더 따뜻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되기 바라는 마음과 통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환경이었다. 30년 뒤 50년 뒤 지금 사는 동네가 기후위기로 물로 덮이지 않게 하려면, 적어도 내가 뿌린 재앙은 거둬야겠다는 아주 지극히 단순한 모정으로 출발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부엌에서의 환경 실천은 그야말로 3D 작업에 준하는 막일였다. 좋은 말로 하면 살림은 아날로그여야만 친환경이 가능했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밥은 밥솥이 하고 청소는 청소기가 한다며 세상이 좋아졌다고 한 그 입들을 찾아 꿰어주고 싶을 만큼 구석구석 손이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완벽한 수작업의 세계. 그중 제로웨이스트의 첫 발, 제대로 된 분리배출을 해본 적이 있는가. 개미지옥이 따로 없다.
병에 붙은 스티커를 떼어 보려고 애쓴 적이 있는가?
종이박스에 테이프는. 초코파이 박스는 종이로 재활용 분리수거가 될까?
유리병은 녹색, 갈색, 투명한 것만 재활용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유리냄비뚜껑은 일반쓰레기일까?
생분해 플라스틱은 플라스틱으로 배출해야 할까? 일반쓰레기일까?
과일용 포장재는 재활용 배출이 될까? 실리콘은?
열심히 씻어 배출한 플라스틱은 모두 재활용이 되는 걸까?
플라스틱 재질에 따라 분류가 얼마나 많은지 않은가?
하나하나 따져가면 제대로 된 재활용 분리배출은 그야말로 시간 까먹는 세계였다. 점점 대형 마트에서 장을 보고 오는 것이 겁이 나기 시작했다. 플라스틱에, 비닐에 일일이 분리배출하는 그 시간들이 겁이 났다. 더 이상 새 제품들을 사는 게 반갑지 않았다. 거기다 마트를 가면 나의 수고스러움은 그야말로 전의를 상실한다. 어디서 이 많은 플라스틱과 비닐이 쏟아지는 건가. 한 개인의 수고는 그야말로 미미하게 한다. 과연 내가 이 수고스러움을 택하며 분리배출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라는 당위성에 물음까지 제시하게 하는 마트행은 그야말로 매일 지는 싸움터로 나가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럼에도 개인의 몫을 넘기지 말자는 마음으로 지는 싸움이라도 나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을 삼았다.
설거지 세제를 비누로 바꾸고 비누에 적응될 때쯤 수세미를 천연수세미로 바꿔나가고, 가족들에게 일회용 컵대신 유저블컵이나 텀블러를 쓰게 하고 대나무 칫솔을 사용하고 샴푸 대신 비누바를 사용하게 했다. 화장품 역시 친환경적이고 동물실험 없는 착한 기업제품들로 바꿔나갔다. 사실 여기까지는 환경을 위한 제로웨이스트를 추구하기 위함이 더 컸다. 일상의 최대한 친환경적으로 바꿔나가도 이상하게 시원찮았다. 그리고 그 시원찮음과 답답함의 이유는 결국 음식. 나의 자질구레한 노력보다 음식을 개선하는 게 환경에 더 도움이 될 거 같았다. 그러다 나는 이 문구를 기적처럼 만났다.
“일주일에 하루 채식, 1년에 나무 15그루 심는 효과”
“일 년이면 채식만으로도 한 사람당 무려 1.56톤의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다”
"2019년 우리나라 1인당 평균 축산물 소비량을 발생하는 탄소로 환원 시 620.8kg, 국민 1인당 매년 30년생 소나무 104그루가 흡수하는 양의 탄소를 육류 소비로 배출하고 있다"
그래, 이거야!! 그 어떤 제로웨이스트 보다 비건지향, 채식지향이 쉬워 보였다. 거기다 정신 승리를 줄 수 있는 커다란 대의까지 완벽했다. 안 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