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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녕 Dec 16. 2020

짙은 안갯속으로 한 걸음

<에일리어니스트> 시즌 1: 피해자는 어디로 가나

- 범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896년, 20세기에서 4년 전



쓰린 기억이 있음에도 이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쓰는 건, 그래도 이 드라마가 너무 좋아서다. 진심으로 ‘살면서 이런 드라마를 한 번쯤은 만들고 죽어야지’라는 생각이 드는 드라마다. 미국 TNT 채널이 이 드라마를 제작하면서 역대 최고 예산을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에 걸맞게 1896년 뉴욕 고증을 매우 잘한 드라마다. 드라마를 워낙 잘 만들어서 원작 소설도 한 번쯤은 보고 싶은데 번역본이 있는지 모르겠다. 


1896년 뉴욕에서 벌어진 괴이한 남성 청소년 연쇄살인, 그리고 그를 쫓는 19세기의 정신의학자. 말만 들어도 재미있는 설정이다. <에일리어니스트>는 범상치 않은 설정을 지나 그 시대를 온전히 보여주는 시대극이자 질문을 던지는 스릴러다. 누가 보아도 끔찍한 사건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으려는 3인방이 살인범과 부패 경찰을 쫓는 이야기는 언제나 스릴러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지. 


화려한 야만의 시대



대학에서 서양사를 전공했던 입장에서 <에일리어니스트>의 시대적 배경인 1896년은 흥미로운 시기다. 실제로 이 드라마에서는 훗날 미국 대통령이 되는 Theodore Roosevelt(테디베어 인형 이름의 주인공이 맞다)가 새로운 뉴욕 경찰국장으로 등장하고, 시대를 풍비했던 J.P. 모건과 같은 사업가도 등장하니 역사 전공자로서는 보는 맛이 쏠쏠하다. 뉴욕에 가본 사람이라면 틈틈이 등장하는 뉴욕 자연사박물관이나 센트럴 파크의 이름도 반가울 것이다. 그러나 <에일리어니스트>는 한가롭게 19세기의 풍경을 구경하는 드라마는 아니다. 오히려 많은 미디어와 책에서 화려하게 등장하는 이 시기의 음울함을 한껏 보여준다. 


이 시기의 미국, 뉴욕은 화려한 야만의 시대를 지난다. 산업 혁명과 식민지 확보에 열을 올리던 서양 국가들은 대부분 다 이러한 시기를 거쳤다. 겉으로는 화려한 오페라 극장이 있고 흑백 영화와 고속 열차가 발명되는 시절. 그러나 그 화려함 아래에는 대다수의 노동자와 아이들, ‘유색 인종’들이 차별을 받고 인권을 보장받지 못하던 시절. 여전히 여성이 투표권을 얻기 위해 시위해야 하던 시대. <에일리어니스트>는 이러한 1896년의 명암을 사건으로나 사람으로나 잘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은 주인공 라슬로 크라이슬러 박사와 함께 정신줄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 잔인한 청소년 연쇄살인범보다는 이 시대 자체가 더 잔인 해보일 때도 있으니 말이다. 


"불구는 불구를 찾는다"



아직 미국 대통령이 되지 않은 루스벨트 경찰국장은, 신입 국장이라 힘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실에 타협할 때도 있다. 그러나 그는 경찰의 개혁을 위해 조금씩 움직인다. 뉴욕 경찰국 최초의 여자 직원(청소직 제외)으로 세라 하워드를 선발하고, 기존의 인맥과 판단에 의거하는 수사보다는 과학 수사를 도입하려고 노력한다. 기회를 노리는 루스벨트에게 청소년 연쇄살인사건은 자신이 원하는 수사를 진전할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그래서 뉴욕 경찰국에 에일리어니스트, 라슬러 크라이슬러 박사가 온다. 



라슬로 크라이슬러는 루스벨트와 대학 동기인 동시에, 그 당시로서는 상당히 진보적인 행보를 보인다. 딸아이의 자위를 보고 식겁한 어머니가 그에게 딸을 데려오자, “악마가 시킨 것이 아니라 여성이 되는 과정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고 말하고 돌려보낸다. 당시 정신의학분야에서는 뛰어난 박사이지만 시대를 앞서가는 만큼 그를 미워하는 이들도 많다. 뉴욕 교회 주교는 그를 볼 때마다 “당신과 같은 과학자는 속으로는 신을 믿지 않지”라 말하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낸다. 


라슬로는 사건의 현장과 시체를 보며 범인이 단순 살인범이 아닌 연쇄 살인범이라 추측한다. 다리 위에 시신이 놓인 위치, 그리고 소년의 눈을 뽑고 다리에 큰 상처를 남긴 솜씨가 보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도시 뉴욕의 먹이사슬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위치한, 성매매 업소에서 일하는 여장 남자 청소년들. 범인은 그들을 노리며 뉴욕을 휘젓고 다닌다. 라슬로는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범인의 심리를 탐구하기도 한다. 그리고 라슬로의 곁에는 팔을 잘 쓰지 못하는 장애인인 그와 같이, 뉴욕의 약자들이 함께 한다. 





뉴욕 경찰국 최초의 여성 직원이나 자신을 격려했던 아버지의 자살을 직접 목격한 세라 하워드.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나 약혼자가 떠난 이후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뉴욕 타임스의 삽화가 존 스카일러 무어. 과학 수사에 빠삭하지만 경찰들에게 ‘얼토당토치 않은 과학 수사하는 유대인 형제’라 무시를 당하는 아이작슨 형제. 라슬로의 집에서 일하는 흑인 사일러스와 메리 역시 어두운 과거를 지닌 이들이다. 두 사람 모두 살인을 한 적이 있으나 라슬로는 그들을 신뢰한다. 열악한 사회적 여건에서 살인을 저지른 후, 라슬로가 그들을 직접 심리 치료를 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일까. <에일리어니스트>의 중심이 되는 소년 연쇄살인사건 역시 범인을 마냥 악마 화하지 않는다. 사건을 덮기 바쁜 부패 경찰과 달리 주인공 3인방은 범인의 심리에 차분히 접근한다. 범죄를 저지를 때마다 눈과 심장을 뽑아 전리품으로 삼고, 아칸소 칼로 살인을 저지르며, 성매매 업소의 남자 청소년들의 신뢰를 받고 목을 조르는 범인. 기독교의 축일마다 물이 흐르는 높은 곳에서 살인을 저지르는 ‘하늘 위의 성자’은 절대 평범하지 않다.


그러나 추리가 막힌 라슬로가 자신의 환자였던 마담을 찾아갔을 때, 마담은 그에게 충고를 한다. 


“인간은 양면적이라 고통에서도 환희를 찾고, 불구는 불구를 찾죠.”


<에일리어니스트>는 악마 같아 보이는 범인에게서도 시대적 배경을 보여준다. 처음 드라마상에서 용의자로 오르는 부유한 집 도련님 반 버건은 어머니에게서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부정당한다. 주인공 3인방은 시체의 상처에서 인디언의 살인 기법을 읽고, 범인이 서부에서 군인으로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다. 그리고 그들이 마주하는 범인의 과거는, 인디언의 사생아라는 이유로 어머니의 지독한 학대를 받은 어린 아이다. 다 자란 이후에는 부모와 다른 사람을 죽여 이름을 훔치고 살아가는, 존 비첨이자 제이비스 듀리. 


그럼에도 변하는 인간


그렇다면 이 드라마는 범인을 합리화하는 드라마인가? 절대 아니다. 2차 세계대전 관련해서도 서양사에서 비슷한 논문이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히틀러가 절대 악인 아니라는 논문을 발표했던 역사가가 있다. 히틀러는 사회적 흐름에서 등장한 위인일 뿐이지, 2차 세계대전 자체가 절대 악 히틀러에 의해서 발생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 논문은 어마어마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이상하지.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의 악 자체에 대해서 부정하는 건 아닌데. 



<에일리어니스트>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상처를 받은 주인공들이 사건을 쫓으며 자신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는 성장물이기도 하다. 뉴욕 경찰국에서 언제나 성희롱과 조롱에 시달리던 세라 하워드는 라슬로와 존과 함께 사건을 쫓으며 경찰로서 성장한다. 사건 현장마다 “여성은 이러한 잔인한 시체를 보면 안 된다”라는 말을 듣지만 세라는 멈추지 않는다. 그는 아들을 잃은 어머니에게 시체를 잘 먹었다는 편지를 보내는 범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쫓는다. 라슬로는 세라의 능력을 인정하는 동시에 무자비하게 한계까지 밀어붙인다. 세라의 트라우마인 아버지의 자살을 끝까지 밀어붙일 때, 라슬로의 친구 존조차 그를 말릴 정도다. 


아이러니하게도 <에일리어니스트>의 주인공인 라슬로마저도 상처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정신질환자를 돌보는 학자임에도 강박 증세를 보이고 감정이 무딘 라슬로도 어쩌면 정신질환자 아닐까. 스스로 신발끈도 매지 못할 정도로 팔이 약한 라슬로는 어릴 적의 병이라고 둘러대지만, 영리한 세라는 라슬로의 상처를 예리하게 잡아낸다. 그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버지의 학대를 세라가 잡아내자, 두 사람은 말할 수 없이 멀어진다. 


그러나 오히려 약점을 보인 라슬로는 인간적으로 변한다. 기자로 취직한 사일러스의 조카에게 한 소리를 듣자, 사일러스와 메리의 독립을 준비하는 라슬로. 처음으로 메리와 식사를 하며 사랑을 느끼는 라슬로. 자신의 집에 들이닥친 부패 경찰, 코너 경감으로 인해 메리가 죽자 더없이 슬퍼하는 라슬로. 



<에일리어니스트>는 주인공 3인방을 통해 상처 받은 자도 성장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세라는 라슬로와 화해하며 말한다. 


“평생 과거의 망령에 시달릴 수도 있었지만, 우리의 고통을 통해 다른 누군가를 도울 수도 있어요.”


그래서 <에일리어니스트>는 잔혹하면서도 인간적인 드라마다. 

인간이 타인과 함께 상처를 대면하며 성장하는 이야기는 언제나 아름답다. 



인간을 알아내려는 자, 에일리어니스트


스릴러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에일리어니스트>의 결말은 좀 아쉬울 수도 있을 테다. 범인이 너무 쉽게 잡힌 데다 바로 죽어버리니까. 그러나 <에일리어니스트>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악마 같은 범인이 아니다. 생물학적으로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르지 않은 범인의 뇌, 그리고 자신을 학대했던 아버지에게 찾아가는 라슬로. 치매로 인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 라슬로는 그가 틀렸다고 조용히 말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천성을 벗어나 발전할 수 있다고. 


물론 안개가 낀 뉴욕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이민자 아이가 자유의 여신상 아래서 죽은 살인 사건은 오래도록 시민들의 기억 속에 남았을 것이다. 세라를 죽이려고 했던 코너 경감은 사건 종료 이후 경찰국에서 공로를 인정받는다.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부패 경찰과 J.P. 모건은 여전히 뉴욕을 유유히 휘젓는다. 그럼에도 우리의 에일리어니스트는 지문과 상처를 이용한 과학 수사로 인간을 파고들 테니. 올해 공개된 시즌 2에서도 에일리어니스트의 여정에 기꺼이 따라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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