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9. 7. 12:46
도덕경 주니어와 가보리다 주니어가 싸운다.
도덕경 주니어는 아빠 닮은 큰 딸이다.
가보리다 주니어는 나를 닮은 둘째 딸이다.
도덕경씨는 회계사 답지 않게 노자 사상에 심취하여, 도덕경으로 해석한 리더십에 대한 책도 출간했다. (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모든 것은 나의 마음속에 달려있으니,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나를 남처럼 사랑하자. 지극히 많은 것은 지극히 없는 것과 같다.. 등등..)
도덕경 주니어가 수학학원을 다녀와서 말했다.
(도덕경 주니어)
엄마.. 나는 나중에 사회 쪽으로는 진로를 선택하지 말아야겠어. 오늘 사회 시간에, 우리나라 지형이 동고서저라고 배웠거든? 아니 그런데 동쪽이 오른쪽이라는 거야. 나는 그게 한참 헷갈렸다니깐.
딴짓하면서 듣고 있던 가보리다 주니어가 놀렸다.
(가보리다 주니어)
멍충이. 그걸 몰라?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시간에 배우는 건데. 역시 내가 언니보다 똑똑해.
(도덕경 주니어)
아니, 니가 왜 나보다 똑똑해? 그땐 몰랐지만, 지금은 아는데? 그리고 너보다 다른 지식들은 더 많은데?
(가보리다 주니어)
당연히 내가 더 똑똑하지. 16살짜리가 이제야 아는 것을, 나는 10살 때 이미 알았으니까.
(도덕경 주니어)
그건 딱히 이해력이 필요한 게 아니라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서 똑똑함이랑 상관없는 건데? 그리고, 지금 현재는 나도 알고 있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니가 나보다 더 알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 그런데 니가 어떻게 나보다 더 똑똑해?
(가보리다 주니어)
같은 10살 때로 비교하자고. 나는 10살 때 오른쪽 왼쪽 동서남북 좌회전 우회전 다 알았는데, 언니는 16살 되어서야 알았다면, 당연히 10살에 깨달은 애가 더 똑똑한 거 아냐? 언니는 10살 때 몰랐었지나.
(도덕경 주니어)
그렇지만, 지금은 알잖아. 만일 어떤 천재가 있어. 15살까지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가 16살이 되어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을 다 깨달았다면, 그 사람은 멍청한 거야?
(가보리다 주니어)
그런 경우가 어디 흔해? 보통 10살 때 알아야 할 지식을 16살 때 돼서야 깨달은 거면 그 사람을 멍청하다고 하는 거야 멍충아.
(도덕경 주니어)
아니 도대체 이해가 안가네. 지금은 안다고. 그것 말고도 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그런데 내가 왜 멍청이야? 엄마! 엄마 생각은 어때?
도덕경 주니어는 방향치이다.
잠실 아파트 단지에서 10년을 살았는데, 매번 친구네 집을 못 찾아갔다.
초등학교 사회 시험공부시키면서, 동서남북을 알려줄 때에도, 굉장히 힘들어했다.
지금도 길을 찾아오라는 약속을 하면, 한 번에 제대로 찾아가는 일이 없다. (지하철 반대 방향으로 타서 '엄마 여기 좀 이상해~'라고 전화 거는 일이 부지기수다. )
도덕경 주니어가 내려야 할 버스 정거장을 놓쳐서 종점까지 가거나, 고속버스터미널역 대신에 남부터미널역에 내려서 헤맬 때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쩜 저렇게 공감각이 둔할 수 있지?
(나)
만일 5살짜리 아이가 대학교 4학년 과정을 이해하고 알고 있다면 똑똑하다고 하지 않니? 마찬가지로 같은 정보를 10살짜리와 16살짜리가 동시에 알았다면, 10살짜리가 똑똑한 거지.
엄마가 자기 편이 아니라고 생각한 도덕경 주니어가 아빠를 끌어들였다.
(도덕경 주니어)
아빠! 아니 대체 이해가 안 되는 게, 나는 이제는 동서남북 다 알고 있다고. 그리고 다른 것들도 훨씬 많이 알고 있다고. 그런데 왜 10살 때 몰랐다고 멍청한 거가 돼?
(가보리다 주니어)
당연하지. 내 기준 13살로 보자고. 나는 동서남북을 이미 10살 때 알고 있었어. 언니는 16살이 되어서야 알았지. 언니 13살 때는 몰랐잖아. 그렇다면 당연히 내가 더 똑똑한 거 아냐?
(도덕경씨)
음.. 지금은 16살짜리도 알고 있다며.. 그럼 멍청하다고 볼 수 없지.
(가보리다 주니어)
그럼, 5살짜리 영재가 대학교 4학년 과정을 이해한다면, 그건 똑똑한게 아니야?
(도덕경씨)
5살짜리가 다른 5살짜리들보다는 똑똑할 수 있지. 그렇지만 현재 대학교 4학년보다 똑똑하다고 볼 수는 없지.
(가보리다와 가보리다 주니어)
아니지. 5살짜리가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는 현재 대학교 4학년생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지닐 텐데, 그렇다면 현재 대학교 4학년보다도 똑똑할 수 있지.
뇌에서 문제를 이해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5살 때 이미 대학교 4학년 수준을 지녔으니까.
컴퓨터랑 비교해 봐. 4세대 프로세서 CPU가 1초 만에 해결한 일을, 286 컴퓨터가 한 시간 걸려서 결국 다 해내면, 그래도 결과값이 같으니 286이랑 4세대 cpu랑 똑같다는 거야?
(도덕경씨)
5살짜리 영재가 대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꼭 더 발전되어 있으란 보장은 없어. 지금 현 상태를 봐야지. 5살짜리 꼬마는 5살짜리 꼬마랑 비교했을 때 똑똑한 거고, 대학교 4학년보다 더 똑똑한 것은 아냐. 마찬가지로 13살 가보리다 주니어가 10살 때 먼저 알았다고 해서, 16살 도덕경 주니어보다 더 똑똑하다고 볼 수는 없어.
아아앙! 말이 안 통해...
결국 가보리다 주니어와 나는,, 네 네.. 당신 팔뚝이 더 굵습니다.. 하고 중도 포기하고 말았다.
그렇게 가보리다 파와 도덕경 파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말을 냈다.
이 대화는 왜 패러독스가 됐을까?
아침의 서리풀공원
파란 아침 하늘을 보며 산책을 하다 보니, 도덕경씨 의견에도 납득이 갔다.
5살 아이의 지식은 대학교 4학년과 비교했을 때 더 똑똑하다고 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왜 이게 말도 안 되는 궤변이라고 생각하는가?
서리풀 공원을 거의 다 돌면서, 이 주제 대한 포스팅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알게 되었다.
남편과 나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똑똑함'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보리다 주니어와 내가 말하는 '똑똑함'은 '성능'이다. 얼마나 빠른 시간에 효율적으로 처리했는가...에 초점을 뒀다.
당연히 5살에 구구단을 다 외운 아이가, 10살 때 겨우겨우 한글을 뗀 아이보다 똑똑하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도덕경씨와 도덕경 주니어는 '현재의 지식량'을 똑똑하다고 봤다. 5살 때 구구단을 땠더라도, 10살 때 한글을 다 못 땠다면, 10살짜리 아이가 더 똑똑한 것이다.
이건, '똑똑함'에 대한 정확한 정의가 합의되지 않아서 생긴 '언어 패러독스'였던 것이다.
물론,
"이제부터 똑똑함은 그 문제 처리 효율성과 현재의 지식 상태를 모두 고려한 상황으로 정의하자.. "...라고 시작했더라도, 도덕경파과 원활한 합의를 이루진 못했을 거 같다.
도덕경파의 수장 도덕경씨는,
"사람은 누구나 천재이다. 인간 안에는 무수한 우주가 있으며, 언제나 변할 수가 있다. 변하는 그 모든 순간조차 바로 '나'이다"
..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마 어떻게 따지고 들었어도, 16살 때라도 깨달았으면 이미 똑똑한 것이라고 설득했으리라.
그 슬리퍼 어디갔을까? 한참 집안을 뒤지다가, '사무실' 의자 뒤에서 찾았다. 무엇이든지 찾고있는 동안에는 찾아지지 않는다.
빨리 배우는 것도 똑똑한 것이고, 현재 많이 아는 것도 똑똑한 것이다.
우리는 매일 가족 지인 친구들과 대화를 한다.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만,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공감받지 못할 때도 많다. 마치 '똑똑함'을 나는 '빨리'로 해석했고, 도덕경파는 '많이'로 해석한 것 처럼.
이런 관점의 차이를, 정작 서로 칼날을 드리우고 설전을 펼칠 때는 알 수가 없었다.
나 역시 말하면서도, 내 이야기의 초점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나는 말보다 글이 조금 더 편하다.
말로 흘려보낼 때는 가다듬어지지 않던 생각들이, 글로 옮기면서 선명해진다.
그래서 내가 글로 수다떠는 사람인가보다.
#똑똑함
#멍청함
#동서남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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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켓몬 가보리입니다.'라는 의미의 가보리다에서 어디든 가 보는 사람이 된 블로거 가보리다의 일기: '재미없음'에 알러지 반응이 있는 흔치않은 50대 아줌마 대문자P의 일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