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도 화장지 필요해요.
한국에 계신 엄마는 신종 코로나 사태를 "이건 재난이야"라고 표현하셨습니다. 한 달 전 저에게도 미리 마스크와 손 소독제를 사두라고 말씀하셨지요. 저는 알겠다고 말하고 가볍게 넘겼습니다.
제가 사는 뉴욕·뉴저지 일대에 신종 코로나가 본격적으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캘리포니아, 워싱턴주에서 이곳으로 넘어오는데 시간이 꽤 걸렸지요. 하지만 확산 속도가 무섭습니다.
한국 뉴스에 익숙한 주변 한인들은 일찌감치 행동에 나섰습니다. 손 소독제와 마스크, 화장지, 쌀, 김치, 라면과 같은 것들을 쟁여두었죠. 낮이 길어지면서 플레이데잇이 활발해질 시기인데 엄마들은 만남을 줄였습니다.
지난주 세계보건기구(WHO)의 '팬데믹'(Pandemic·대유행) 선언은 이곳에서 곧바로 패닉으로 이어졌습니다. 드디어 미국인들도 마스크를 착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전까지만 해도 오히려 마스크를 착용하면 코로나 환자로 의심받는 분위기라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미국인들의 사재기는 스케일이 남다릅니다. 평소에도 코스트코나 월마트에서 카트를 가득 채우는 미국인들이 사재기를 한다면 어떨까요. 상상을 초월합니다. 집주변 코스트코에는 경찰차 3대가 배치됐습니다.
한국에서도 화제가 됐듯이 미국인들은 특별히 화장지를 사재기했어요. "한국보다 비데를 쓰는 가정이 많지 않아서 일까"라고 남편에게 말하니 공급이 부족할까봐 그렇다네요. 뭐, 그런가보죠. 우리 집에는 화장지가 이제 두 롤 반이 남았는데 어디를 가도 화장지를 구할 수가 없네요. 남편이 화장지 사용을 삼가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어찌나 고맙던지요!
사람들 생각은 다 비슷하다는 게 이번에 또 확인됩니다. 마트가 몽땅 털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사고 싶은 물건은 다 팔리고 없습니다. 손 세정제와 마스크같이 코로나와 관련된 제품뿐만이 아니라 딱 내가 사고 싶은 고기 부위와 채소를 구할 수가 없어요. 계란 역시 마트에서 사라졌습니다.
온라인 쇼핑으로 눈을 돌려봅니다. 우리 엄마는 "쿠X이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라고 이야기하곤 해요. 저도 아마
존에 들어가 생필품과 식료품을 배달시켜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역시 남들보다 빠르지 않군요. 아마존의 식료품 배송 서비스인 아마존 프레시, 그리고 아마존이 배달해주는 홀푸드의 배송 서비스, 인스타카트 모두 주문이 불가능했습니다. 평소엔 35달러(약 4만4000원) 이상 주문하면 2시간 이내에 배송을 받을 수 있는 서비스인데 말이죠.
미국 나이로 3살 반이 된 첫째 학교는 이번 주부터 휴교에 들어갔습니다. 집에서 일해야 하는 저는 주말에 아이에게 태블릿PC를 사줬어요. 데이케어에 맡기던 7개월 둘째도 집에 있게 됐거든요. 두 아이와 함께 집에서 일하는 것은 또 하나의 극한 직업입니다.
제가 있는 뉴저지는 밤 8시부터 새벽 5시까지 통행 금지예요. 한국에서 옛날에 이런 '통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별일이 다 있었네' 했는데 그런 별일을 제가 겪고 있네요.
아이들과 집에서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하며 지내니까 아무리 다짐해도 속이 부글부글 끓을 때가 있어요. 답답하기도 하고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요.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합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와닿지 않는 일을 겪으니 한국에서 얼마나 우리 가족들이, 친구들이, 이웃들이, 동료들이, 사회가 힘든 일을 겪었는지 알겠어요.
솔직히 상황이 이렇게 되기 전까지 저는 정말 사람들이 집 밖을 나가지 않아야 할 정도의 상황인가에 대해 의심을 많이 했어요. 그렇지만 코로나의 확산을 막기 위해 그래프를 최대한 위에서 눌러주려면 모두가 협력해 최대한 사회적 거리 두기를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겨우내 첫째에게 꽃이 피면 레고랜드에 데려가겠다고 약속했는데 이미 꽃은 폈더라고요. "엄마 꽃 왔어. 레고랜드 가자"고 하는 아이에게 대충 얼버무리며 다른 이야기로 넘겼는데 다음엔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아마 여름에 피는 다른 꽃 사진을 보여주며 "이 꽃이 피면 갈 수 있어"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아이가 원하는 대로 어서 레고랜드에도 가고 다시 유치원에도 갈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