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설득이다

by 비평교실

언어는 설득이다.


언어를 잘한다는 건 설득을 잘한다는 뜻이다. 설득하기 위해서는 말을 잘하거나 글을 잘 써야 한다. 설득한다는 의미는 다양하다.


누군가를 감동 시키는 것, 논리적으로 압도하는 것, 동의를 얻어내는 것, 지지를 얻어내는 것, 비밀을 캐는 것, 속이거나 감추는 것, 심지어 현상을 파악해내고 유추하는 능력까지 모두 설득이다. 왜냐하면 설득은 내가 원하는 타인을 끌고오도록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끌고 오는 방식에는 고대 그리스 때부터 세 가지 방식이 있었다.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방법, 감동을 이끌어내 설득하는 방법, 인품을 드러내어 설득하는 방법이 있다. 이때 세 번째는 행동이 언어가 된다.


우리는 글을 잘 쓰고 싶다. 글로 누군가를 설득한다는 건 첫 번째나 두 번째가 될 것이다. 첫 번째는 비문학에서 쓰는 방법이고, 두 번째는 문학에서 쓰는 방법이 될 거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이 있을 거다.


한 가지를 매진하는 거도 방법이 될 수 있다. 이소룡은“나는 만 가지 발차기를 한 번씩 연습한 사람보다 한 가지 발차기를 만 번 연습한 사람이 무섭다.”라고 말하였다. 반복의 힘은 무섭다. 한 가지에 매진하는 사람은 필살기를 쓸 수 있다. 같은 방법으로 성공한 사람은 실패를 만나기 전까지 반복해서 성공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기도 한다. 새로움은 동일한 반복을 통해서 나온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다 보면 단련이 되고 경지에 이를 수 있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자.


하지만 반복은 어려운 일이다.


인간은 원래 반복을 꺼린다. 기존에 있던 정보는 의미 없는 정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새로운 정보에 기민하게 반응하도록 살아왔다. 움직이지 않는 나무와 돌은 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움직이는 풀숲이나 다가오는 맹수 혹은 스산하게 움직이는 무언가를 주시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반복하고 동일한 것은 새로운 정보를 주지 않는다. 지루함을 준다.


이 지루함은 때로 고독에 빠지게 만들기도 한다. 고독과 외로움은 사회성을 가진 인간에게 위험 신호를 준다. 무리와 떨어져 있으니 살고 싶으면 사회 속으로 들어가라는 세포의 신호다. 우리는 이 신호를 거부하고, 글쓰기에 매진해야 한다. 생존 본능을 거부하는 이유는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글쓰기가 더 나은 성장을 가져다주는 이유는 동물적 신호를 거부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일을 반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반복은 고통과 성장을 동시에 안겨준다. 반복은 고통이다. 운동을 통해 근육을 키우는 건 운동이 근육 섬유를 찢게 만들고 다시 회복하는 과정에서 근육이 커지기 때문이다. 반복 동작을 통해 의도적으로 신체에 스트레스를 주어 상처를 내고 휴식을 통해 회복하는 과정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고통을 피하고 쾌락을 선택하도록 되어 있다. 반복은 고통이고, 반복은 피해야 할 일이다. 반복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성장하려면 반복은 피할 수 없는 길이다. 성장하는데 고통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보다 성장하려면 반복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 이게 왜 고통스러울까보다 이 반복을 어떻게 참아야 하는가를 묻는 것도 문제를 재인식하는데 도움이 된다. 고통에서 의미를 찾기보다 반복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우리는 반복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반복의 기준은 객관적인 반복과 주관적인 반복으로 나눌 수 있다. 객관적인 반복은 형식적인 반복이다. 누가봐도 동일한 것, 누가 봐도 반복되는 것, 운율과 리듬이 일정한 것들이 객관적인 반복일 수 있다. 주관적인 반복은 내가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글을 반복한다는 건 똑같은 말을 연달아 쓴다는 게 아니라, 매일 같이 앉아서 쓴다는 거다. 매일 같이 앉아서 쓰더라도 내용이 달라 객관적인 반복은 아니지만, 앉아서 쓰는 걸 힘들어하기 때문에 주관적인 반복되는 거다. 다시 말하자면, 주관적인 반복에서 성장이 찾아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