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8. 29. 11:02
새벽인데, 잠이 안 온다.
사실은 초저녁에 몰아치던 졸음이, 둘째와 크게 싸운 후에 홀딱 깼다.
안방 베란다에 나만의 보금자리를 마련하니까, tv도 덜 보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잔소리도 줄었다.
나름 아이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두고 평화로운 공생을 하려고 노력했다.
오늘 싸움의 발단은
이곳에 이사 올 때, 방을 배분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집에서 나의 공간은 없었다.
모든 곳이 나의 공간이었지만, 그 어느 곳도 나만의 점유자는 아니었다. 베란다에 사무실을 만들기 전까지, 나는 부엌 식탁 앞 의자에서나, 거실 Tv 앞 소파에서 대부분의 일과를 보냈다.
그 자리에서는 가족들의 동선을 환히 꿰뚫어 볼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하게 되었다.
나는 아이들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었고, 그 해답을 내 안에서 찾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베란다에 나만의 동굴을 만들고 사무실이라 불렀다.
오늘도 '사무실'과 부엌을 오가며 나름 바쁘게 살았다.
이사 오고 난 후, 나는 잠도 거실에 매트를 깔고 혼자 잤다.
불쑥 불쑥 찾아오는 새벽의 열감과, 예민해진 잠귀 때문에 남편과 한 방에 지내는 것이 많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이사 올 때, 우리 부부가 쓰던 큰 부부 침대는 아이들의 침실에 주고, 부부 침실에는 싱글 퀸 사이즈의 침대 두 개를 따로 배치했다. 그리고 남편의 코 고는 소리도 괴로울 때엔 이어 플러그로 귀를 막고 자기도 했다. 하지만 새벽에 이유도 없이 온몸에 열이 확 뻗칠 때는, 이어 플러그도, 싱글 침대도 다 거추장스러웠고, 요도 없는 맨 마룻바닥의 차가운 냉기에 내 화를 식히며 잠을 청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내 잠자리는 거실 마룻바닥이 되었고, 애써 마련한 부부 침실의 내 싱글 침대는, 한동안 공석이었다가, 요즘은 큰아이가 차지하고 있다.
우리 집 방 4 개는, 두 아이들의 공부방이 하나씩 두 개, 아이들의 침실 하나, 그리고 내가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부부 침실로 만들었다.
처음에 그렇게 방 배분을 한 까닭은 큰아이를 배려하는 차원이었다.
공부하는 책상과 침대가 따로 있기를 원했는데, 마치 집안에 스터디 카페를 옮겨둔 것 같이 느끼고 싶어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하나씩 배분하고 방이 하나 남았을 때, 사이좋은 자매들끼리 좋은 우애 나누라고 아이들의 침실로 흔쾌히 결정했다.
한동안은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런데, 첫째가 친구들과 노는 시간이 더 잦아지고, 스터디 카페나 공부방에서 혼자 휴대폰을 보는 시간도 늘어나다가,
밤늦게 자러 아이들의 침실에 들어가면, 먼저 잠을 청하고 있던 둘째가 어김없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매일 내 자리가 더 좁네, 네 다리 때문에 불편하네 하는 싸움을 주고받더니, 큰애는 부부 침실에 비어있는 내 싱글 침대로 잠자리를 옮겨버렸다. (부부 침실이지만 두 개의 침대가 협탁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침대 쟁탈전에서 승리하고 난 후, 둘째는 그 큰 슈퍼 킹사이즈 침대에서 혼자 편하게 잤다. 아이들의 공용 침실의 공간은 어느새 둘째의 전용 침실이 되어버렸다.
지난여름 내내 서열 4위 막내가 집안의 노른자위 방 2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이제 잠도 따로따로 자고 싶어 하니, 너네들 방에 각각 침대를 넣어주겠다. 이제 각자 자유롭게 자라.
라고 여러 번 권유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제는 더 이상 안 싸우며 사이좋게 지낼 테니 제발 침대 분리를 하지 말라달라고 사정했다.
게다가 남편조차, 자매끼리 사이좋게 함께 자는 모습을 흐뭇 해해서, 내 의견은 힘을 갖지 못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자기 방에 침대를 넣는 것을 거부했던 큰애의 속셈과 둘째의 속셈은 각각 달랐던 것 같다.
큰애는 여전히 공부방과 침실을 분리하고 싶어 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자기 방에서 보내다가, 딱 잠만 자러 나왔다. 둘째와 다툼이 있지만, 안방의 싱글 침대도 나쁘지 않았기에, 이런 구분된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었었다.
둘째는 명목상 자매 침실이나, 언니를 내쫓고 얻은 두 번째 방 소유권을 잃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중간중간 경고할 때마다, 언니와 사이좋게 지내겠다고 공수표만 날리면 이 넓은 침대방도 오롯이 혼자 쓸 수 있었다.
'사무실'을 만들어 내가 자리를 비키고 나니, 거실에 남편과 아이들이 더 편하게 자주 모였다. 그동안 잔뜩 예민한 엄마가 거실을 차지하고 있어서, 남편도 애들도 내 눈치를 많이 봤다.
그래서, 거실을 가족들에게 돌려줬다. 나는 '사무실'에서 독서나 글을 썼고, 잠도 식구들이 모두 잠이 든 뒤에, 남는 자리를 찾아서 잤다. 최근에는 둘째가 차지하고 있는 큰 더블 킹사이즈 침대 한쪽에서 같이 잤는데, 잠귀 어두운 둘째는 눈치 못 챘나 보다. 하긴, 항상 애 보다 늦게 자고, 일찍 일어났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좀 피곤했다. 빨리 자고 싶었다. 큰딸과 남편은 거실에서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 중이었고, 둘째는 `자기`침실에 들어가서 방문을 닫고 있었다.
별생각 없이 아이들 침대 한구석에 털썩 몸을 뉘었는데... 둘째가 득달같이 화를 냈다.
요즘 들어 왜 갑자기 이 방에 와서 자? 나 좁단 말이야! 딴 데 가서 자!
이 방 이 침대가 2인용인데, 너 혼자 자겠다는 건 이기적인 거 아니니?
엄만 마루에서 침대 없이도 잘 잤잖아. 이제 와서 갑자기 왜 그래? 나 혼자 자고 싶어.
그래. 말 나온 김에 내일 당장 네 방에 침대 넣어줄게. 이제 거기서 혼자 자.
굳이 왜? 나는 이 침대가 좋단 말이야. 언니랑 안 싸울 테니까 내방에 침대 넣지 마. 침대 넣으면 그 방도 좁아져서 싫어.
그렇다면 이 침대에 다른 사람이 같이 자는 걸 받아들여야 해. 이 침대는 2인용이고, 너 혼자 다 쓰는 것은 이기적인 거야. 그리고 니가 이방에서 혼자 자면, 이 집에 방이 4 개인데, 그중 2개를 네가 쓰는 거야. 여기에 엄마방은 없는 데, 너만 방을 두 개 쓰는 게 말이되니?
아이 참! 여기 나 혼자 자고 싶다고. 그냥 좀 나 혼자 자면 안 돼? 그리고 엄마. 그 '사무실'있잖아. 엄마도 엄마 꺼 있잖아. 이제 와서 왜 내방을 탐내?
빠직!
이제 와서 왜 내방을 탐내냐는 대목에서, 나는 이성을 잃었다.
나는 어미로서 아이들을 배려하고, 내 불편함을 참으며 살았는데, 이 아이는 그저 엄마란 당연히 참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제 와서 왜!라고 한다.
화가 나고 어이없는 것을 넘어서 창피했다. 집안의 성실한 시종 역할이나 제대로 하라고 한방 맞은 듯했다. '사무실'을 만들며 애써 그려왔던 내 자아상이 무너졌다. 이 아이 앞에서 난 그저 조금 시끄러운 몸종일 뿐이었나보다. 그러니 어서 나를 귀찮게 말고, 네 '사무실'로 꺼지라고 말하고 있다.
너무너무 화가 났다. 거실에서 tv 시청 중인 남편과 큰딸에게도 화가 났다. 내가 막내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는데도 아무런 동요도 않는 그들 역시 한통속 같다.
이 집을 뛰쳐나가 또 한 번 가출해 볼까 했지만, 이번에 그렇게 넘어가선 안될 문제이다. 그땐 내 마음의 문제였다면, 이번엔 내 권리의 문제이기 때문에.
침대 위에 있던 이불을 싹 다 거실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아이가 들고 있던 휴대폰도 뺏어서 거실에 던졌다.
잘 들어.
이제부터 이 방은 엄마방이야. 우리 가족은 4명인데, 너만 방을 2개 쓸 수 없어.
이방을 너랑 언니의 침실로 만들어 준 건 엄마가 너희들을 사랑해서 한 배려였어. 그땐 이 방이 너와 언니가 사이좋게 우애를 나누는 공용공간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니야. 엄마도 엄마의 공간이 필요해. 그러니까 이방은 이제 엄마방이야.
내일 너 학교 가고 없을 때, 이 방에 있는 네 짐들은 싹 정리해서 네 방으로 옮길 거야. 과자봉지 하나 쓰레기통에 안 버리는 니가, 입던 속옷조차 세탁실에 안 가져다 놓는 니가, 가족들 청소할 때 항상 뺀질 거리는 니가, 무슨 권리로 방을 두 개나 차지하려고 하니? 니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던 건, 엄마가 너를 사랑해서 했던 배려였지, 너의 당연한 권리가 아냐.
니가 이 침대에서 자고 싶다면 자게 해줄께. 대신
'이 방은 엄마방이지만, 잘 때는 나도 같이 자게해 주셔요. 잘못했어요.'라고 사과해!
둘째 아이는 아등바등 말꼬리를 잡았다.
언니랑 사이좋게 쓰는 공용공간이라면. 그냥 그렇게 공용공간으로 두면 되잖아.
라고 반박했지만, 나는 들어주지 않았다. 이 침대에서 자고 싶다면, 이제 이 방이 엄마방이라는 걸 인정하라고 반복했다.
멀리서 듣고만 있던 남편이, 이제서야 거들었다.
엄마방이 필요한 건 맞는 거 같아. 방이 4 개니, 하나씩 나눠야지.
중립으로 자신을 옹호하고 있다 믿었던 아빠가 엄마 편을 들자, 둘째 아이는 울먹이며 폭발했다.
이럴 거면 자식을 왜 키우는 거야? 그냥 길거리에 버려버리지!
그리고 울면서 겉옷을 챙겨 잆더니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갑자기 이놈이 이 시간에 가출을 하나? 뜨끔 겁이 났다.
어딜 가! 가출하려고?
무슨 가출이야! 나도 바람 좀 쐬고 오려고!
그리고 밤 11시 30분,
이번에는 둘째가 자신의 분을 삭이러 현관을 나서는 소리를 들었다.
둘째 아이는 다행히 금방 집에 돌아왔다.
거실에 꺼내놓은 이불을 대충 깔고, 마루에서 혼자 자고 있다.
나는 이 방을 쟁취했다.
이제 날이 밝으면 `사무실`에 있던 책상과 책들을 이 방 베란다 쪽으로 옮길 것이다.
이 방 침대는 그대로 있을 것이고, 둘째 아이가 와서 자고 싶어 하면, 언제든지 환영이다.
횡한 거실 한복판에 요도 제대로 깔지 않고
둘째아이가 몸을 웅크리고 자고 있다.
엄마 닮아 고집스러운 아이.
엄마에게 바득 바득 대들긴 했지만, 이 집에 엄마방이 없기에 방을 내어줘야 한다는 걸 본인도 알고 있으리라.
오가는 사람 없는 쌀쌀한 거리에서 둘째아이도 모기에 뜯겼으리라.
그리고 집에 가서 포근한 이불 덥고 잠을 자고 싶은 피곤이 몰려 왔으리라.
일기를 다 썼는데도 쉬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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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가보리입니다.'라는 의미의 가보리다에서 어디든 가 보는 사람이 된 블로거 가보리다의 일기: '재미없음'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흔치않은 50대 아줌마 대문자P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