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스토리>: 휘몰아치는 감정의 폭풍
※ 브런치 무비패스로 미리 본 영화입니다.
※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의 뚝심에 경의를!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시사회를 많이 가는 데도 이렇게까지 울림이 큰 영화는 아주 오랜만이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울었고, 러닝타임 2시간 동안 감정의 폭풍 속에서 온 몸을 두들겨 맞은 기분이었다. 한 시간 동안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가면서도 정신이 멍했다.
이 영화는 민규동 감독의 대표작 중 하나로 남을 듯싶다. 작년에는 한국 영화계에서 <아이캔 스피크>가 위안부의 현재에 집중했다면, <허스토리>는 위안부 담론이 한국사회에서 막 퍼져나가고 있던 90년대에 여성들이 거둔 작지만 큰 승리에 집중한다. 그리고 <아이캔 스피크>에 비해서도 훨씬 넓게 위안부 담론을 확대했다. 우리들이 잘 알지 못했던 90년대, 부산과 시모노세키 관부 재판의 승리에 대해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면서 감정의 깊이가 얕은 것도 아니다. 김희애,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그동안 한국 영화/드라마에서 단골로 등장했지만 단편적인 연기를 보여줄 수밖에 없었던 중년/노년 여성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하고, 위안부 담론을 넓힌 이 영화의 뚝심에 존경을 표한다.
설치고 떠들고 말하고 생각하는 여성, 문정숙
누가 뭐래도 이 영화의 중심을 이끌어가는 캐릭터는 부산의 성공한 여행사 대표 문정숙(김희애 역)이다. 김희애 씨가 상당히 욕심을 낸 캐릭터라고 들었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캐릭터다. 김희애 씨는 “여배우는 20대만 넘어가도 들어오는 캐릭터들이 뻔하다. 모처럼 입체적인 캐릭터를 만났는데 놓칠 수 없다.”라고 말했다. 문정숙은 소위 ‘여장부’ 캐릭터에 속한다. 부산에서 여행사 대표로서 성공했고, 일에 미쳐 있다는 소리를 듣는 싱글맘이기도 하다. 극 초반에는 위안부 이슈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고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티비에서 나올 때 딸에게 “이런 시대에 태어난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지!”라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집에서 가사도우미 일을 하던 배정길(김해숙 역)이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바뀐다. 여행사 일이 바쁜 문정숙을 대신해 그의 딸을 돌보던 배정길은 위안부 관련 뉴스를 보고는 가사도우미 일을 그만둔다. 그 후에 여행사에 찾아와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는 정길을 보며 문 대표는 관부 재판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영화 안에서는 문정숙이 배정길, 더 나아가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공감하고 감정 이입하게 되는 과정이 자세하게 나오지는 않는다. 이 과정이 좀 더 자세하게 이루어졌다면 좋지 않았을까 아쉬움이 남기는 하지만, 워낙 영화 안에 담아야 할 이슈가 많아서 그랬다고 생각한다.
신문에서 무료 변론을 하는 이상일 변호사(김준한 역)를 본 후에 직접 스카웃하고, 일본어를 능숙하게 하기에 관부 재판에서 통역을 맡는 문 대표는 유능한 여성이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다. 여행사 일과 관부 재판에 바쁜 문정숙은 딸에게 좋은 엄마는 되지 못한다. 때문에 딸은 학교를 자퇴한다고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이때 친구가 사업 좀 줄이고 딸에게 신경 좀 쓰라고 이야기하자 “나는 일할 때 행복해!”라 말하는 문정숙을 보고 누군가는 이기적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때 진정으로 이기적인 것은 문정숙 개인이 아니다. 싱글맘이자 한 회사의 대표인 문정숙은, 위안부 할머니들을 자신이 설득해 수년간 이끌어가는 문정숙은 언제나 “돈이 나를 쫓아다닐 정도”로 부유해야 한다. 지금도 국립유치원이 턱없이 부족한 한국에서, 90년대에 싱글맘 사업인으로 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문정숙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을 개인으로서 했다. 관부 재판과 싱글맘으로서의 책임 모두를.
서울이 아닌 경상권 부산의, 위안부에게 공감하고 주체적이며 자신의 욕망에 솔직한 여성 기업인 캐릭터만으로도 문정숙은 귀하다.
이제야 물을 만난 그들
이 영화에 위안부 주연으로서 등장하는 주연 캐릭터는 총 4명이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는 배정길이지만, 나머지 3명의 위안부 할머니 캐릭터들도 상당히 입체적이다. <아이캔 스피크>가 ‘순결을 잃은 민족의 소녀’가 아닌 ‘현재 우리의 이웃으로 존재하는 할머니’로서 위안부를 보여줬다면, <허스토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박순녀(예수정) 할머니는 기초생활수급자 생계비를 받고 줄담배를 피운다. 서귀순(문숙 역) 할머니는 해산물 시장에서 생선을 팔고, 이옥주(이용녀 역) 할머니는 치매 환자다. 나머지 할머니들은 한번 결혼을 하고 아들이 있는 배정길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위안부 시절의 일본 군가를 같이 부르기도 한다.
이 영화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단순히 입체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완전무결하고 항상 슬퍼 보이는 피해자’가 아니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주연은 아니지만 처음에는 위안부로 시작했다가 포주가 된 할머니가 등장하기도 하고, 배정길은 아들의 출생의 비밀을 숨겼다가 재판에서 곤혹을 치르기도 한다. 그들은 완벽하거나 완전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피해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많은 어머니 캐릭터를 연기했던 김해숙, 주로 조연으로 등장하던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한국 원로 여성 배우들의 활약을 <허스토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감개무량하다. 이런 조합을 위안부 소재의 영화가 아닌 이상 볼 수 없다는 게 여전히 슬프긴 하지만, 그래도 즐길 수 있을 때 즐겨야지. “느네 아새끼들한테 당하고도 이렇게 잘 살아남았어. 나 살아있는 거 무섭지?”라 소리 지르던 박순녀 할머니의 표정은 쉽게 안 잊힐 거다. 그리고 이를 일본어로 통역할 때 문정숙에게서 느껴지는 분노, 이옥자 할머니의 치매 연기…. 그들은 이제야 자신의 연기를 제대로 펼칠 수 있는 장을 만났다. 작년에 <아이캔 스피크>로 인해 나문희 선생님이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듯이, <허스토리>의 여성 배우들도 인정받았으면 한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야
그러나 이 영화를 단순히 위안부 할머니들과 문정숙의 이야기로만 생각하면 곤란하다. 그들이 1992-1998, 6년의 기간, 23번의 재판, 10명의 원고단, 13명의 변호인으로 관부재판을 진행하기까지는 수많은 이들의 지지와 연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할머니들이 부끄럽지 않냐”는 사회의 압박은 현재도 존재하기에 있기에, 90년대 한국이라면 더 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재일교포 이상일 변호사가 그들에게 공감하며 무료 변론을 하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처음에는 거부감을 표시했을지언정 일본의 여성들도 재판장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었다.
인상에 깊게 남은 장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배정길이 문정숙의 딸이 있는 교실로 특강을 왔을 때다. 이때까지 문정숙과 배정길은 딸에게는 사실을 숨겼다. 그러나 배정길 할머니는 교실에 들어오자마자 “이 교실에 들어오니까 메마른 줄 알았던 눈물이 나오네요.”라 말하고, 이에 교실이 있던 학생들이 “할머니 예뻐요.”라 차례차례 말하는 장면은 절로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서귀순과 그를 정신대에 보낸 일본인 초등학교 선생님의 재회다. 일본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사무실에 찾아온 서귀순 할머니의 옛 담임선생님은 처음에 증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서귀순이 증언을 하면서 자신의 몸에 새겨진 칼자국을 드러내고, 이를 본 옛 담임선생이 일어나 증언을 한다. 이때 서귀순은 그를 기꺼이 용서한다. 당시 여성인 담임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지만, 서귀순에게는 그를 용서할 의무가 없었다. 그럼에도 용서했다.
가끔 용서는 분노보다 강하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관부 재판은 완전한 승리로 끝나지는 못했다. 보상금은 판결에서 보장되었지만 일본 정부는 끝내 공식 사과를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는다. 90년대 부산을 지나 수요시위에서 발언하는 문정숙의 딸 씬을 지나, 영화는 문 대표와 할머니들의 기념사진으로 끝난다. 우리는 안다. 관부 재판에서 싸웠던 위안부 할머니들은 이제 세상에 남아 계신 분들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싸움과 삶은 계속된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함부로 낼 수 없던 시절을 지나, 위안부가 ‘순결한 민족의 소녀’였던 시절을 지나, 회상 씬이 없고 스스로의 권리와 존엄을 위해 싸우는 위안부 피해자가 주인공이 되는 영화의 시대가 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그래도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싸우는 이들이 있기에 싸움은 지속되고 역사는 넓어진다. 다시 한번 이 영화에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