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나를 깨우다]를 읽고
중3 아이들과 잦은 마찰이 끊이지 않는 요즘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나의 두통 유발자는 아이들 이지만 남편의 입장에서는 마눌님과 아이들이 되어버렸다. 요즘 나는 자궁이 좋지 않아 6개월 전부터 약을 복용하고 있다. 복용하는 약이 가진 후유증으로 이른 갱년기 증상을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남편의 입장에서는 가정이 살얼음판인 것이다.
기억도 까마득한 그 어느 때, 야근을 밥 먹듯 하며 후배들을 붙잡던 모 차장, “집을 버리셨냐?”는 야유를 쏟던 후배에게 “야, 사춘기 딸에 갱년기 와이프가 집에 있으면 회사가 더 편안한 법이야!” 하는 말에 웃음바다가 되었던 순간이 기억났다. 결혼을 하지 않아도 사춘기와 갱년기가 주는 단어의 힘은 컸기에 고개를 끄덕이던 사회 초년생 시절의 작은 기억이 난데없이 소환되었다. ‘아하,그게 지금 우리 집이구나!’ 하는 자각은 웃음보다는 이마에 주름이 생길만큼 진지한 상황이지만 말이다.
아이들과 충돌을 억제하고 나름 잔소리도 줄여보는 나만의 장치는 책읽기와 필사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집중하다 보면 불안감이나 불만, 불평등이 사라지고 시간은 흘러 그 순간이 지나간다. 꼭 내가 말하지 않아도 일은 흘러가게 되는 데 순간을 참지 못하고 모난 소리가 기어이 터지면 아이들과 마찰이 더 크게 일어난다. 최대한 독서와 필사를 활용해 지적인 엄마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 애써본다.
최근에는 『장자, 나를 깨우다』를 읽으며 필사를 부지런히 꽤나 많은 양을 했다. 책의 내용이 현실에 착착 감기지 못해 오는 간극을 매우기 위해서라고 말은 했지만, 속을 내어 보이자면 장자를 읽으면서도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참지 못하는 나를 만나는 게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아이들과 한바탕 하고 나면 책을 읽는 게 무슨 소용인지, 필사는 뭐고, 또 하필 그 책이 철학책일 때는 헛공부한 느낌에 이중 삼중의 심적 괴로움을 감당하는 것은 여간 고역이 아니다.
설상가상, 장자는 다른 고전에 비해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뽀족하게 다가오는 내용이 너무 많았다. 독설인가 유머인가 헛소리인가 이 3가지에서 계속 경계를 오갔다. (기존의 번역서와는 다르게) 한자를 번역함을 넘어 책의 저자가 들려주는 해설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장자와의 사이에 한 다리가 더 있으니 사실 초입이 쉽지 않은 책이었다.
우화를 읽고 나면 처음에는 무슨 헛소리인가 하고 느낄 때가 다반사였다. 그러다 다음 날이면 문득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나는 날이 조금씩 늘기 시작했다. 유머 같기도 하단 말이지. 풍자라고 하기에는 직접적이라 독설 같기도 하고 헛소리라고 하기에는 진심이고 개그라고 하기에는 슬픔도 담겨 있다. 장자는 우화에 대한 해석이 중요한데 이번 책은 기존 해석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이해가 좀 더 용이한 책 같았다. 결국 작가가 던져주는 해석을 받아먹기에는 기본 지식이 부족한 나를 깨달으며 작가의 해석보다는 우화를 여러 차례 읽어 보는 방법을 택했다.
기억에 남는 문장들이 유독 많고 현실에 적용할 때마다 뼈아프게 찔러 반감도 불쑥 들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메시지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유독 나를 붙잡고 부딪치는 우화가 있었다. 바로 빈 배 이야기 편이다
方舟而濟於河(방주이제어하) 바야흐로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有虛船來觸舟(유허선래촉주) 어떤 빈 배가 다가와 부딪친다면,
雖有惼心之人不怒(수유편심지인불노) 비록 성질 급한 사람이라 해도 화를 내지 않을 것이다.
有一人在其上(유일인재기상) 그러나 그 배에 사람이 타고 있다면
則呼張歙之(즉호장흡지) 소리쳐 비키라고 할 것이다.
一呼而不聞(일호이불문) 한 번 외쳐서 듣지 않고,
再呼而不聞(재호이불문) 두 번 외쳐서 듣지 않으면
於是三呼邪(어시삼호사) 세 번째는
則必以惡聲隨之(즉필이악성수지) 반드시 욕설이 따를 것이다.
向也不怒而今也怒(향야불노이금야노) 이전에는 화를 내지 않았는데 지금은 왜 화를 내는가?
向也虛而今也實(향야허이금야실) 이전에는 빈 배였는데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人能虛己以遊世(인능허기이유세) 사람들이 자기을 비우채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其孰能害之(기숙능해지) 누가 나를 해칠 수 있겠는가!
<『장자, 나를 깨우다- 5장 빈 배처럼 누구도 아닌 존재가 되어라 편』, 북스톤, e-book>
이 이야기를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화를 내거나 누군가가 나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내게 ‘나’가 존재하고 나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부딪치고 깨지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고 받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는 의식 자체가 욕망의 근원이기에 이를 설파하면서 ‘빈 배’의 비유를 들고 있다. 장자는 나를 버리고 만나는 모든 대상과 하나가 되길, 우리게 벽이 되지 말고 차리기 문이 되길 권유하며 모든 사물을 통과시키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읽고 읽어도 빈 배의 이야기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나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비우면 편안하다는 말이 글자로는 이해가 되지만 도통 실생활에서는 뜬구름같은 이야기다. 이 눔의 빈 배는 왜 주인도 없이 떠다녀서는 애꿎은 빈 배만 탓하고 있을 뿐이다.
남편은 퇴근 후 집에 들어오면 ‘다녀왔습니다’ 하는 인사와 함께 자신의 행보를 이어간다. 자신의 할 일을 하고 그 외에 나와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요구하거나 요청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에 부딪힘도 없다. 오히려 내가 난리다. 아빠가 퇴근하고 오셨는데 인사하러 나오라고 부르고 남편이 잠자리를 들려고 하면 아빠가 주무신다고 하며 인사하라고 애들을 불렀다. 어느 날, 남편이 나에게 그렇게 작은 것까지 신경안써도 아이들은 알아서 할 거라고 흘리 듯 말했다. 그 말 덕에 몇 일을 말없이 아이들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부르지 않아도 아빠에게 인사를 했고 자신의 것을 했다. 다만 나와 속도가 다를 뿐이었다. ‘조금만 더 일찍 움직이면 좋을 텐데’ 하는 마음의 소리가 입으로 나오는 것을 꾹 누르다 문득 말하면 재깍재깍 바뀌거나 반응하길 원하는 내 마음이 보였다. 아이들과 이야기를 할 때마다 한 번만 이야기 하면 될 것을 두 세 번 이야기해 잔소리가 되게 만든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나였던 것이다.
여러 차례 이야기 하고 행동이 수정되지 않으면 혼자 분을 삭히지 못해 아이들에게 화를 냈던 시간들이 몇 차례 떠올랐다. 영문도 모른 체 고스란히 엄마의 화를 받아야 했던 아이들에게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엄마라는 타이틀로 어디까지 침범하려고 했던 것인가, 내 자식을 훈계한다는 핑계로 일부러 부딪히러 간 순간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 책의 저자가 말하듯 ‘자의식, 자존감, 우월감, 아집 등이 가득차’ 있음에도 엄마라는 포장을 씌워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상처를 받는 일들의 연속이었다.
몇 년전 그렇게 좋아하던 『그리스인 조르바』가 책장에서 보인 건 우연이었을까, 이 문구는 나의 육아 경전으로 삼겠노라 하며 밑줄을 긋다 못해 독서일기에 옮겨 적고 다짐까지 쓰게 했던 글귀가 떠올라 페이지를 펼쳐 보았다.
어느 날 아침에 나뭇가지에 붙어 있던 나비의 번데기를 본 기억이 났다. 나비는 번데기에 구멍을 뚫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 기다리던 나는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 입김으로 열심히 데워 주었다. 그 덕분에 아주 빠른 속도로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집이 열리면서 나비가 천천히 기어 나왔다. 그러나 날개가 뒤로 젖혀지며 구겨진 나비를 본 순간의 공포는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다. 가엾은 그 나비는 날개를 펴려고 안간힘을 썼고 나도 도우려고 입김을 불어 주었지만 소용없었다. 번데기에서 나비가 되면서 날개를 펴는 일은 태양 아래에서 천천히 진행돼야 했던 것이다. 때늦은 후회가 밀려왔다. 내 입김 때문에 때가 안 된 나비가 집을 나선 것이었다. 나비는 몸을 파르르 떨고 몇 초 뒤에 내 손바다 위에서 죽었다. 가녀린 나비의 시체만큼 내 양심을 무겁게 짓누른 것은 없었다. 오늘에서야 나는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일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깨달았다. 서두르지 말고, 안달 내지도 말고 자연의 리듬에 몸을 맡겨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스인 조르바』,니코스 카잔차키스,더클래식, 159~160쪽
나의 시간이 아닌 아이들의 시간을 지켜주겠노라고 강요가 아닌 기다림으로 아이들의 흐름을 순리처럼 따르겠다던 나의 다짐이 어색해 보이기만 했다. 민망함에 혼자 속닥거리며 마치 새로운 발견을 한 듯 대견함으로 덮어보려 한다. ‘ 자유를 갈망하는 이들은 닮은 구석이 있군. 장자든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카잔차키스든 말이지. 으..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