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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독가의 서재 Jun 12. 2023

모든 사람은 혼자다를 읽고

아무튼 리뷰, 짧아도 쓴다.


작년 [제2의 성]을 읽고 기회가 될 때마다  보부아르 책을 읽으려고 한다. 문제는 그녀의 책을 읽고 나면 한 동안 책 읽기 마비 상태가 온다. 어떤 책도 어떤 글도 쓰는 게 쉽지 않다는 것. 다른 철학책들에 비해 설명이 와닿기 때문인지 오히려 생각을 계속 요구한다. 충분히 생각해 볼 수 있는 메시지를 던져 계속 그 방향으로 생각이 이어져 있어 다른 책 읽기 등의 활동은 멈춰져 버린다.      


이 책을 한 줄 요약하면 제목은 냉기가 넘치지만 책을 덮으면 차갑지만 따뜻한 햇살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결혼한 독신녀 보부아르”라는 작은 글귀 때문에 원제목 [Pyrrhus et Cineas] 그대로 갔어야 한다는 비판도 많이 받은 책이다. 하지만 다 읽고 나니 그딴 작은 글씨에 날을 세우기보다 [모든 사람은 혼자다]라는 책명을 뽑아낸 것에 박수를 쳐주고 싶다.

      

본론을 들어가기 전 뒷장에 수록된 역자후기를 읽고 들어가면 철학적 용어들이 정리되고 본문도 훨씬 편안하게 받아 들 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본문을 읽기 전이든 후든 어찌 되었든 꼭 역자후기는 읽어보길 강추한다.   

   

가끔 지구 어딘가에서 누군가 굶어 죽는 아이들을 위해 기부를 하고 전쟁소식에 눈물을 흘리고 일면식도 없는 누군가의 불행한 사건에 함께 욕을 하는 모습에 가끔 스스로도 ‘사실 내 일도 아닌데 왜 그럴까?’ 하는 자문을 할 때가 있다. 그런 모든 행위에 대해 명쾌한 해석은 아닐지라도 이 책은 어느 정도 내게 답을 주었고 또 내가 앞으로도 어떤 삶을, 어떤 하루를 만들어 나가야 할지, 그러한 나의 삶이 왜 의미가 있고 중요한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P.25 사람은 누구의 이웃도 아니다. 어떤 하나의 행위를 통해 자신이 타인의 이웃이 됨으로써 타인을 자신의 이웃으로 만든다.      


P.28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편에 서 있는 한 지식인은 결코 프롤레타리아가 되지 못한다.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곁에 서 있는 지식인일 뿐이다. 반 고흐가 그리는 그림은 새롭고 자유로운 창조이다. 가령 그가 한 장의 고갱 그림을 그리려고 한다면, 그 그림은 반 고흐의 의해 고갱의 모방밖에는 되지 않을 것이다. 캉디드의 조언이 쓸데없는 참견으로 끝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요컨대 내가 경작하게 될 것은 언제나 나의 뜰이다. 나는 죽을 때까지 그 속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 자신이 경작하는 순간부터 그 뜰은 나의 것이 되므로. 


P.29 이 뜰은 미리 제시 된 것이 아니다. 그 장소나 한계를 선택하는 일은 완전히 나에게 달린 문제이다.      


P.49 오로지 자신의 개별 상황 속에서만 인간은 그 자신이 된다.      


P.82 인간은 매 순간 자신의 존재를 존재해야 한다. 순간마다 그는 자신을 존재시키려고 노력한다. 이것이 바로 기투이다.      


P.99 한 생명의 연속적인 순간들은 그 추월 속에서 보존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분리되어 있다. 인류에 있어서나 개인에 있어서 시간은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P.110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에게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P.114 부동의 자세이건, 아니면 마구 움직이는 자세이건 간에, 우리는 언제나 지구 위에 올라앉아 있다. 모든 거절은 선택이고, 모든 침묵은 목소리이다. 우리의 수동성조차 우리 의지의 소산이다. 선택하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선택해야 한다. 선택에서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P.152 우리는 언제나 하나의 ‘다른 곳’으로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른 곳이라는 것도 어딘가에 있는 장소이다. 우리는 인간 조건으로부터 절대로 도망칠 수 없고, 인간 조건을 비판하기 위하여 외부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방법도 없다. 인간 조건만이 우리로 하여금 말하게 한다. 선과 악이 정의되는 것도 인간 조건을 통해서이다. 효용, 진보, 두려움 등의 말들이 의미를 가지는 것은 기투가 관점과 목적들을 출현시킨 세계 속에서일 뿐이다. 이 관점과 목적들은 기획을 상정하기는 하나 거기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인간은 자기 이외의 다른 아무것도 모른다. 그리고 인간적인 것 이외에도 무엇 하나 생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면 도대체 인간을 무엇에 비교해야 할까?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비판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무엇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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