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아닌 첫사랑에게
첫사랑.
수많은 소설과 영화 속에서 첫사랑은 강조되는 존재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에게 첫사랑은 강렬한 존재이며, 가끔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존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첫사랑을 정의하는 방식은 제각기 다르다.
누군가는 처음으로 사랑을 느낀 존재를 첫사랑이라 하고,
누군가는 처음으로 상호적 관계를 맺은 존재를 첫사랑이라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처음으로 ‘연애’라는 ‘정해진 관계’로 맺어진 존재를 첫사랑이라 말한다.
필자는 좀 애매하다. 학창 시절에 몇 년의 짝사랑을 한 존재를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필자에게는 ‘첫사랑 아닌 첫사랑’이 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보면 외로운 적이 많았다. 어릴 적부터 미국에서 살다 한국 초등학교에 돌아왔을 때는 한국어보다 영어가 익숙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김치 한 조각 먹는데 물 네 컵을 마신다고 놀림받는 아이였고, 중학교 때는 서울에서 지방으로 이사를 왔기에 ‘서울에서 온 모범생 아이’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서 여고를 다닐 때도 안경을 쓴 채 교실에서 유일하게 힙합을 듣던 모범생은 왕따라는 낙인이 박혔다. 당연히 매력적인 연애 대상 역시 아니었다. 내게 호감을 가지던 몇몇의 남자아이들은 직접 표현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스스로도 몇 년의 짝사랑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런 내가 ‘첫사랑 아닌 첫사랑’을 만난 때가 고등학교 때라는 것은 아이러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학교에서 전학하거나 자퇴하겠다고 난리법석을 피웠지만, 2학년 때는 다시 적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여고’라는 공간을 여전히 싫어했다. 1학년 때의 교실을 지나갈 때마다 매일 같이 새벽 2시까지 울다가 잠든 기억이 살아났고, 당시에는 (어리석게도) 그 일이 ‘여성만 모인 공간’이라서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래들보다는 선생님들에게 속을 털어놓았고, 방학만 되면 학교 밖으로 떠났다. 남들은 내가 확고한 꿈을 가지고 ‘스펙’을 쌓기 위해 ‘대외활동’을 한다고 지레짐작했지만, 나는 그저 학교 밖으로 나가는 것만으로도 해방감을 느꼈다.
거기서 너를 만났다.
고3이 되기 전 차디찬 겨울방학 때, 너의 첫인상은 좋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검은 양복을 입은 너의 모습은 좋아했다. 너와 처음 만난 프로그램에서는 거의 말을 나누지 않았으나, 뒤풀이가 있을 때 너와 조금은 더 말을 나누었다. 좋은 대학을 가고 싶어 하는 범생이들이 많았고, 다들 대학 붙고 만나자면서도 카톡으로 연락을 나누곤 했다. 나는 뒤풀이가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조차 너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현실의 너 말고, 파란 창에 초록 불로 켜져 있는 너. 다가감보다는 망설임과 참는 것에 익숙한 내가 웬일로 너에게 먼저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당장 다가갈 수 있던 너가 초록 불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참을 망설이다 친구들과의 단톡방에서 나눈 시시콜콜한 이야기로 너에게 말을 걸었을 때,
난 그 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
모두와 친해 보이면서도 방어벽이 견고하던 너는, 생각보다 나와 닮은 점이 많았다.
둘 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며 한국인이 아닌 한국계 미국인인 손위 형제나 자매를 두고 있었고,
둘 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실패한 경험이 있었으며,
둘 다 마지못해 입학한 고등학교에서 소외감을 해소하기 위해 학교 밖을 나돌았다.
둘 다 역사를 많이 좋아한다는 점도 비슷했다.
또래와 그렇게 말이 잘 통한다고 느낀 적은 간만이었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안 그랬다면 그렇게 1-2월 내내 대화를 나누었을 리가 없잖아.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둘 다 고3이라는 중요한 기간을 눈 앞에 두고 있었고 지원하려는 대학들도 비슷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다. 다행히 지원하려는 과와 입학 전형은 미묘하게 달랐기에 서로를 비슷한 처지로 봤음 봤지 경쟁자로 보지는 않았다.
그때까지도 스스로 너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가 헷갈렸다. 연애 감정을 쉽게 느끼지 않는 편이고, 우리가 나눈 대화는 정말 친구가 나눌 법한 대화였지 ‘썸’의 기운은 하나도 없었으니까. 여차 저차 결정을 내렸다.
“나는 ‘고3’이니까 핸드폰도 비활성화시키고 SNS도 끊어야지. 카톡만 살려두고 친구들과 연락도 잠시 안녕!”
너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연락하고 싶으면 카톡으로 연락하라고 통보하고 먼저 연락을 끊었다.
너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3월에 연락을 끊고 깨달았다. 역설적이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스스로 맘을 정리하는 게 영 쉽지 않았고, 눈치가 빠른 아빠는 내 표정만 보고도 연애 감정이 있느냐 물었다. 아니라고 둘러 대고는 이 감정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지금은 ‘연애할 때’가 아니니까, 조금만 있다가 대학 붙고 연락해야지.
3월 말인가, 4월 초인가. 너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잘 지내?”
결심은 여지없이 무너졌고, 오히려 너와 연락을 하지 않을 때보다 안정된 내 자신을 발견했다.
우린 고3이라는 시기에 의지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가 서로를 부러워했기 때문이다.
너는 역사에 대한 나의 열정을 부러워하고 놀라워하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역사를 좋아하고 수시 원서 6개 중 5개를 모두 사학과에 쓴 나를 동경하고 칭찬했다. 부모님 중 한 분이 역사 교사였던 너는,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했으나 업으로 삼을 자신은 없어서 외교관으로 꿈을 바꾸었다고 했다. 비록 가족의 반대는 없었으나 항상 “니 성적에 사학과를 왜 가?”라는 소리를 듣던 나에게 너는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주었다.
나는 너의 친화력을 부러워했다. 초중고 내내 20-30여 명의 아이들이 좁게 모인 교실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던 나와 다르게 너는 친화력이 좋은 사람이었다. 담배 피우고 ‘날라리’들이 많다는 취급을 받던 학교에서 너는 사람들과 잘 어우러졌다. 그래서 너의 대입 자소서 전형과 자소서에는‘리더십’, ‘봉사’와 같은 단어들이 꽤 많았다. 그때는 그게 참 부러웠다.
꼼짝없이 학교 안에서 외로움에 시달리던 너와 나는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그러다 여름방학 즈음에 이르러서는 서로의 대입 자기소개서를 봐주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너가 나를 보챘다.
너는 내 글을 좋아했다. 비록 대입 목적의 무미건조한 글이었으나, 그때부터 너는 내 글을 참으로 좋아하였다. 너가 나에게 자기소개서를 보여주고 내가 교정을 해주면, 너가 나에게 자기소개서를 보여달라고 보채는 식의 대화가 무더위에 이어졌다. 당연히 서로에 대해 속속들이 알 수밖에 없었다.
너가 초중고 내내 학교 입시에서 미끄러져 더 이상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는 것도,
익숙하지 않은 고등학교에 적응하기 위해 많이 노력하던 것도,
밝아 보이기만 했던 너가 나와 비슷한 시기에 자살 충동을 느꼈던 것도
그때 알게 되었다. 어쩌다 나의 자기소개서를 본 너의 부모님이 내 글을 칭찬하기도 했다.
그때 나는 다시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었다. 1학년 때 따돌림을 당하던 상처는 아직 남아 있었고, 학교 생활은 2학년 때는 평화로웠으나 3학년 때는 교실 안에 맘 터놓을 사람이 없었다. 내 재능을 인정해주고 말이 잘 통하던 너는 그때의 외로움을 많이 달래주었다.
서로 아는 사람이 많았지만 너와 나의 사이를 아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너네 혹시 사귀니?” 식의 오해를 받을만한 사이기도 했고, 그만큼 너나 나나 서로에 대해 말할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나누었고, 나는 제주도에 잠깐 일이 생겨서 갔을 때도 너에게 제주도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 자기소개서 작성이 다 끝난 후에도 연락은 계속했다.
현재 다니는 대학의 논술 시험을 본 날 같이 저녁을 먹은 사람이 너였다.
온라인 대화를 주로 하던 애들이 지금은 없어진 맛없는 돈까스 집에서 어색하게 식사를 했지.
처음으로 수능을 보고 가채점 결과가 역대 최악이었을 때,
가장 먼저 전화를 먼저 걸어서 위로를 받았던 사람 역시 너다.
가장 가고 싶은 대학 서류에 떨어졌을 때도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위로가 된 조언을 해준 사람,
역시 가족이나 다른 사람이 아닌 너였다.
그 후 너는 먼저 수시 과정이 끝난 나에게 SOS를 쳤다.
먼저 면접장에 들어간 나에게 너는 면접 질문들을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스타벅스에서 나는 너에게 면접 연습을 시켜줬지.
그리고 우린 같은 대학에 붙었다.
우리가 어떻게 됐더라?
대학에 붙고 나서도 하고 싶은 활동을 공유하고 서로의 계획에 대해서 물어보기도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우리는 새터와 엠티, 입학식과 기숙사에 대해서 궁금해하던 새내기였지.
그러나 대학이라는 공간에 들어온 후 너와 나의 모습은 달랐다. 안 그래도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하던 너는 대학에 들어오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약속을 잡았다. 반면 나는 과 생활도 부담스러워 학회에 들어가 적지만 깊은 친구들을 사귀는 데 집중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멀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입학한 대학은 첫 해에 기숙사에 들어가는 곳이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이었지만 1학년들은 서울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그곳을 좋아하지 않았다. 갓 새내기들만 있는 캠퍼스는 대학이 아니라 고등학교 4학년 같았고, 사학과에 원해서 들어왔던 나는 교양과목들만 많은 그곳을 몹시 싫어했다. 1년 동안 지낸 룸메이트들과 야식 한번 같이 먹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친분이 없었고, 다시 외로워졌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곳에서 연애 못하면 바보라는 소리도 있었지만 나에게 해당되지는 않았다. 스무 살들이 많은 곳에서 스무한 살이라고, 외국에서 왔다고 오해받고, ‘여자 치고’ 키가 큰 데다가 화려한 눈 화장을 좋아하는 나는 여전히 남자들이 피하는 여자였다. 오히려 내게 다가오는 남자들은 캠퍼스 밖의 남자들이었다.
그때 나는 3월까지도 너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고민했다. 우리 사이는 예전 같지 않았고, 핸드폰 캘린더에 약속이 빽빽하던 너는 연락이 끊기기 일쑤였다. 그때 친구가 고민하던 나에게 조언을 해줬다.
“너가 걔를 진짜 연애 대상으로 좋아하는 건지 아니면 작년에 의지 해서 좋아했던 건지 한번 잘 생각해봐.”
일주일 정도 고민을 했다. 둘 다 있지만 후자가 더 강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니 너에게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아니, 그건 내 착각이었다. 맘 편하자고 스스로 말한 거짓말에 불과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을 때 새삼스레 깨달았다.
대학 첫 기말고사가 끝나갈 때였다. 나는 바쁠 때일수록 꾸물거릴 때가 많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그건 변함이 없었다. 익명 질문이 한참 유행하고 있을 때였고. 나는 유행을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신경 쓰는 사람이었다.
SNS에 익명 질문을 받는 행위 자체도 재미있었다. 여느 새내기답게 연애에 대한 질문도 있었고, 나는 방심하고 있었다. 나는 짝사랑 썰 좀 풀어보라는 너의 질문에 걸려들었고, 너는 내 짝사랑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나는 너가 볼 줄 몰랐거든.
나도 눈치를 챘다.
내가 아직 너를 좋아하는 티를 내고 있을 즈음에 너도 마음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긴가민가 고민하던 너가 내가 더 이상 티를 내지 않자 헷갈리고 우정을 깨고 싶지 않아 잠시 생긴 마음을 접었다는 것을.
익명이라는 방어막 아래서 너는 내게 물었다.
다시 다가가면 받아줄 거냐고.
다시 나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다시 다가왔다.
우리는 원래 약속이 있었고 기말고사가 끝난 후 만나기로 했다.
나는 너가 알아챘다는 것을 깨닫고 밤잠을 설쳤지만, 시험이 끝나고 굽 있는 샌들을 하나 샀다.
나보다 시험이 늦게 끝난 너는 늦잠을 자느라 약속에 늦었고, 뻔뻔하게도 오랜만이라며 나를 안으려 했다.
아직 경계심이 풀리지 않은 나는 몸을 피했고, 밥을 먹으면서도 너는 나를 다시 보채기 시작했다.
알고 있는 칵테일 집들이 몇 군데 있다며, 같이 가자며.
나쁘지 않았다.
우린 잘 됐을까?
너와의 일화를 주변 사람들에게 들려주면 영화 같다고들 한다.
누군가는 영화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가 생각난다고도 했다.
나는 대만 로맨스 영화들을 좋아한다. 한국 영화에서는 맥이 끊긴 지 오래된 학창 시절 첫사랑 영화들의 몽글몽글한 감성을 좋아한다. 고등학교 시절에 대만 영화를 많이 보여주셨던 중국어 선생님 덕분에 본 영화들이 많았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별이 빛나는 밤>, <말할 수 없는 비밀>, <청설>, <나의 소녀시대>…. 작품성이 높진 않더라도 아련한 감정에 빠지게 하는 영화들.
풋풋한 첫사랑을 보여주는 그런 영화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어떤 사연으로 인해 안타깝게 헤어진 두 주인공은 오랜 시간이 지나 성인이 되어 재회한다.
판타지성이 강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논외로 하고, <별이 빛나는 밤>의 주인공들은 여주인공이 좋아하던 고흐, 그 고흐가 그림을 그리던 파리에서 재회하며, <나의 소녀시대>의 주인공들 역시 여주인공이 좋아하던 가수의 콘서트장에서 재회한다. 두 주인공이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 결말로 끝나는 영화는 실화 기반의 <그 시절, 우리가 좋아하던 소녀> 밖에 없다. 그나마 그것도 현실적이지 않지. 첫사랑의 결혼식에서 그렇게 진심으로 축하해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아직 사랑 혹은 연애를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로망으로 비칠 결말이다. 그러나 사랑을 경험해본 사람들은 왜 첫사랑 영화들이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는지 알고 있다. 현실에서 그렇게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첫사랑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서투르고, 그 서투름을 모두 견디고 해피엔딩으로 나아가기는 쉽지 않다. 천 명에 한 명 정도 있을까? 그래서 첫사랑 영화들의 재회, 해피엔딩은 판타지 혹은 대리만족이다. 가끔 그런 영화들을 보고 추억에 취해 옛 연인에게 연락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잘 될까? 글쎄?
너와 나라고 예외는 없었다. 안 그랬다면 내가 이런 글을 쓰고 있지는 않겠지. 나는 남들은 다 좋아하는 tvn <응답하라> 시리즈를 지독히 싫어한다. 복고물 특유의 가부장적 분위기도 한몫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다.
나는 너로 인해 소꿉친구 연인 판타지를 싫어하게 되었다.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에서는 대학 입학 후 두 주인공이 오해를 하고 헤어진다.
그때 남자 주인공 커징텅이 하는 말이 있다.
“성장하는 동안 가장 잔인한 건,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성숙하며 그 성숙함에 견뎌낼 남학생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여름방학에 연락을 계속하던 우리는 둘 다 바빴다. 나는 친구와 내일로 여행을 떠났고, 너는 여전히 약속이 많았다. 둘 다 바빴지만 그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었고,
너는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스케줄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보면 너의 스케줄에 내가 1순위로 들어갈 만큼 너의 마음이 크지 않았다. 처음에는 네 스스로도 모르다가 나중에 깨달은 듯싶다. 나는 예전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계속 너에게 무언가를 주고자 했다. 너는 예전처럼 받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나를 내치지는 못했다. 처음에 너가 나에게 다가오기를 망설인 이유와 같았을 것이다. 너 역시 나와의 우정을 깨기는 싫었을 테니까.
그러나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너의 망설임 때문에 내가 하루하루 괴로워했다는 것은 모르고 있었다. 내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너에게 고백했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는 즉답을 피했다. 너는 대면이 더 큰 아픔을 피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몰랐다. 내가 대답을 해달라고 다시 물을 때에서야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고. 계속 웃고 지낼 수 있는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안 그래도 하루하루 괴로워하던 나는 입맛이 뚝 떨어졌다.
친한 언니가 즐기던 실연 다이어트가 이런 거구나 하면서.
돌이켜보면 너를 좋아할 때도 너가 완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고등학교 내내 언어 영역에서 한 번도 1등급을 놓친 적이 없는 나와는 달리 너는 문학 영역을 어려워했다.
내가 힐을 신어도 더 키가 크던 너와의 데이트는 좋았지만 잘 생겼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너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말할 때보다 강압적으로 이야기할 때가 많았다.
너는 언더 힙합을 좋아하던 나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너와 헤어지면서 너에게 돌아갈 수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생겼다. 비록 사람들이 흔하게 생각하는 연애에서의 이별은 아니나, 우리는 헤어짐을 겪었다. 난 지금도 그 헤어짐을 무엇이라 명명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 헤어짐이었다.
너는 비겁한 사람이었다.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너가 솔직하지 않은 이유는, 내 앞에서 나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나는 너가 맘이 변해서 싫어한 것이 아니다. 너가 나에 대한 마음이 생각보다 깊지 않음을 알았을 때, 너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이 생겼을 때 솔직하지 못한 것이 싫었다. 끝까지 좋은 사람으로 남고자 하는 것이 싫었다.
이를 깨닫는 순간, 너에게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나는 단발로 머리를 잘랐다.
그럼에도 우리의 헤어짐은 지리멸렬했지.
나는 나의 생일에 친구로서 너에게 다시 연락했다. 너는 간접적으로 다른 사람과 연애하고 있음을 알렸다. 덕분에 마주치면 우리는 서로를 피했다. 그러면서도 너는 다시 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나 봐. 일이 있어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연말을 보낼 때, 너는 나에게 다시 연락했지만 답장하지 않았다.
우린 그제야 헤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헤어지고 있었다.
너에게 더 다가가지 말자고 판단했던 내가 맞았다.
우린 연인으로는 맞지 않았다. 아니, 너는 애인으로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얕고 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던 너는 나와 연인으로 맞지 않았으며 나에게 솔직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나는 너와의 추억을 잃어야 했다.
추억은 좋은 추억으로 남겨둘 수 있었는데,
그러지는 못했다.
대신, 비싼 값을 치르고 얻은 교훈들이 몇 개 있었다.
첫 연애에는 사람 보는 눈이 없구나.
말 잘하는 사람 함부로 믿지 말아야지.
좋은 친구와 좋은 애인이 꼭 맞지는 않는구나.
불행한 연애 생활보다는 행복한 싱글 생활이 낫고,
다음에는 조금은 더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행복하겠다.
나는 착한 척하는 나쁜 놈이 되느니 대놓고 썅년이 되어야지.
희망고문시키지 말아야지.
상처받는 게 무섭기는 해도, 다음에도 최선을 다해야지.
나름 유용하지만 달콤하지 않았던 교훈들.
그런 것들을 얻었다.
너의 전후로 연락하거나 만나는 남자들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 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 학벌을 동경하던 남자들은 유치했고, 난 여전히 키가 큰 사람과의 데이트를 좋아했다.
간 보는 남자들은 싫었고, 좋은 의대에 다닌다던 남자의 마초성을 견디지 못했다.
사실은, 다 시시했다. 만나도 할 말 없는 남자들이 많았다. 누군가의 말대로 귀가 제대로 달려있는 남자를 찾기란 어려웠다. 고추는 다 달려있는데 제대로 들을 줄 아는 귀와 제대로 말할 줄 아는 입을 가진 사람은 드물었다.
그럴 때마다 너가 생각이 났다.
헤어진 너가 아닌 내가 한참 의지했던 너.
당시에 내가 남자를 보는 기준은 행복하던 우리였다.
그때의 우리면서도 더 좋은 사이가 되길 바랐다. 당연히 맘에 드는 남자는 없었다.
기준이 바뀐 건 시간이 조금 더 지나서였다.
비로소 서울에 와서 대학생활을 즐기기 시작할 때,
그러나 아직은 추억 때문에 눈물이 남아 있었을 때.
그때의 우리보다 조금은 더 내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