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경_<푸르디푸른>을 읽고
1. 읽게 된 계기
도서관에 가서 신간코너를 보고 김연경 작가가 쓴 책이 눈에 띄었다.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를 번역한 러시아 문학 대가로 알려져 있다. 목차를 훑어보았다. 페테르부르크, 폰탄카 등 러시아와 관련된 단어가 눈에 띄었다. 본문도 훑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러시아였다. 한 번 빌려보기로 했다.
2. 노작가의 부활
프롤로그를 보는 순간 러시아 같은 문학작품에 웃음이 났다. 정체불명의 노작가가 죽음에서 부활하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부활한 기쁨도 잠시 투덜거리기 시작한다. 삭신이 쑤시고, 배가 고프고, 욕망이 생겨난다. 사는 걸 감사히 여기다가 돌아서면 고통이다. 손과 몸을 만지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다가 뱃속이 공허하단 걸 이내 깨닫는다. 배를 채우면 또 다른 욕망의 공허를 찾아 이리저리 방황할 게 분명하다. 이러한 점이 ‘러시아적인, 너무나도 러시아적인’ 소설이다.
본문도 죽음과 삶, 존재와 공허를 다룬다. 육신의 부활을 꿈꾼 노작가는 마침내 꿈을 이루었지만, 새로운 고통의 시작을 암시한다. 옆 무덤을 보니 시든 꽃만 놓인 자신의 무덤과는 대조적으로 보드카 등이 놓여 있는 옆 무덤을 ‘질투’한다.
3. 산 자가 죽은 자를 질투하다.
방금 살아난 자는 살아났다는 기쁨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 열등감을 느낀다. 산자가 죽은 자를 질투하는 아이러니함을 김연경 작가가 흥미롭게 지적하였다.
소설은 존재하지 않는 것도 묘사하며 무엇이 부재하였는지를 대신 보여주기도 한다. 텅 빈 공간이라고 말하지 않고, 마트료시카조차 없는 공간이라는 표현으로 없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보드카가 없는 자신의 무덤을 묘사하면서 보드카 있는 무덤을 질투하는 것을 보여준다.
기쁨조차도 순수한 기쁨이 아니다. 순수한 기쁨은 감사함과 만족감으로 우러나와야 하겠지만, 노 작가의 기쁨은 자신이 틀리지 않았단 걸 증명해 낸 기쁨이다. 부활이 없다고 떠들던 이들, 화장으로 육신이 사라진 이들을 비웃으며 내 신념이 옳았고 그들이 틀렸단 걸 기뻐하는 간악한 기쁨이다. 부활을 통해 얻은 교훈은 없다. 육체는 여전히 불편하고, 질투하고, 분노하고, 시샘하고, 산자는 죽은 자를 부러워한다. 죽은 자가 나보다 한 개라도 더 가졌기 때문이다.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이렇다는 걸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4. 아쉬운 점
이 소설의 아쉬움은 러시아 문학을 처음으로 접한 이들을 의식하였는지 인물이 가진 개성이나 말과 행동 등에서 러시아 캐릭터가 주는 입체적 느낌을 그대로 살렸음에도 불구하고 초보 독자를 의식한 듯 보드카나 마트료시카 등을 사용하여 러시아임을 재차 반복한다는 점에 있다.
5. 추천하는 이유
다른 관점에서 보면 러시아 소설에 관심 없는 독자층을 유입시키는 계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움이 어떻게 허둥지둥 소모되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