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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정까지 몰아닥치는 폭력

<디트로이트>: 평화로운 투쟁은 없다

by 유녕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본 영화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실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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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실화 기반 혹은 다큐멘터리 영화들로 글 쓰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쓰기가 힘들다. 픽션에 메타포를 쓰는 영화들은 상징 몇 개 잡아내서 쓰면 금방이다. 실화, 다큐멘터리 식의 영화들은 이런 장치가 없다. 맥락을 하나하나 다 풀어서 글을 써야 하고, 그래서 글을 간결하게 쓰기가 힘들다. 덕분에 <12 솔져스> 글 쓸 때 힘들었다.


그런데도 <디트로이트>를 왜 보았냐 물어본다면, <허트 로커>(2008)와 <제로 다크 시티>(2012)를 연출한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이라는 점이 한몫했다. 그러나 그 캐서린 비글로우가 1967년 디트로이트 사건(‘riot’에서 ‘폭동’으로 많이들 번역하던데 적절한 번역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사건’으로 표기한다)을 어떻게 해석했을지가 더 궁금했다. 캐서린 비글로우 특유의 냉철함이 인종문제에서 어떻게 발현되었을까.


친절한 다큐멘터리


<디트로이트>는 1967년 디트로이트에서 한참 흑인들의 시위가 벌어지고 있을 때 일어난 알제 모텔 사건을 다룬 영화이다. 그런데 도입부가 좀 특이하다. 주로 이런 다큐멘터리, 실화 기반 식의 영화들은 배경 설명으로 시간을 크게 잡아먹지 않는다. 마틴 루터 킹의 셀마 행진을 다룬 <셀마>나 2월에 리뷰를 쓴 <12 솔져스>가 그런 영화에 속한다. 심지어 <히든 피겨스>도 배경을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


<디트로이트>는 다르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알제 모텔 사건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다. 어떻게 아프리카에 살던 흑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으로 오게 되었는지, 노예로 살던 흑인들이 어떻게 남북전쟁을 통해서 해방되었는지, 해방 이후에도 얼마나 미국 사회에서 오랫동안 차별을 당했는지 등등 미국의 흑인 투쟁 역사를 애니메이션으로 설명하는 것이 이 영화의 시작이다. 그러고 나서도 1967년 디트로이트 흑인 시위가 어떻게 일어나고 정치적으로 전개되었는지, 알제 모텔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이 그에 어떻게 대응했는지까지 보여주고 나서야 알제 모텔 사건이 전개된다. 아, 나쁘다는 소리는 아니다. 오히려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절하고 좋은 전개 방식이다. 다만 좀 의아했을 뿐이다. 왜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설명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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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짐작해보자면, 이 영화의 감독 캐서린 비글로우 자신이 백인이라서 그렇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대표작 <허트 로커>와 <제로 다운 시티>는 현실적이고 시니컬하기는 해도 미국식 전쟁 영화에 가깝다. 인종 문제를 직접 다루는 영화는 처음 제작한 것이다. 더군다나 본인의 사회적 정체성이 ‘흑인’도 아니다. 이러한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을 때 당연히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을까. 본인도 영화를 제작하면서 디트로이트 사건을 비롯해 흑인 인권 운동에 대해서 많이 사전조사를 했을 것이다(실제로 많이 조사한 티가 나는 영화다). 그러면서 본인이 잘 모르는 흑인 인권 운동의 면모들을 알게 되고, 이러한 지식을 밑바탕으로 깔아놓고 영화를 진행하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신선하면서도, 미국의 사회적 맥락을 모르는 군중들을 배려한 도입부였다고 생각한다.


다 같지는 않아


<디트로이트> 자체는 1967년 알제 모텔 사건에 대한 영화이지만, 생각보다는 각 캐릭터의 개성이 확고하게 잡은 영화다. 흑인 캐릭터라고 해서 다 사회적 위치나 견해가 같지 않고, 백인 캐릭터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사건 자체가 워낙 충격적이고 이 영화의 연출 역시 폭력을 숨기지 않는 편이지만, 그 와중에 각 캐릭터의 개성을 강조하고 문제의식을 강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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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흑인 주연 캐릭터로는 경비인 멜빈 디스무케스(존 보예가 역), 베트남 전쟁에서 갓 퇴역한 군인 그린(안소니 마키 역), 보컬 그룹 드라마틱스의 멤버 래리 리드(알지 스미스 역), 그리고 프레드 템플이 있다. 흥미롭게도 주연 캐릭터들 모두가 1967년 흑인 시위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디스무케스는 흑인들의 사회적 지위를 분명히 인지하지만 당장 자신의 생계, 동료 흑인의 목숨, 그리고 평화를 위해서 백인 경찰에게 커피를 준다. 래리는 꿈에 그리던 극장 공연이 시위 때문에 무산되자, 아무도 없는 극장에서 준비한 노래를 부르며 아쉬워한다. 버스를 타다가 시위로 집에 갈 수 없게 된 래리는 친구와 함께 알제 모텔로 들어간다. 사건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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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경찰 캐릭터들에 대한 소개도 차근차근 이루어진다. 알제 모텔 사건의 주범이었던 필립 크라우스(윌 폴터 역)는 알제 모텔 사건 이전부터 폭력성을 보인다. 단순히 마트에서 음식을 훔치던 흑인에게 총을 쏘는 행위는 경찰이라도 함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경찰서에 와서 상사가 경고를 해도 크라우스는 오히려 그를 설득하려고 한다. 그리고 크라우스의 치밀함과 폭력성은 알제 모텔에서 흑인들을 심문할 때 진가를 발한다. 크라우스와 같이 다니는 경찰 플린(벤 오툴) 역시 크라우스와 같이 심문을 진행하지만, 그는 조력자에 가깝다.


알제 모텔에서 머문 지 오래되지 않은 젊은 백인 여성 둘, 줄리 앤(한나 머레이 역)과 캐런(케이틀린 디버 역)은 그곳에서 만난 흑인들에게 디트로이트 시위의 원인을 물어본다. 이 말을 듣던 칼 쿠퍼는 다른 사람에게 총을 겨누며 “흑인으로 산다는 건, 항상 머리에 총구가 겨눠진 채 사는 것과 똑같다”며 경찰의 유도 신문을 흉내 낸다. 다행히 그 총은 가짜 총이었지만, 칼 쿠퍼는 총소리를 내며 경찰을 도발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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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심문하기 위해 온 크라우스와 플린은 각 방에서 한 명씩 심문을 하고, 가짜로 누군가를 죽이는 시늉을 한다. 이때 그들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경비인 디스무케스 밖에 없다. 베트남 전쟁에서 우수한 군인으로서 전역한 그린이 전역증을 보여줘도 크라우스와 플린은 쉽게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크라우스와 플린은 누군가를 심문하고 죽일 때조차 심문자들의 신분을 의식한다. 그린도 베트남 전쟁 전역자였기에 총을 맞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다. 지나치게 정직했던 경찰 데멘스(잭 레이너 역)은 크라우스와 플린이 심문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음을 모르고 심문자를 실제로 죽여버리고 만다. 크라우스가 심문자들에게 죽기 전에 찬송가나 부르라고 소리지르자, 래리는 열심히 찬송가를 부른다. 반면, 크라우스와 플린 몰래 흑인 심문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연방군이었다.


폭력을 하나도 소거하지 않은 영화에서 온갖 삼라만상이 보인다.


당신들은 왜 ‘창녀’에게 알랑거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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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캐서린 비글로우가 여성 감독이라는 점이 드러나는 포인트가 있다. 바로 백인 경찰들이 알제 모텔에 머무르던 젊은 백인 여성, 줄리 앤과 캐런을 대하는 태도다. 크라우스와 플린은 알제 모텔에 들어오자마자 줄리와 캐런이 왜 여기에 있는지 묻는다. 이때 둘은 그린과 같은 방에 있었는데, 크라우스와 플린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줄리와 캐런이 그린과 ‘놀아났다’고 전제한다. 백인 경찰들이 그들에게 보이는 태도는 미묘하다. 크라우스는 차가운 총으로 그들을 성희롱하고 플린은 줄리의 옷을 총으로 찢어버린다. 반면 주위에 흑인 심문자가 없고 줄리와 앤만 있을 때, 크라우스와 플린은 어색하게 웃기도 한다. 정작 줄리가 자신의 아버지가 판사라고 이야기할 때는 거짓말하지 말라고 한다.


언뜻 보면 모순적이지만, 크라우스와 플린의 태도는 사실 낯설지 않다. 오히려 익숙하다. 예전에는 한국 사회가 ‘양공주’를 대하던 태도, 지금은 ‘외국 남자와 사귀는 한국 여자’를 대하는 태도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 그들은 줄리와 캐런이 같은 백인이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대하는 동시에, 백인 ‘여성’을 소유물로 대하기 때문에 흑인 남성들과 같이 있으면 안 된다고 선을 긋는다. 이러한 태도는 줄리와 캐런이 조금이라도 방황하면, 흑인 남성과 같이 있다는 이유로 ‘더럽혀졌다’며 그들을 ‘창녀(hoe)’라 부르는 폭력으로 변한다. 그들은 백인 여성이었기에 죽지 않고 먼저 풀려났지만, 이 영화에서 그들이 당한 폭력은 흑인 심문자들이 당한 폭력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같은 인종이라고 해도 여성은 ‘성녀’ 혹은 ‘창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즉, 인종의 소유물로 밖에 취급되지 않는다.


우리는 얼마나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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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과 같은 밤을 보낸 심문자들 중 3명은 죽고, 나머지 생존자들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아침이 밝아오자 데멘스와 플린은 순순히 자백을 하고, 크라우스의 상사는 그에게 “You racist fuck!”이라고 쌍욕을 한다. 그러나 알제 모텔 사건은 피해자들에게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는다. 변호사들은 처음에 디스무케스를 용의자로 몰아가고, 백인 남성 판사와 100% 백인으로 구성된 배심원은 백인 경찰들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이때 주목해야 할 것은 디스무케스와 래리 리스의 변화다. 둘 다 나름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던 인물들이다. 디스무케스는 생계 상의 중립, 래리 리스는 사회에 대한 무관심이었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긴 하다. 그러나 디스무케스는 무죄 선고가 나온 법정을 나와 구토를 하고, 래리는 드라마틱스 활동에 참여하지 못한다. 그 끔찍한 사건에서 살아남은 래리는, 더 이상 백인 앞에서 노래하지 못한다. 누군가는 나약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약자의 입장에서 평화로운 투쟁은 없다. 비폭력 투쟁마저 더 강하고 조직적인 폭력을 견뎌야 한다. 그렇기에 모두에게 끝까지 투쟁하라고 강요할 수도 없다. 인간은 강한 동시에 나약한 존재니까.


생활고에 시달리던 래리 리스가 흑인 교회 성가대에 찾아가 노래를 부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끝난다(실제로 래리 리스는 지금까지 흑인 교회 성가대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찬양가를 부르는 래리의 엔딩 씬은 강렬하다.


누군가는 <디트로이트>를 보면서 1967년 미국은 참으로 야만적이었다고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이때의 미국 사회를 함부로 비웃을 자격은 없다. 오늘 인터넷 포털 사이트 상위 검색어에 페미니즘 단체 불꽃 페미 액션이 떴다. 불꽃 페미 액션의 상의탈의 시위로 인해 생긴 일이다. 이 시위에 대한 반응을 여기서 일일이 적지는 않겠다. 대부분은 그 시위의 의중이 무엇인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시위자들의 외모 평가를 재생산하고 있었다. 한국사회는 <디트로이트> 속 사회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다른 점이라면 총기가 흔하지 않은 사회라는 점 정도? 우리가 사는 사회는 <디트로이트> 속 사회만큼이나 사회적 약자에 대해 무지하고 악랄하다. <디트로이트>는 최근 영화 트렌드와는 다르게, 현실 속에 존재하는 폭력을 단 하나도 은유로 풀지 않고 불편할 정도로 절정까지 끌어올려 표현했다. 이는 곧 <디트로이트>가 가지고 있는 힘이다. 그렇게 이 영화는 끝까지 물어본다. 어떻게 지옥 속에 있는 사회적 약자의 투쟁이 평화로울 수 있냐고.


PS. 드라마틱스(The Dramatics)는 실제로 미국의 1960-70년대를 호령한 흑인 보컬 그룹이었다. 지금도 유튜브에 가면 그들의 영상이 남아 있다. <디트로이트>를 보고 나서 드라마틱스의 <Watcha See is Whatcha Get> 영상을 본다면 상당히 복잡 미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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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8krq5V1C03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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