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끝나지 않았다>: 담담하고도 충격적인 가정폭력 보고서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미리 본 영화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평범한 지옥의 반복
전주 국제영화제에서 극찬을 받은 영화라고 들은 지라, 기대가 컸다. 그 극찬에 비해서는 영화에 대한 정보가 그닥 많지가 않아서 사전 정보가 별로 없는 채로 영화를 봤다. 한국판 포스터에는 오늘도 여러 비평을 실어 놓았는데, 이런 포스터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맞는 평들이다. 같이 보러 간 지인이 “이 영화는 적어도 한국 상업영화에서는 나올 수 없다”라고 평했는데, 이 말도 맞다. 굉장히 사실적이고도 긴장감 있게 가정폭력을 묘사한 르포와 같은 영화다. 11살 소년 줄리앙(토마 지오리아 역)의 입장에서 가정폭력은 남의 일이 아니다. 그저 믿기 싫은 일상일 뿐이다.
이 영화는 한 가정에 대한 롱테이크 씬으로 시작한다. 한때 부부였던 미리암 베송(레아 드루케 역)과 앙투안 베송(드니 메노셰 역)은 이미 이혼했으나,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아들 줄리앙의 양육권을 가지고 소송을 한다. 흥미로운 점은 미리암의 변호사와 앙투안의 변호사, 그리고 판사까지 모두 여성 법조인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미리암이 양육권을 가지고 가정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 앙투안을 분리해야 한다고 하는 것도 여성 변호인이고, 반면 앙투안이 직장에서 훌륭한 동료로 평가받는다는 시답잖은 레퍼토리를 반복하는 것도 여성 변호인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중립적이지만 묘하게 미리암에게 책임을 묻는 판사 역시 여성이다. 미리암의 변호사는 미리암이 이길 확률이 높다고 이야기했지만, 승리는 앙투안에게 돌아간다. 미리암은 전 남편의 집착 때문에 현재 직장이 없는 상태고, 판사는 줄리앙에게 여전히 ‘아버지’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정작 줄리앙이 앙투안을 ‘아버지’가 아닌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주말마다 앙투안이 줄리앙과 시간을 보낼 권리가 있다는 판결에 앙투안은 주말마다 줄리앙을 찾아온다.
평범한 지옥은 다시 반복된다.
악마는 없다
앙투안은 실제로 가정폭력범이다. 그러나 그는 악마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악마와 같은 모습이 있지만, 그도 분명히 인간적인 면모가 있다. 줄리앙은 앙투안을 무서워하지만, 분명히 앙투안은 아버지로서 줄리앙과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나 방식이 문제다. 그는 줄리앙의 누나 조세핀(마틸드 오느뵈 역)의 생일 파티를 미끼로 줄리앙을 조종하려고 한다. 앙투안은 줄리앙을 데리러 미리암의 친정으로 오지만, 미리암이 다른 거처가 있다고 의심하고 줄리앙에게서 정보를 캐내고 결국 그들의 거처를 알아낸다. 그는 부모 앞에서조차 분노를 잘 조절하지 못하며, 미리암과 조세핀 주변의 남자들을 참지 못한다. 그래서 조세핀의 남자친구 사뮤엘(마튜 사이클리 역)도 견디지 못하고, 미리암의 직장동료 시릴이 조세핀의 생일파티에 오는 것에도 분노한다. 앙투안이 시릴을 보자마자 미리암에게 “저 새끼랑 잤어?”라 말하며 목을 조른다. 그러다가도 시릴이 가버리자 미리암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운다.
가정폭력범이라고 해서 항상 폭력적이지는 않다. 한순간이나마 반성하기도 하고 가족에 대한 애정도 없지는 않다. 이 영화가 앙투안에 대해서 촘촘하게, 조금이나마 인간적으로 묘사하는 부분은 중요하다. 이는 곧 가정폭력범을 악마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점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콘텐츠 속에서 가정폭력범을 악마화하고, 권선징악형으로 무자비하게 밟아버리거나 나중에 화해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카타르시스나 대리만족은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많은 한국 콘텐츠 속에서 가정폭력범은 악마화되고 타자화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좋은 영화인 이유 중 하나는, 그런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가정폭력범은 단순한 악마가 아니고, 악마는 우리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사실 앙투안에 대한 묘사보다는,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나머지 인물들의 묘사가 더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는 미리암과 조세핀, 그리고 줄리앙의 일상을 덤덤히 그린다. 줄리앙과 조세핀이 집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조세핀은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되었지만 여전히 남자친구 사뮤엘과 애절하게 만난다. 조세핀은 남자친구 때문에 음악 학원을 빠질 수 있는 평범한 여자 학생이다.
물론 앙투안 때문에 일상에는 조금씩 균열이 간다. 줄리앙은 앙투안이 미리암의 아파트를 물어볼 때, 다른 아파트로 간 다음에 도망을 간다. 이 씬은 긴장감이 꽤나 높아지는 씬인데, 곧바로 긴장감이 식어버리고 만다. 하다못해 줄리앙이 중고등학생이었다면 도망하는 게 좀 쉬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줄리앙은 이제 겨우 11살 되는 소년이기에 앙투안은 쫓아가다가 멈춘다. 그는 줄리앙이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고 있다. 다음 씬은 두 사람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씬이다.
가장 인상 깊은 씬은 조세핀의 생일 파티였다. 조세핀은 사뮤엘과 밴드와 함께 노래를 부른다. 그러나 어두운 파티장에서 조세핀은 불안에 떤다. 갑자기 줄리앙이 보이지 않자 시작되는 불안감은, 어머니 미리암이 보이지 않자 더욱 증폭된다. 아니나 다를까, 앙투안이 미리암의 생일 선물 핑계를 대며 찾아온다. 파티장에서 줄리앙과 미리암이 보이지 않자, 미리암은 노래를 부르면서도 표정이 굳고 눈물을 머금는다. 조세핀이 불안해하는 것을 남자친구 사뮤엘조차도 눈치채지 못한다. 결국 줄리앙과 미리암이 파티장으로 돌아오자 진정이 되지만, 조세핀은 충격을 간직한 채로 사뮤엘과 파티장 정리를 마저 한다.
가정 폭력, 성폭력 등의 피해자들은 사건 이후로 아무것도 못할 것이라는 편견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에게 가정폭력을 일상에 녹아 있다. 그래서 그들은 가해자에게 웃어줘야 할 때도 있으며 타협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피해자들이 살기 위해서 타협을 할 때, 사회는 충분히 피해자스럽지 않다면서 비난한다. 그러나 가정폭력 피해자는 피해자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도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연애를 한다고 해서, 학교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서, 그들이 가정폭력 피해자라는 사실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가정폭력이라는 단상만으로 누군가를 함부로 규정할 수는 없다.
“보호되기까지”
이 영화의 프랑스어 제목은 “Jusqu'a La Garde”, 영어 제목은 “Custody”이다. 둘 다 “양육권”이라는 뜻이며, 프랑스어 제목은 직역하면 “보호되기까지”라고 해석된다(짧은 프랑스어 실력으로 직역한 것이니 혹시 틀렸다면 말씀해주셔도 된다). 줄리앙과 그의 가족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서야 앙투안에게서 해방된다. 조세핀의 파티가 끝난 다음 날 새벽, 앙투안은 자신의 사냥용 총을 들고 미리암의 아파트에 쳐들어온다. 총소리를 들은 미리암은 경찰에게 전화를 하고, 미리암과 줄리앙은 정신없이 전화를 하면서 화장실로 숨어 들어간다. 다행히 앞집 할머니가 미리 경찰에 신고를 했고, 화장실 안에서 막을 수 있는 가구가 있었기에 구조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극도로 떨리는 목소리로 차츰차츰 말하는 미리암과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게 말하는 경찰의 괴리는 나만 느낀 것이 아니었을 테다.
미리암과 줄리앙은 비로소 앙투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초에 판사가 앙투안에게 그들의 삶에 더 끼어들지 말라고 판결을 내렸더라면, 그들의 삶은 더 평화로워졌을 것이다. 앙투안이 총을 들고 그들의 목숨을 위협할 때가 되어서야 그들은 경찰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이때 그들을 도운 사람은 앞집의 혼자 사는 할머니였다.
이 영화의 마지막 씬은 미리암과 줄리앙을 지그시 보는 앞집 할머니의 시선으로 끝난다. 이때 줄리앙의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줄리앙은 이제 보호를 받을 수 있지만, 유년 시절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할머니의 문이 닫힌 후, 미리암과 조세핀과 줄리앙은 어떻게 되었을까. 프랑스니까 앙투안이 감옥에서 오래오래 썩었을 확률이 높다. 한국은 아직 그럴 수 없을 거다. 오늘도 친딸을 성폭행한 아버지가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는 뉴스를 보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