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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책과 글

나는 왜 독서를 하는가?

책을 좋아하게 된 이유

by 비평교실

1. 나는 왜 책을 읽게 되었는가?


처음 고전을 접하였을 때 충격이 떠오른다. 니체가 쓴 <도덕의 계보>는 대학생이었던 내게 큰 혼란을 안겨 주었다. 나는 윤리가 정해졌다고 믿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칭찬을 좋아하고, 겸손한 사람을 좋아하고, 남을 괴롭히는 사람을 싫어한다. 수동적이기보다 능동적인 게 낫고, 소심한 사람보다 조화를 이루고 화합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또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것이 선이고 더 옳은 것이라 믿었다. 한 번도 이 주제에 대해 의심을 품어보거나 잘못되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이 말뜻이 니체는 남을 괴롭히기 좋아하고 소심한 사람이 더 낫다고 말하는 그런 이분법적 철학자라는 말은 아니다.


내가 충격받은 건 내가 가진 생각, 도덕, 윤리, 믿음, 신념, 관점이 모두 사회에서 비롯되었단 사실이었다. 20살이었던 나는 니체가 한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는데 한참 찾아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로부터 세뇌당한 걸까?

<1984>, <멋진 신세계>처럼 국가가 특정 사상을 유도한 게 아닐까? 자유를 지지하고, 다양성을 존중하고, 심지어 어떤 다양성 중에서는 어떤 다양성은 배제되어야 하는 것인지를 내 생각이 아니라 국가나 특정 집단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단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니체는 바로 그 부분을 건드렸던 거다.


2. 만약 모두가 자기 역할을 올바르게 실천한다면 세상은 평화로워질까?


나는 윤리적인 삶을 살고자 하였다. 서로 사랑하고, 약자를 베풀고, 인의예지를 실천하고, 자비를 베풀며,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 모든 사람이 제각기 자기 역할을 다하고, 할 도리를 다하면 세상은 평화로워지지 않을까? 하지만 니체가 이러한 사상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는 비관적이고 하나의 악당처럼 보였다.


“니체가 살아가는 게 정말 싫었나 봐요.”

라고 물으면 그 누구보다 인간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했다고 말하였다. 나는 니체 사상이 무엇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니체를 이해할 때까지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누군가를 비판하려면 뭔가 알아야 비판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독서가 시작되었다.


<제 역할, 제 도리를 다하면 이 세상은 평화로워진다>


나는 살면서 이 말을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학생은 학생답게, 선생은 선생답게, 지도자는 지도자답게, 의원은 의원답게, 시민은 시민답게 행동하면 그 행동은 선한 동기에 따라 선한 행동으로 나오고 선한 행동이 선한 공동체로 간다는 건 상식 아닐까?


다만 이기심, 욕심, 탐욕, 나태함, 게으름 등 내면에서 비롯한 악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해서 세상이 점점 황폐화되어 가는 게 아닐까?

하지만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이 말의 허점이 점점 선명해졌다. 단지 이상적이고 이룰 수 없는 세계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만약 저 말이 100% 가능한 세계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수라장이었던 거다.


3. 무거운 마음으로 고전을 읽자.


자기 계발서와 에세이 위주로 읽는 내 습관을 바꾸었다. 더 많은 이해, 더 깊은 사고를 위한 선택이었다. 독서 모임을 나가게 되었다. 고전을 섭렵하기 시작하였다. 유명한 책 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이 왜 이렇게 많을까. 유명한 책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두께는 왜 이렇게 두꺼울까. 저 책을 내가 언제 다 읽을까?

내가 읽지 않은 책, 저 많은 책을 다 읽지 못하고 죽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죄책감이 들었다. 또 무게감에 짓눌렸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죄책감 혹은 의무감도 필요하다.


요즘은 책을 가벼운 마음에 들어보자고 말하지만 결심을 굳히기 위해서는 의무감도 필요하다.

책을 읽지 않는다고 병에 걸리거나 못생겨지지 않는다. 운동을 하지 않게 되면 나태해지고 게을러지고, 병이 생기고, 자주 피곤해지고 소화가 안 되는 페널티라도 있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책을 읽지 않아도 잘만 살 수 있다. 동물 중에 인간만이 유일하게 책을 읽는다. 독서는 인간만 할 수 있는 행동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유일한 행동이다.


머리 아픈 책을 읽고 나면, 두꺼워서 읽을 엄두가 나지 않는 책을 읽으면 금세 자기 자신과 타협하고 만다. 웹툰도 책이 아닐까? 유튜브도 독서 아닐까? 웹소설과 순문학은 똑같은 글인데 이거도 권수로 쳐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두꺼운 책 혹은 내가 그동안 어려워서 엄두도 내지 못한 책과 씨름하고 나면 똑같은 말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세상이 다르게 보인다. 밝았던 세상은 점점 어두워졌다가, 어둡기만 한 세상이 조금은 밝아 보인다.


직접 경험은 생생한 체험을 주지만 편견에 휩싸인다. 간접 경험은 직접 겪어본 것만은 못하지만 더 넓은 시야를 가져다준다. 시야가 넓어지면 사건이 발생한 원인을 한 번 더 바라볼 수도 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하였을 때 나쁜 사람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짓게 하고 실컷 욕하며 돌아서지 않는다. 그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경위, 지정학적 특성, 날씨, 경제 상황, 외부적 요인, 개인적 요인, 상황이 그것을 부추긴 것인지 혹은 하고자 하는 의지가 더 강하였는지, 이 갈등이 사회적으로 ‘유행하는’ 갈등인지 생소한 갈등인지 생각한다.

감정적으로 분노할 대상이 어딘지는 정확히 말할 수 있지만 옳고 그름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교육으로 해결할 건지,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는 문제인지, 개인이 책임져야 할 문제인지, 행정 구조를 바꿔야 할 문제인지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교육의 문제로만 보려 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잘못이 무지로부터 나왔다고 믿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쉬운 교육도 체벌과 처벌로만 생각한다. 시야가 좁으면 한 가지 문제 원인과 문제 해결밖에 보지 못하지만, 시야가 넓으면 다양한 원인 분석과 해결 방안을 제공할 수 있다. 문제 해결 능력과 창의력이 생겨난다.


4. 책 읽기가 즐거워졌다.


나는 왜 저런 책을 읽지 못하였지? 언제 저 책을 읽을 수 있는 실력을 쌓을 수 있을까. 나는 왜 저 책을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할까. 내 독서는 자책과 의무감으로 시작하였다. 지금 수준으로는 도저히 읽지 못하는 책도 있다. 과감히 덮어버리고 다른 책을 찾는다. 트레이닝하듯 읽었다. 3대 500을 치겠다는 각오로 자기 계발서와 멀어졌다.


다양한 관점을 얻으려면 다양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책을 편식하지 않기로 하였다. 책이 두꺼워도 쉬우면 금방 읽을 수 있고, 얇은 책이어도 어려우면 오래 걸린단 걸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몇 년이 지나자 나는 니체를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도덕의 계보>가 지금까지 도덕이 어떻게 전달되어 온 건지, 지금 도덕은 왜 기독교 도덕이 되어 온 건지를 니체가 해석한 이야기라는 걸 한참 뒤에야 알았다.


한 가지 알게 된 사실은 독서 실력은 하루아침에 생겨난다. 문해력은 점진적으로 비례 곡선을 그리는 게 아니라 단층적으로 올라간다. 계단식 성장으로 이전의 나와 오늘의 내가 하루아침에 달라지는 느낌을 받는다. 머리가 띵해지고 어지러운 느낌을 받는다. 언제 달라지지? 왜 이만큼밖에 안 바뀌지?라고 생각할 수 있다. 독서는 급진적으로 확 바뀌기 때문이다. 그전까지는 달라지는 게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세계관이 무너지는 건 짜릿한 고통이다.

헬스를 처음 끊을 때 온몸의 근육이 아프다가 운동을 계속하면 그 근육통이 그리워진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책을 읽고 여러 관점에 익숙해지다 보면 현기증이 나고 어지럼증이 드는 느낌이 그리워진다. 그런 느낌을 받게 되면 한층 더 성숙한 사고를 하게 된다. 지식 근육이 늘어난다.

어느 날 거울을 보니 근육이 붙고 살 빠진 자신을 마주하게 되는 거처럼 책 읽기도 의무감과 자책감으로 읽다 보면 어느새 성장한 자신을 보게 될 거다.

요즘은 흩어졌던 지식을 다시 주섬주섬 모으는 재미로 책을 읽고 있다. 세계관이 확장되는 느낌뿐만 아니라 지식의 섬이 다리로 연결되면서 하나의 대륙으로 변해가는 사실이 재미있다. 지식의 무성한 덤불숲을 없애고 체계적인 빌딩을 지어가는 모습이다. 도시를 만들고 아파트를 지으며 지식 정보가 하나둘씩 거주하는 게 느껴진다.


내가 오래전 지었던 아파트가 어느새 낡고 금 간 콘크리트 건물이 되었다. 새로운 아파트를 지어야 한다. 10년 전에 쌓아둔 지식은 쓸만한 지식이 되지 못한다.

나는 이 도시를, 내가 지은 세계를 다시 한번 더 무너뜨리고 싶다. 새로 짓고 싶다.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열심히 책을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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