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아줌마 일기 : 가출

2022. 8. 29. 10:43

by 가보리다

1.



계절이 바뀌었다.

추적추적 한두 방울씩 빗방울이 내리는데, 꿉꿉하고 불쾌하지가 않다..

오히려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쌍화차를 한잔 마시고 싶어졌다.



쌍화차 믹스와 뜨거운 물을 섞으면서 생각하니, 여기에 시나몬스틱 하나 꽂아 넣으면, 마치 뱅쇼처럼 폼 나 보일 거 같다. 마침 집 앞 롯데슈퍼에 시나몬스틱 파는 걸 며칠 전에 눈여겨봤다.



집이랑 슈퍼는 한 150미터 정도? 가깝다면 무지 가깝지만, 게으른 사람에게는 충분히 귀찮은 거리다.​


나는 아침식사 후 설거지는 대충 설거지통에 모아두고 나중에 하지.. 하고 미루기 일수지만, 교보문고향 방향제가 궁금하면, 버스 두 번 갈아타서라도 교보문고에 가서 그 방향제를 꼭 사고야 마는.. 그런 사람이다.


고교학점제와 교과목 세분화가 수시 학종과 교과전형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지 궁금하면, 하루 종일 유튜브를 찾던지, 책을 뒤져서라도 호기심을 꼭 충족시켜야하는..


예전에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 상담소에 가비가 나와서 상담받을 때, 성인 ADHD에 대하여 이렇게 묘사했다.


'저녁에 집에 와서 아.. 화장 지우기 귀찮다.. 이대로 자야지.. 하고 침대에 뻗어 있다가 옆에서 누가 치맥 한잔 콜? 이러면 벌떡 일어나서 치킨 사러 가는 사람'


딱 나다.


과잉행동 충동조절 장애..


다행히 이제 나이가 먹어서 과잉행동을 할 에너지도 없고, 내향적인 성격탓에 대인관계에서 충동적으로 행동한 적도 없긴 하지만, 내가 성인 ADHD가 아닐까 종종 의심한다..



엊저녁에도 야밤에 둘째녀석과 실강이를 하다가 충동적으로 나는 집을 나가버렸다



2.



둘째는 요즘 애들이 다 그러하듯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건 뭐, 다 큰 어른인 나도 그러니까, 딱히 할 말이 없지만, 문제는 그 휴대폰으로 게임과 유튜브를 보느라 학원 숙제를 늘 미뤄서 종종 fail을 받아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 나는 둘째와 약속(이라고 하지만 부모의 권위로 던지는 협박)을 했다.


영어학원 숙제검사에서 하나라도 fail 받는 것이 있으면 휴대폰을 압수하기로.


몇일 all pass를 받으며 숙제는 해 가네? 했었는데..


글쎄, 어제 딱 writing 숙제 미흡 fail이 떴다. 나머지 단어 문법 디베이트 다 pass를 받긴 했다.




살짝 망설였다.

둘째가 진저리 치게 싫어하는 데일리 단어 테스트를 패스했으니, 그래도 좀 봐 줄까?


둘째아이는, 내가 고민하고 있다는 걸 귀신같이 눈치채서 버티기 시작했다.


억울해! 단어랑 그래머랑 다 통과했잖아! 고작 writing 숙제 하나 까먹었다고 휴대폰을 뺏는 건 너무하잖아!​




헐.. 여기서 제 스위치가 탁 켜졌다.



뭐! 숙제하나 까먹었다고?

너 엄마가 아까 학원 가기 전에 오늘까지 writing 숙제 있다고 분명히 까먹지 말라고 말했어? 안 했어?

너 그때 알고 있다고 하지 않았니?

이게 까먹은 거니?

일부러 안 한 거 아냐?



급기야 둘째는 엄마는 내 영어에 신경 꺼! 엄마가 무슨 상관이야!를 라며 무논리 땡깡으로 넘어갔고,
나는, '얼른 빨리 이 아이와 멀리 떨어져야겠다. 내가 너랑 무슨 말싸움을 할 수 있겠니.. ' 라는 생각으로
'이 시간에 널 내쫓을 수는 없으니 내가 나가마..'하고 아이에게 veto를 표하고 진짜 집을 나가버려렸다.






그리하여 밤 11시에 집을 나가 정처없이 쏘다니는 가출아줌마가 되었다.
진짜, 집을 뛰쳐나가 어디 외딴 나만의 동굴에서 혼자 화를 식히고 싶었다.


차 키라도 들고 나왔다면 올림픽대로라도 달렸을 텐데, 애랑 싸우다가 피하듯이 뛰쳐나오는 바람에 손에 든 것은 휴대폰 하나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드문드문 사람들이 오가는 반포 대로 큰길을 서성거리다가 사랑의 교회 앞 벤치에 앉아 우두커니 신세한탄만 했다.


나는 하루 종일 가족을 위해 봉사하는 데, 왜 나를 위해 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은 없을까..


하느님의 계시 대신에, 모기들이, 빨리 집에 돌아가라고 종아리를 연신 물어 댔다.


12시를 넘겨 집에 돌아왔을 때, 둘째는 빼앗긴 휴대폰 말고 컴퓨터 게임 삼매경에 빠져있다.


그 모습 역시 정말 꼴 보기 싫었는데.. 끝까지 제 몫의 스테이지를 깨고 나서야 자러 갔다.​


엄마의 감정을 끝까지 몰아가고서도, 태연히 지 놀 거 다 노는 애의 모습에,

다시 한번 분노조절이 힘들어졌는데,
이젠 이것이 아이의 문제인지 나의 문제인지 이제 모호해진다.




가출할까?

그래서 애가 달라질까?



어휴.. 누구의 문제이든,
이 엄마가 할 수 있는 건 내 맘을 다스리는 것 밖에 없다..


3.



사람의 인생이 나무라면,
나는 이미 열매를 두 개나 맺은,
늦은 가을철에 잎사귀가 노릇노릇해지며 더 이상은 열매를 맺지 않는, 늙은 사과나무겠지.


사과들이 내 가지에서 떨어지고,
잎사귀도 떨어지고 나면,
앞으로 남을 긴 노년의 겨울을 홀로 버틸것이다.


내가 떨어뜨린 잎사귀들은
나의 열매들이 건강히 자랄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고,
그 열매는 또 하나의 나무로 무럭무럭 자랄 것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이
아이들의 문제인지,
내 문제인지 모호하다.

그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마음에서 이미 다 써버린 감정들을 청소하고, 새로운 감정으로 에너지를 채워 넣을 뿐.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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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가보리입니다.'라는 의미의 가보리다에서 어디든 가 보는 사람이 된 블로거 가보리다의 일기: '재미없음'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흔치않은 50대 아줌마 대문자P의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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