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물들이기

by 너울

A양의 손톱엔 희끄무레한 봄이 담겨있다. 매년 봄, 그녀는 연례행사처럼 '봉숭아 물들이기'를 한다. 그것은 봄을 맞이하는 그녀만의 방법이자, 어떤 신호와 같다.

사실 A양은 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언제나 조용한 곳을 찾는 그녀에게 벚꽃축제와 같은 것은 혼이 빠지게 피곤한 일이다. 그렇다고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 또한 제 나름대로 꽃놀이를 하러 간다. 다만 그것이 제가 사는 아파트 근처 하천일 뿐이다. 저녁을 먹고서 그곳에 가면 몇몇 가족들이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직 찬기운이 남아있는 바람을 시원하게 맞으며, A양은 천천히 꽃구경을 했다. 분홍색 꽃잎은 예쁘기도 하지만, 참 연약해 보였다. 당장 내일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아 보였다. 그래서 다들 벚꽃에 그리 안달나있나 싶은 A양.

꽃구경을 하기보단 집에서 제 작은 손톱을 빨갛게 물들이는 것이 A양은 더 좋았다. 옛적엔 정말로 봉숭아를 따서, 가루를 내고, 손가락에 비닐을 둘둘 감는 아주 수고로운 일을 했지만, 그 모든 것을 단돈 1000원에 살 수 있는 시대에 A양은 살고 있었다. 없는 것이 없다는 '다이소'에 가서 저 구석 어딘가에 가면 가루약처럼 팔고 있었다.

적당한 양의 물에 가루를 넣고 휘휘 저으면 빵 반죽처럼 진득해진다. 그것을 손톱에 바르고 10분, 아님 30분을 기다리면 그녀만의 작은 행사는 끝이 난다. 그날은 하루 종일 제 손톱만 보다가 끝난다.

하지만 단돈 1000원의 힘은 편리하긴 하지만, 효력이 강하진 않았다. 일주일만 지나도 색이 반쯤 옅어진다. 괜히 울상이 되어 잉잉, 아쉬워하기를 매번. 그래도 남은 반은 끙끙거리며 제가 잘려나가지 전까지 붙어있는다.

사실 봉숭아는 봄이 아니라 여름에 가까울 때 핀다. 그러니까 봉숭아 물들이기는 사실 여름을 맞이하는 게 맞다. 한때 A양은 이 사실에 절망했다. 없는 것이 없다는 '다이소'가 저를 속인 건가...! 그리고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A양은 이대로 두기로 했다. 벚꽃나무에 눈이 쌓이는 게 요즘인데, 봄에 봉숭아 물들이는 것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 여름에 봉숭아 물들이기를 하기엔 그녀는 그 외에 할 것이 너무 많았다. 계곡에 가서 수박도 먹어야 하고, 한참 물놀이를 하고 나서 털털거리며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아~' 소리도 내야 했다. 장마철엔 항상 꽂혀있던 이어폰을 빼고, 투명우산에 부딪히는 물방울 소리도 들어야 했고, 저녁에 우비를 걸치고 가까운 편의점에 달려가 아이스크림도 사야 했다. A양은 봄보다는 여름을, 여름보다는 가을을, 가을보다는 겨울을 좋아한다. 그래서 연말이 될수록 A양은 할 것이 쌓이는데, 별 것 없는 봄에게 봉숭아 마저 빼앗아가는 것은 너무 야비한 것 같았다. A양은 봄에게 나름 친절을 베푼 것이다.

A양은 지금도 제 손톱에 남아있는 아주 옅어진 주홍빛을 보며, 남몰래 씩 웃는다. 조금 이상해도 뭐 어떤가, 그보다 더 이상한 세상 속에서 더 이상한 날들을 살고 있는데. 괜히 웃어보는 오늘, 그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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