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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우리는 없어

<라이크 크레이지>: 사랑의 잔상이 사라질 때

by 유녕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미리 관람한 영화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랑과 인내 사이


주변에 유난히 국제 연애를 하거나 했던 친구들이 많다. 국제대 다니는 친구들도 많고 외국에 나가 사는 경험이 있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아서 그렇다. 그래서 어느 날, 처음으로 국제 롱디 연애를 시작한 친구가 만나자마자 연애 상담을 했다. 저-멀리 북유럽에서 온 사람이랑 사귀게 되었고, 그 사람이 원래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 깔끔하게 헤어지려고 했는데 붙잡았다나. 친구가 유럽에 유학 생각 있는 걸 알고 이대로 끝내기에는 너무 아쉽지 않느냐고 물어보더란다. 대신 상대방이 다자연애주의자인지 롱디 때는 다른 사람 만나도 된다고 제안해서 친구가 어마 무시한 문화충격을 겪었다. 친구 말로는 자기 주변에는 다 한국식 연애(?)만 해본 애들이라 하나 같이 뜯어말렸다고 했다. 친구가 나보고 “왠지 니 주변에는 국제 연애하는 사람 좀 있을 것 같았어.”라 말했는데 딩동. 필자는 “해보고 후회하는 게 그래도 안 해보고 후회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어?”라 제안했다. 그게 작년이었는데 아직 둘은 잘 사귀고 있다. 친구는 자신의 국제 롱디 연애를 지지하는 세 명의 친구 중 하나가 나라고, 고맙다고 말한다. 친구는 학기가 끝나면 유럽으로 갈 예정이다.


반면 최근에 미국-한국 3년 롱디 연애를 끝낸 친구가 있다. 일 년 반 동안 독일에 있던 친구를 오랜만에 한국에 돌아와서 만났을 때,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 영화 시사회 신청하고 난 후로, 2011년도에 나온 이 영화 아느냐고 물어보니 당연히 봤다 했다. 너무 현실적이고 중간에 울었던 영화라고 했다. 원래는 두 친구 중 하나랑 보러 가려고 했는데 한 명은 인턴 야근하느라, 다른 한 명은 알바해서 까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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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ke Crazy. 미친 듯이 사랑하는 연인. 틀린 제목은 아닌데 제목만 보고 격정적인 멜로물이라고 보다간 큰일 날 걸. 사랑의 잔상에 대한 영화다. 보다 보면 답답한데 답답한 만큼 현실적이다. 조연 시절 제니퍼 로렌스를 볼 수 있다는 점도 맘에 들고.


위스키와 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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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에서 같은 대학 수업을 듣다가 우연히 서로 반하게 된 영국 여자 애나와 미국 남자 제이콥. 둘의 시작은 평범하다. 애나가 먼저 제이콥에게 연락처를 남기고 둘은 서로를 점점 알아간다. 제이콥의 전공은 가구 디자인이고, 글 쓰기를 좋아하는 애나는 저널리스트가 되고 싶어 한다. 영국에서 온 애나는 위스키를 좋아한다. 많은 연인이 그렇듯이 제이콥은 술을 그닥 좋아하지 않지만 애나를 따라 위스키를 점점 마시게 된다. 둘은 대학 CC가 되어 행복한 1년을 보낸다. 제이콥은 애나에게 자신이 처음 만든 의자를 선물한다. 이 의자에는 이 영화의 제목 ‘like crazy’가 새겨져 있다.


물론 어느 연애나 그렇듯이 시련이 닥쳐온다. 이제 졸업할 때가 다가오는 애나는 미국 시민권이 없기 때문에 학생 비자가 없기 때문에 졸업 이후에 영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떠나야 하는 시기가 오자 제이콥은 애나에게 ‘patience’(인내)가 새겨진 팔찌를 선물해준다. 그러나 학생 비자 때문에 떠나야 하는 날, 애나는 영국에 곧바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다. 결국 애나는 제이콥의 집에서 몇 달의 여름을 보내고 친척의 결혼식에 참가하기 위해 비로소 영국에 돌아간다.


이때만 해도 이 둘은 몰랐을 거다. 이 둘의 ‘like crazy’와 같은 사랑이 어떻게 변해갈지.


미적지근해


얼마 지나지 않아 애나가 다시 미국으로 오고, 제이콥은 꽃다발을 산 채 LA 공항에서 애나를 기다린다. 그러나 며칠도 아니고 몇 달을 비자 만료된 상태로 미국에서 보낸 애나는 공항을 통과할 수 없다. 그렇게 제이콥과 애나는 공항에서 만나지도 못한 채 생이별을 한다.


애나의 비자 문제가 계속 해결되지 않자, 둘은 결국 친구 사이로 지내기로 한다. 애나는 원하던 대로 런던의 잡지사에 취직하였고 제이콥은 LA에서 가구를 만든다. 제이콥은 같은 사무소에서 일하는 샘과 어울리게 된다. 겉으로는 서로 끝났다고 이야기하지만, 서로 그리워하면서 연락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다가 제이콥이 다시 애나를 보러 영국으로 가기도 한다. 그러나 애나를 보러 영국으로 가도 현실은 녹록지 않다. 애나의 부모님은 제이콥을 반가워하지만, 제이콥은 영국으로 오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애나의 지인들과 만나도 제이콥은 어우러지지 않고, 애나의 옆 집 남자가 여전히 거슬린다. 애나가 떨어져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을 만나도 괜찮다고 하자 제이콥은 폭발한다. 제이콥은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다.


그 후 제이콥은 샘과 정식으로 사귀고 애나의 연락을 무시한다. 반면 애나에게는 여전히 헤어진 제이콥이 뮤즈다. 제이콥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글을 애나의 상사가 읽으면서 공감하고, 애나는 부편집장으로 승진한다. 애나는 제이콥에게 다시 말한다. 너와 느낀 감정을 다른 누구와도 나눌 수 없을 것 같다고.


결국 둘은 영국에서 결혼한다. 제이콥은 직장 때문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지만, 공항에서 애나는 제이콥과 헤어진 자리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못한다.

다시 돌아


영국의 두 사람.jpg


그러나 애나의 비자 문제는 계속 둘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제이콥은 영국에서 살 생각이 없다. 헤어지고 나서도 제이콥과 샘은 친구 혹은 직장 동료 사이로 지내고, 서운해진 사이에서 제이콥은 애나에게 옆집 남자와 잤냐고 물어본다.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갈라진다. 제이콥은 다시 샘과, 애나는 옆집 남자 사이먼과 사귄다. 그리고 애나의 patience 팔찌도 이때 끊어지고 만다. 이때 주목할 점은 제이콥과 사이먼의 차이다. 제이콥은 술을 잘 하지 못함에도 애나의 위스키 취향에 맞추어 주었다. 사이먼은 그러지 않는다. 제이콥은 애나에게 직접 like crazy가 쓰여 있는 의자를 만들어주고 선물했지만, 사이먼은 말끔한 하얀색 가죽 의자를 애나에게 선물한다. 제이콥이 소심하지만 애나에게 맞춰주는 사람이었다면, 사이먼은 밀어붙이는 타입이다. 애나는 결국 사이먼에게 밀려 위스키를 예전처럼 마시지 않는다. 애나의 부모님은 위스키를 권장해도 마시지 않는 사이먼을 맘에 들어하지 않는다(무의식적으로 제이콥과 비교하고 있을지도). 그러나 사이먼은 신경도 쓰지 않는지, 애나와 애나의 부모님 앞에서 “애나는 딱 나와 꼭 맞는 퍼즐 같다”며 대뜸 프로포즈를 한다. 결국 애나는 사이먼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제이콥 옆에 오랫동안 머물렀던 샘도 사무실을 떠난다. 이때 제니퍼 로랜스의 연기가 압권.


그리고 때마침, 기적과 같이 애나의 미국 비자 제한이 풀린다. 사건을 담당하던 애나의 부모님 친구 변호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제이콥도 곧 보자”며 말을 잇는다. 이제 애나와 제이콥의 중요한 방해물은 사라졌다. 두 사람이 원하기만 한다면, 먼 길을 돌았지만 이어질 수 있다. 원하기만 한다면.


우린 씻겨 내려가듯 없어


그리고 우리의 예상과 같이 애나는 다시 LA로 간다. 보통 영화 같으면 두 사람은 이제 뜨거운 재회를 해야 한다. 영화 <노트북>처럼. 이번에도 제이콥은 꽃다발을 든 채 애나를 기다린다. 돌고 돌아 애나가 LA에 왔건만, 몇 년 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제이콥과 애나는 서로 보고도 뛰어가지 않는다. 그저 다가와서 미적지근하게 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곧 찾을 수 있다.


자신의 공간으로 들어온 애나에게 제이콥은 예전과 같이 위스키를 권한다. 그다지 많이 마시지 않은 위스키지만 적어도 제이콥은 애나에게 위스키를 권해줄 정도로 즐길 수는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애나는 위스키를 많이 마시지 않는다. 애나는 사이먼을 만나면서 ‘건강에 좋지 않아서’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현재의 애나는 제이콥이 기억하던 애나가 아닌 것이다. 둘은 붙어만 있어도 기뻐하고 누구보다도 서로를 잘 알던 서로가 아니다. 런던에서는 어엿한 잡지의 부편집장이었던 애나는 LA에서 변변한 직장을 구할 수 없다. 두 사람의 사이를 가로막는 모든 조건들이 사라졌다고 믿는 순간, 다른 장애물이 생겨나고 사랑은 시간과 공간 속에 식어버렸다.


두 사람은 서로 어색해하다가 애나가 같이 샤워를 하자고 제안한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물을 맞으며 샤워하던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는다. 그리고 뜨겁게 사랑하던 옛날을 추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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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여러 가지로 갈릴 수 있는 결말이다. 누군가는 해피 엔딩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열린 결말이라고 말한다. 개인적으로는 무진장 새드 엔딩이라고 말하고 싶다. 아마 이 샤워가 끝난 후, 애나는 모두의 생각을 뒤엎고 런던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마주하는 두 사람이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 과거의 추억을 떠올린다는 것은, 사랑의 절정이 끝나버렸다는 증거니까.


3년간의 국제 연애를 막 끝낸 친구가 그랬다. 자긴 국제 롱디라서 헤어진 게 아니라고.

그게 이유였다면 진작에 헤어졌을 거라고.

어느 순간 자신과 상대방이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게 느껴졌고,

더 이상 서로 맞춰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헤어졌다고.



Ps 1. 런던과 LA를 생각나게 하는 영화는 언제나 옳다.

Ps 2. 이런 말하기 싫지만, 애나의 아버지 말대로 애나가 비자 만료일을 지켜서 영국으로 돌아갔다면 둘은 계속 like crazy였을까? 서로의 시간과 공간에 맞춰줄 수 있었을까?

Ps 3. 인상적이었던 감상평 중 하나. “나는 이 영화의 사랑보다는 이터널 선샤인의 사랑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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