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 아닌 로맨스

<렛 더 선샤인 인>: 평범한 연애 중독자의 일대기

by 유녕

※ 루미네 측의 초대 언론/배급 시사회로 영화를 보았습니다.


아주 처절한 로맨틱 코미디


브런치 무비 패스나 이벤트 당첨으로 인해 작년 하반기부터 영화 시사회를 갈 일이 많아졌다. 그러나 이 영화의 경우에는 좀 특이하게 시사회를 다녀왔다. 브런치 프로필에 띄워 둔 이메일로 언론 배급 시사회 초청 메일이 왔고, 브런치 무비 패스나 당첨 이벤트가 아닌 경로로 시사회를 가게 된 것은 처음이었기에 기꺼이 답장을 보냈다. 언론배급 시사회가 일반 시사회와 어떻게 다를지 궁금하기도 했고, 영화 <렛 더 선샤인 인> 자체에도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줄리엣 비노쉬의 원톱 로맨스물이라는데 관심이 안 갈 영화 팬이 있을까. 여성 감독과 여성 작가가 주축을 이룬 영화라니 더 끌리기도 했다. 더군다나 잘 나가는 커리어 도중 슬럼프를 겪은 감독과 작가가 다시 감을 찾게 해 준 영화라니.


언론/배급 시사회인 만큼 미리 받은 자료집에서 이 영화의 장르는 ‘대환장 로맨스’였다. 실제로 영화를 보면 납득이 가는 설명이다. 사랑의 고통을 주제로 한 영화인 만큼 너무나 현실적이고 처절한 로맨스라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과 달리, 여성 주인공 원톱 영화라고 해서 주인공이 대단하게 등장하지는 않는다. <원더우먼>과 같은 히어로 영화라면 그런 주인공이 반드시 필요하지만, 최근에 좋은 반응을 얻은 <소공녀>, <레이디버드>와 같은 영화들은 평범하고 결점 있는 주인공들을 대상으로 풀어나간다. <렛 더 선샤인 인> 역시 그런 영화다. 완벽하지 않은 여성 주인공과 완벽은커녕 모자란 남자들의 향연이다.


그들은 다 찌질해


평들을 보니 “클레어 드니가 친구 홍상수에게 보내는 기기묘묘한 오마주”(정성일 평론가), “첨가물 제로의 사랑 없는 사랑 영화”(씨네 21 김혜리 기자),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완전히 뒤집는다”(Village Voice) 등의 반응이 주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영화가 어떻게 로맨틱 코미디의 공식을 깨는지에 집중하고자 한다.


한번 이혼을 하고 딸을 가진 엄마이자 예술가인 이자벨(줄리엣 비노쉬 역)은 나름 매력적인 주인공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에 걸맞지 않게 멋진 남자 주인공이 없다. 까도남도 없고 키다리 아저씨도 없다. 이자벨이 만나는 남자들 어째 다 결함이 있고, 가지고 있는 결함들이 지극히 현실적이다. 대부분의 남성 캐릭터들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렛 더 선샤인 인>은 충분히 페미니즘 영화로 볼 수 있다.


꽃 든 뱅상.jpg


<렛 더 선샤인 인>은 딱히 친절한 영화는 아니다. 그래서 각 캐릭터에 대해서 추측을 해야 하지만 힌트는 충분히 준다. 가장 먼저 등장하는 이자벨의 파트너 ‘뱅상’은 유부남 은행가다. 어떻게 이자벨을 만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등장하지 않지만, 이자벨이 일하는 갤러리를 통해 만난 듯하다. 뱅상은 전형적인 ‘속물’이다. 그는 인생에 낙이 없는 동료 은행가들과는 다르게 이자벨과 자신이 예술로 인해 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작 바에서 바텐데에게 온갖 갑질을 하고 이자벨에게 자신의 아내 역시 사랑한다고 말하는 뱅상은 그저 뻔뻔하다. 그러면서도 이자벨에게 소유욕을 느끼면서 갤러리 운영자가 이자벨의 전 남편과 썸이 있는 것 같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이를 듣고 어렵게 이자벨이 물어보았을 때 갤러리 매니저가 아니라고 하며 두 여자가 실소하는 장면은 발랄하다.


이자벨과 연극배우.jpg


뱅상과 달리 본명이 등장하지 않는 ‘연극배우’는 여러 모로 뱅상과 대비되면서도 비슷한 캐릭터다. 개인적으로는 뱅상이 차라리 연극배우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연극 배우는 지극히 우유부단한 캐릭터다. 매일 반복되는 연기가 지겹다고 이자벨에게 토로하다가 연극을 인상 깊게 봤다던 관객의 칭찬 한 마디에 태도가 바뀐다. 아내와 사이가 안 좋아서 정리할 것 같다가 이자벨에게 말하다가도, 이자벨이 다가가려고 하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는 연극배우. 지친 이자벨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자 “집에 피자 사서 들어가야지, 우리 가족 만세”라 말하는 연극배우. 개인적으로는 연애 관계를 떠나서 저런 사람 제일 싫어한다. 하나만 해 하나만.


이자벨과 프랑수아.jpg


이자벨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대화할 때, “이 남자도 아니고 저 남자도 아니야”하는 이자벨에게 친구는 전남편 프랑수아와 다시 잘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한다. 어찌 됐던 이자벨에게 프랑수아는 한때 남편이었고 딸의 육아로 인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보는 사람이다. 남자는 이별하고 좋은 것만 기억하고 여자는 나쁜 것만 기억한다는 소리도 있지만, 이자벨이 전 남편에게 다시 시선이 가는 것은 마냥 이상하지는 않다. 이별 후에는 단점이 희석되기 마련이고, 몇 번씩 다른 사람에게 실망한 이자벨에게 있어서 프랑수아는 괜찮은 옵션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자벨이 프랑수아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그들이 헤어진 이유가 다시 드러난다. 프랑수아가 이자벨의 집에 왔을 때, 싸우는 과정에서 “이 집의 반, 아니 반 좀 넘게 내가 냈어!”라 말하고 딸이 있을 때 남자 데려오지 말라는 프랑수아. 추억은 추억으로 두는 게 낫다니까. 그렇지 않으면 잊고 있던 현실이 다가오니까 말이야.


이자벨과 파브리스.jpg


이자벨과 같은 사업에 관여하는 파브리스는 앞 뒤가 달라지는 케이스다. 이자벨이 연애를 안 하고 있을 때는 파티에서 아무나 잡고 즐기라고 충고(!)하지만, 정작 이자벨이 파티에서 처음 만난 남자와 춤을 추고 만나자 딴 말을 한다.

“너처럼 파티에서 만난 남자와 춤을 출 수는 있어도 공통점이 있어야 대화를 하지.”

내가 가지긴 싫고 남 주긴 아까우면서 맨스 플레인 하는 남자는 결코 낯설지 않지.


파티에서 처음 만나 사귀게 된 ‘실뱅’은 이자벨이 영화 안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순수한 사람이다. 그러나 대학을 나오고 평생 화가, 예술가로 살아온 이자벨과 실업계 고등학교를 나와 수입이 많지 않은 실뱅은 벽에 부딪힌다. 그리고 현실적인 요건은 파브리스의 말을 통해 구체화된다. 가장 순수하게 사랑한 사람이야말로 현실적인 조건에 막히는 아이러니.


그 외에도 생선 가게에 가면 자기 별장으로 오라고 끊임없이 치근덕 거리는 ‘매튜’, 말만 좋게 이자벨을 거절하는 ‘마크’ 등 영화는 이자벨의 똥차 릴레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다. 로맨틱 코미디면 자고로 현실에 없을 거 같은 비현실적 남자 주인공으로 대리 만족하는 게 한국영화 혹은 할리우드의 공식 아니던가. 그러나 이 영화는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의 고통을 재현하는 데 지나칠 정도로 충실하다. 감독과 작가 자신의 연애담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는 설명이 납득되는 이유다.


아주 보통의 연애 중독자, 이자벨


포스터1.jpg


그렇다면 이자벨은 완벽할까? 이자벨 역시 완벽하지 않다. 그러나 이자벨은 꽤 특이한 여주인공이다. 40대의 딸 있는 여성이 로맨틱 코미디 안에서 우스꽝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주인공이 되는 일이 흔하지는 않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 속 브리짓도 주인공으로서 철저하게 망가지지 않나. 이자벨은 대놓고 우스꽝스럽기보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처량하다.


앞에서 주욱 이자벨이 만난 남자들을 욕하긴 했어도, 이자벨 역시 완벽과 거리가 멀다. 어찌 됐건 유부남을 만나기도 하고, 집에서 만난 전 남편이 손가락을 빠는 행위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소한 이유(?)로 싸우기도 한다. 파브리스가 가난한 실뱅을 욕할 때는 무덤덤하게 있더니, 실뱅 앞에서는 파브리스의 말들을 곱씹으며 싸운다.

가장 맘에 걸리는 점은, 적어도 이 영화 안에서의 이자벨은 약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결점이나 외로움을 채우려고 하는 방식이 연애로 귀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자벨이 친구와 지인과 이야기를 해도 비 연애 상태는 선택지에 없다. 영화 내내 ‘피곤하다(fatigue)’라는 말을 달고 사는 이자벨은 그만큼 사랑의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 번쯤은 다르겠지’라는 기대를 갖고 있기에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연애상담을 하다 보면 이자벨과 같은 친구 혹은 지인을 만나고는 한다. 혼자 있는 걸 견디지 못하고 공백기 없이 누군가를 계속 만나는 사람. 차라리 본인이 만남을 주도적으로 끌어가면 모르겠는데 항상 끌려다니고 누가 보아도 좋지 않은 파트너들을 만나는 사람. 제삼자 입장에서 “왜 만나?”라고 물어보면 헤어져야 하는 이유가 되는 단점들 속에서 굳이 파트너의 좋은 점만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사람. 필자는 그런 사람들을 ‘연애 중독자’라 말하는데, 이는 본인이 연애 능력(?)이 좋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다.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방법을 몰라서 말 그대로 연애에 ‘중독’된 상태기 때문이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이 연애 혹은 타인과의 관계에 의지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은 에리히 프롬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도 열심히 설명하던 현상 아닌가.


내 안의 빛나는 태양


그래서 이 영화는 결말조차 다른 로맨틱 코미디들과 다르다. 영화의 맨 끝에서 점쟁이 데니스(제라드 드빠르디유 역)는 이자벨과 다르게 자신을 붙잡으려는 연인에게 단호하게 끝을 말한다.


그 다음 장면은 데니스의 집을 찾아가는 이자벨이다. 그렇게 사람에 데이고도 사랑을 믿고 싶은지, 데니스에게 가서 운명의 사람을 찾아 점을 본다. 이자벨과 데니스의 원 테이크 대면 씬은 두 배우의 존재만으로도 압권인데, 데니스의 해결책은 간단하다. 이자벨이 자신에게 보여준 사람들은 운명적인 인연이 아니라고 말한다.


점쟁이.jpg


“제가 당신이라면 전혀 고민 안 해요. 지금 당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세요. 나 자신, 내 직업, 내가 할 일을 하세요. 내 안에 빛나는 태양을 찾아보는 거예요.”


로맨틱 코미디에서 열린 결말이라니. 관객은 이자벨의 운명의 상대를 만났는지 알 수 없다. 현실적일뿐더러, 영화 너머 이자벨이 그를 만났는지의 여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사랑하고 싶다는 열망에 “fatigue”를 반복하던 이자벨이 차분하게 짓는 미소만으로도 이 영화의 엔딩 씬은 의미 있으니까.


미소를 띈 이자벨.jpg


매거진의 이전글한치 나은 자들의 '힐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