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1. 7. 10:10
흑거미클럽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6명의 중년 아저씨들 (특허 변호사, 암호 전문가, 작가, 유기화학자, 화가, 수학자)이 매주 아지트에 모여 고민이 있는 게스트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내용이지요.
아이작 아시모프의 추리소설인데, 애거사 크리스티의 미스 마플과 많이 흡사한 인물이 나옵니다.
집사 ‘헨리’입니다.
바텐더 겸 아지트의 집사인 헨리는 매우 정직하고 충실하며,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진중한 사람입니다.
사실상 주인공으로, 흑거미클럽이 고민하는 문제들도 늘 집사 헨리의 일침으로 마무리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는 SF 소설가로 유명합니다. 장편 소설 파운데이션과, 로봇 시리즈의 저자이며, 영화 바이센테니얼맨의 원작자이지요. 컬럼비아대학과 보스턴 대학에서 화학 박사를 딴 그는, 화학, 물리, 생물학을 넘어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지식을 토대로 다양한 매체에 그의 지식을 전달했던 그 시대의 과학 커뮤니케이터였기도 합니다.
아이작 아시모프 소설의 매력은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말장난식 유머를 바탕으로 하는 점입니다. (저는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합니다. 특히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는 저의 최애 소설입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유명한 단편 SF 소설로는 ‘최후의 질문’이 있지만, 저는 ‘원래는’이라는 단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짧지만, 그의 글의 매력을 충분히 보여줍니다.
동생은 할 수 있는 가장 엄숙한 목소리로 여러 부족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기대하고 있는 예언을 시작했다.
[태초에]
그는 말을 시작했다.
[정확히 152억 년 전 빅뱅이 있었고 우주가..]
그러나 나는 받아쓰기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150억 년 전이라고?]
내 목소리는 불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난 계시를 받았어.]
그는 대답했다.
[네가 받는 계시를 못 믿는 건 아냐.]
나는 말했다. [물론 믿어야지.]
내 동생은 나보다 세 살이 어리지만
그가 받는 계시에 의문을 품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또 지옥에 떨어질 각오가 된 사람이 아니라면 감히 의문을 품을 생각도
못할 것이다.
[그래도 설마 750억 년에 걸친 창조의 역사를 구술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해야만 해]
동생은 말했다.
[그게 우주가 창조된 역사니까. 모든 우주의 역사는 최고의 권의를 가진 바로 이곳에 다 기록되어 있다고.]
하며 그는 자신의 이마를 톡톡 두드렸다.
나는 철필을 내려놓으며 투덜댔다.
[너 요즘 파피루스 값이 얼마나 하는지 알기나 해?]
[뭐라고?]
[너는 신성한 계시를 받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때때로 그러한
계시가 파피루스의 가격 같은 추잡한 세상사는 고려하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단 말이야]
나는 말을 계속했다.
[네가 파피루스 한 두루마기마다 1백만 년에 걸친 역사를 구술한다
고 생각 해 보자. 그러려면 파피루스 두루마기가 1만 5천 개나 필요해. 파피루스 7만 5천 개를 쓸 정도로 말을 많이 하면 얼마 안 가서
넌 목이 완전히 쉴 거야. 그리고 그 많은 양을 받아쓰고 나면 내 손가락은 떨어져 나가고 없겠지. 좋아. 우리가 그 많은 파피루스를 구입할 능력이 있고 또 네 목은 쉬지 않고 내 손가락도 멀쩡하다고 생각 해보자고. 도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그 많은 양을 다시 베끼려고 들겠니?
우리가 책을 냈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사본이 적어도 백 개는 있어야 할 텐데. 사본을 못 만들면 인세는 어떻게 받니?]
동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양을 좀 줄여야 한다고 생각 해?]
그가 물었다.
[물론이지. 사람들에게 읽히려면 그 수밖에 없어.]
[백 년 정도로 줄이면 어떨까?]
[엿새면 어때?]
나의 제안에 그는 겁에 질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창조의 역사를 겨우 엿새에 구겨 넣을 순 없어]
[하지만 내가 가진 파피루스는 그 정도가 다야. 어떻게 할래?]
[좋아]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한 그는 다시 구술을 시작했다.
[태초에.... 창조에는 엿새가 결렸다. 자, 이렇게 하자는 거지, 아론?]
나는 엄숙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모세]
아이작 아시모프, 단편 '원래는'
흑거미클럽에도 이런 식의 ‘재미’가 있습니다. 말장난을 좋아하는 아이작 아시모프는 종종 간단한 단어로 트릭을 심어놓거든요.
흑거미클럽의 단편 ‘Truth to Tell’에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늘 사실만 말하는 사나이가 등장하는데, 그는 흑거미클럽 6인방에게 자신이 금고에서 돈을 횡령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는 수수께기를 가지고 옵니다.
자신은 결코 현금 또는 유가증권을 훔치지 않았음을 말하여, 진실만을 말하는 사나이의 미스테리가 시작되지요.
추후 모든 가능성을 질문해보지만, 금고의 현금과 유가증권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진실만을 이야기하는 그 사람이라는 것만 드러날 뿐입니다.
수학자, 암호해독가, 등의 나름 지적 추리력을 가진 흑거미클럽회원들은 이 정직한 게스트의 누명을 풀어주려고 온 갖 가능성들을 다 제시하면서 아이작 아시모프의 현학적인 말장난들이 쌓여갑니다.
그런데 그 말장난의 키포인트는 늘 마지막, 집사 헨리의 몫입니다.
집사 헨리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사나이에게
“당신은 현금 또는 유가증권을 훔치지 않았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현금 및 유가증권을 훔치셨습니까?”라고 묻자,
이 사나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총총 사라져버거든요.
이야기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을 맺습니다. ㅎㅎ
이런 식의 말장난을 좋아하는 나의 취향은, 내가 전업주부가 되어 가족의 집사가 되자, 우리 가족의 색깔이 되었습니다.
아마 남편이 나처럼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남자여서 가능했던 것 듯 합니다.
우리 가족은,
말장난으로 시작해서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다가, 다양한 흥미로운 주제들로 대화가 번져가는 편입니다.
예를 들어 둘째 예똥이가
‘이번 시험 개 어려웠단 말이야’라고 한다면
옆에서 듣고 있던 아빠가
‘ 소 어렵진 않았고?’라고 맞장구쳐주고, 그럼 10시 10분의 큰딸이
'앗 소 오름!’ 하고 어이없음을 표현하면, 둘째 딸이 다시 ‘소 육름!’하고 말장난을 이어가는 식이죠.
서로 말꼬리를 붙잡으려고 언제나 호시탐탐 노리다보니. 어떨 때는 끝말잇기로 이어지기도 하며, 어떨 때는 예상치 못한 흥미로운 대화 주제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그런 흥미로운 대화 주제 중의 하나를 예를 들자면, ‘무한한 것이란 있는가.’라는 주제로 주말 아침에 아빠와 딸이 깊은 설전을 벌인 일이 있습니다.
브런치 노자 철학자 누룽지조아님은 ‘무한한 것과 0은 결국 같다.’라는 주장을 펼쳤지요.
이 아저씨 철학의 기본은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서, 무한대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인데, 이게 가능하려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이 붙어있어야 한다는 말을 종종 했거든요..
그런데, 큰딸이 고등수학을 배우고, 나름 잘하게 되면서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수학적으로 무한대와 0은 엄연히 달라. 아빠가 말하는 무한대는 시작과 끝이 붙어있는 정지 상태인데,
무한대라는 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끝없이 발산한다’라는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고. 어느 한순간, 이것이 무한대야!라고 단면을 잘라 볼 수 없는 거라고. 그에 반해서 0은 정지 어느 한 지점이거든? 그 둘은 수학적으로 같지 않아.”
이런 이야기에 그다지 큰 흥미를 보이지 않던 둘째가 어인 일로 한마디 건넸어요. “그런데 파이 3.14도 무한소수인데? 그 끝을 알 수 없잖아?”
큰아이는 거침이 없었습니다.
“ 엄밀하게 말하면 파이는 무한대라고 말할 수 없어. 우리가 딱 어느 숫자라고 규정을 할 수 없을 뿐이지 파이는 자연수 3과 4 사이에 존재하는 어느 단면이야.
무한대란 양 끝으로 계속 나아가고 있어야 해.”
위 이야기의 결론이 어떻게 났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하지만 남편 누릉지조아씨가 큰딸의 커져버린 사고력에 깜짝 놀랐던 것은 기억이 납니다.
이 글을 통해, 우리 가족이 성적이나 방 청소 같은 고정된 주제가 아니라 다양한 이야깃거리들을 나누는 좀 독특한 가족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젠 두 딸이 고3과 중3이기도 하거니와, 아이들과 보내는 절대 시간이 부족해져서, 이런 대화들을 자주 나누진 못하는 것도 사실이구요.
좀 서운합니다. 시무룩..
그래서 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며칠 전, 55개의 주제들을 적을 때,
모두 다 그냥 충동적으로 떠오르는 의식의 흐름 따라 일단 써 재껴 버렸지요. 확신의 P처럼.
그랬더니 지금은, 그 55개의 제목들이, 밀려 쌓여있는 숙제들처럼, 저를 막막하게 하게 합니다...만,
나름의 해결책으로 하루 하루 견디고 있습니다.
하루 전날 ‘다음날 10시 10분에 올릴 글’에 대하여 생각을 정리하고 적어서, 밤 11시경까지 초안을 씁니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에 리부트 된 뇌로 퇴고를 한 뒤, 일단 임시저장을 하죠.
이 저장된 글을 오전 7시 30분쯤, 큰딸을 깨우며 아침 인사를 나눌 때 보여줍니다.
큰딸은 제 글쓰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감수자이자,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기꺼이 나의 글을 읽어주며, 나의 글을 좋아해 주거든요.
(그런 그녀가 아직까진 잘하고 있다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엄마의 글을 읽으면, 잠에서 깰 수 있어. 재미있거든. 아침에 엄마 글을 읽는 거 좋은 거 같아!"
저는 그래서 매일 글을 씁니다.
나의 1호 독자
큰딸을 위해.
흑거미클럽은 친정집에 있어서 새로 샀고, 다른 두 책은 30년쯤 되었나? 헉,.1991년 도판이네.
But 감동파괴 모먼트
평범한 잔소리쟁이 가보리다.
요즘 둘째 딸과 신경전 중입니다.
방학을 맞아 수학 특강을 신청했으며, 월요일부터 새로운 영어학원에 등록했지요.
새로운 영어학원 선생님은 매우 깐깐하고 꼼꼼한 것이 ‘오호! 뺀질이 요놈 고생 좀 하겠다’ 싶습니다.
안 그래도 뒤처진 수학과 영어 실력을 따라가려면, 남은 시간에 공부를 해도 모자랄 판인데,
이놈이 요즘 계속 ‘새로운 태블릿을 사 달라. 일러스트를 제대로 배우고 싶으니 일러스트레이트 학원 보내달라, 휴대폰 바꿔달라’며 요구만 하고 있습니다.
아니, 어렵다면서 하라는 수학 공부는 안 하고, 매일 그림만 그리는 것도 못마땅한데, 거기에 일러리스트 학원까지 다니면 언제 공부를 하려나 싶어, 계속 무시 중이었는데, 이놈도 끈질기기가 만만치 않아 요즘 계속 냉전중이었거든요.
결국, 영어 수학 숙제를 절대 밀리지 않고 단원 테스트를 늘 통과하는 조건으로 일러스트 학원 수강료를 내주고 말았습니다.
뭐,한 달간 지켜보고, 그림 때문에 다른 학과목에 지장이 생길 경우 용돈을 차감하기로 했지만, 사실 그리 탐탁지 않긴 합니다.
어휴…. 흑거미클럽의 헨리는 말 한마디로 그 기 센 아저씨들을 확 휘어잡았는데..
가보리다클럽의 집사 가보리다는
늘
집니다.
어쩔 수 없나봅니다.
전 그냥.. 엄마라서. ..요.
1월 6일 날씨도 흐리고 모든 것이 흐리고...
P.S.
어제 남겨주신 큰딸에 대한 많은 칭찬댓글들, 본인에게 꼭 보여주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안읽겠답니다!
아니, 왜?
왜인진 몰라도 누군가 자신에게 과도한 칭찬을 하는 글은 읽기 힘들어서, 마음의 준비가 될 때 시도한다는 군요.
그래서 생기부에 적힌 무수한 선생님들의 칭찬들도 아직까지 제대로 읽지 못하고 '실눈뜨고 대충'읽는다고 합니다.
허허..
큰딸 제가 낳았지만, 알면 알수록 더 알아야할 것들이 생깁니다.
이 아이는 쑥스러운 감정을 다루는 것에 아직 익숙치 않은가..추측 중입니다.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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