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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맹이는 가고 힐링만 남았네

<여중생 A>: 껍데기는 가라

by 유녕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본 영화입니다.
※ 원작 포함해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원작 웹툰 팬의 분노가 남아 있는 글입니다.


총체적 난국



단언컨대 지금까지 시사회로 봤던 영화들 중에 최악이다. 애초에 시사회 신청할 때부터 까려고 신청했지만, 그 명작 웹툰을 원작으로 삼고 이 정도로 못 만들 줄은 생각도 못했다. 10점 만점에 평점 매기라고 하면 망설이지 않고 1점을 주겠다. <여중생 A>는 네이버 웹툰 중에서도 수많은 사회 문제를 ‘여중생 A’의 관점으로 담은 웹툰으로 유명했다. 게임 내 성차별, 인터넷 문화, 정글과도 같은 학교 청소년들의 인간관계, 가정폭력 등 수많은 사회 이슈를 긴 호흡으로 ‘여성 청소년’의 입장으로 풀어내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이 영화가 가장 잘못한 점은, 그 수많은 알맹이를 빼버리고 한국영화 식의 ‘힐링’만 남게 했다는 점이다. 러닝 타임의 문제가 아니다. 이 영화는 무려 114분의 러닝 타임을 자랑한다. 그런데 알맹이는 없고 썰렁한 개그와 힐링만 있으니 시간은 길고 감동도 재미도 없다.


게임 문화와 인터넷 문화를 빼버리면 어쩌냔 말이다



원작 <여중생 A>에서 주인공 장미래를 둘러싸고 큰 축을 이루는 배경은 세 개다. 가정폭력을 일삼는 아버지가 있는 미래의 집과 가정, 작년부터 이상한 소문이 돌아 장미래가 없는 사람 취급당하는 중학교, 그리고 장미래에게 유일한 도피처가 되는 게임 세상 ‘원더링 랜드’. 웹툰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적어도 초반에는 게임 세상을 제외한 집과 학교 등의 현실 세상은 무채색으로 묘사된다는 점이다. 장미래에게 게임 ‘원더링 랜드’는 자신이 가명을 써도 되고, 게임 실력으로 인해 인정을 받고 사회관계를 제대로 형성할 수 있는 공간이다. 장미래는 ‘원더링 랜드’ 안에서는 ‘다크’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사수 캐릭터로 길드 안에서 인정받는다. 물론 이 세상조차 완전하지 않다. 장미래는 ‘다크’가 된 이상 남자인 척을 해야 한다. 장미래는 게임 세상 안에서 ‘여자’라는 티를 내는 순간 게이머로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을 어린 나이에 인지했다. 여성 캐릭터를 선택하는 순간, ‘희나’처럼 길드 안에서 노리개 감이 되어야 한다. 게임계 내 성차별을 여성 청소년의 입장에서 담는 콘텐츠는 적어도 한국 안에서는 정-말 희귀하다.


게임 및 인터넷 문화는 웹툰 <여중생 A>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웹툰 중반에 접어들면 장미래는 ‘원더링 랜드’가 서비스 종료가 되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소설을 올리는 데 집중하고, 의외로 중학교에서 벌어진 일들을 기반으로 한 소설이 엄청난 화제에 오르고 현실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목격한다. 웹소설 등에서 미화되는 일진 문화, 인터넷에서 진행되는 마녀사냥 등이 주제에 오른다. 장미래에게 게임계와 인터넷은 도피처가 되기도 했지만, 후에 가면 자신의 글 솜씨를 드러내고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한 곳이기도 했다. <여중생 A>에 있어서 게임 및 인터넷 문화는 빠질 수 없는 요소다.


영화에서는 이 맥락을 통째로 소거했다. 장미래가 열심히 게임을 하는 장면은 나오지만, 게임 세계는 장미래가 도피하는 장소 정도로만 묘사된다. 게임 세계를 실사화한 것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고, 게임 속 히나가 단순히 미래에게 있어서 게임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었던 캐릭터가 되는 설정은 너무 원작과 다를뿐더러 의미도 없다.


딱딱하게 박제되어버린 캐릭터들



그렇다고 해서 원작 속 중학교 세계를 잘 재현했느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원작 속에서는 중학생들의 다양한 캐릭터와 상황을 묘사하던 원작과는 달리, 캐릭터들도 평면화되고 김환희를 제외하면 중학생 역을 맡은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까지 합쳐져 지루할 뿐이다. 가장 실망한 캐릭터는 단연 이백합이다. 이백합은 원작에서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다. 부잣집 외동딸로 자라났지만 장미래의 글을 동경하고, 장미래와는 서로 성장하게 만드는 관계이기도 하다. 이백합이 “아빠가 서울대 가면 글 쓸 수 있게 해준다고 했어”라 말하자, 가정폭력을 휘두르고 무관심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난 장미래는 이해하지 못한다. ‘글이 부모에게 허락을 맡고 써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 애초에 둘의 생각이 다르다. 그래서 이백합은 악의는 없지만 장미래와 성장배경에서 차이가 나는 캐릭터고, 장미래는 이백합의 글에서 구체성이 없다고 판단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백합은 그동안 살면서 안 되는 게 별로 없었던 캐릭터고, 실패한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이기에 글이 평면적으로 나온다. 그랬던 이백합이 장미래를 만나면서 시야를 넓히고, 에필로그에 들어서는 외고 졸업 후 명문대 입학을 거부하고 문창과로 진학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백합은 장미래의 글을 좋아하다가 소설을 베끼고, 장미래의 첫사랑인 오태양을 뺏어가는 캐릭터로 축약된다.



이백합뿐만이 아니다. 원작에서는 장미래의 어려운 가정 형편을 알고도 남몰래 배려하고,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느끼던 장미래에게 “넌 분명 멋진 어른이 될 거야. 지금까지도 잘 해왔잖니.”라 말하던 담임선생님은, 자신이 키우는 난에 집착하고 아이들에게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꼰대’로 변환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꼰대’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도 아니다. 미래에게 첫 친구가 되었던 오태양은, 원작 말미에 가면 자존감이 낮고 친구가 없는 아이들에게만 접근했던 사실이 드러난다. 원작에는 이마저도 없고 까불이 재민도 일진 무리 안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했던 과정이 빠졌다. 다 담아내지 못하는 건 영화, 또는 러닝타임의 문제지만 캐릭터의 입체성을 살리지 못하는 건 영화 역량의 문제다.


겉모습만 현재희



여중생 A 속 많은 캐릭터들 중 가장 변형되고 억울한 캐릭터는 현재희가 아닐까. 원작에서 현재희는 왕따 피해자가 되어 고등학교를 자퇴한 인물이고, ‘원더링 랜드’ 속 히나가 되어 소위 ‘넷카마’로 장미래를 처음 만난 캐릭터다. 학교 밖 청소년이기도 한 동시에 장미래와 같이 ‘정상가족’의 범주 밖에서 살고 있는 인물이지만, 마냥 어두운 캐릭터는 아니다. 왕따의 경험으로 인해서 마냥 밝지만 속으로는 남의 눈치를 너무 많이 본다. 그러나 장미래를 처음 홍대에 데려가고, ‘스파게티’와 ‘피자’의 세상을 알려주는 인물이다. 장미래는 스스로 글을 잘 쓰고 예민한 사람이지만, 워낙 어릴 때부터 가난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물질에 있어서 ‘취향’을 가질 줄 몰랐다. 이백합이 장미래에게 큰 집과 부유한 가정의 환경을 알려준 인물이라면, 현재희는 장미래에게 취향을 가르쳐준다. 더불어 현재희의 누나는 장미래에게 있어 존경하는 작가이자, 장미래가 작가로 성장할 수 있게 가이드하는 인물이다.


현재희가 왕따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가 되고, 현재희를 학교 밖 청소년에서 알바하는 20대 청년으로 바꾸었다는 점 역시 이 영화가 잘못한 점이다. 일단 원작의 관계보다 훨씬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원작에서도 현재희와 장미래가 놀이동산을 가는 장면은 있지만, 현재희가 성인이고 장미래가 학생으로 등장하는 영화에서는 둘의 관계가 아슬아슬하게 보인다. 현재희가 교복을 입고 이태양을 따라하는 장면은 더더욱 위험하다. 나는 중고등학생 때부터 연애를 많이 했던 친구의 일화를 기억한다. 자신이 중고등학생이었을 때 접근했던 남자 어른들이 지금도 용서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대부분 군인 신분이었던 어른들이 한번 제대하고 나면 자신을 뻥 차 버리곤 했다고. 지금 생각하면 징그럽기 짝이 없다고. 여기서 등장한 현재희와 장미래는 대놓고 로맨스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로맨스적 뉘앙스가 분명히 있고, 그럴 바에는 그냥 현재희가 학교 밖 청소년으로 나왔어야지. 앞서 말했다시피 원작 웹툰은 그동안 한국 콘텐츠에서 자주 등장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다루었다. 반면, 영화는 게임 문화, 인터넷 문화, 학교 밖 청소년, 청소년들의 연애 문화 등 예민한 논점들을 다 빼버리고 안전하게 가려는 게 티가 난다. 그럴 거면 애초에 왜 원작을 차용했는지 이해가 안 되네. 도대체 왜???


이 장미래는 성장하지 않았다



그나마 영화를 끝까지 멱살 잡고 가는 건 김환희의 연기다. 그러나 원작과는 달리 영화 속 장미래는 성장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 원작 속 장미래는 이백합을 시작으로 하여 다시 친구를 사귈 수 있었고, 게임 속 세상에서 벗어나 현실 세계에서도 생동감을 다시 찾기 시작했으며, 자신의 글을 발전시켜 작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가정폭력을 휘두르던 아버지가 어느 날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고, 출판사에서 장미래에게 먼저 연락을 하면서 전개가 쉽게 쉽게 가는 느낌이 있긴 하다. 그러나 에필로그에서 현재희와 관계를 맺고 작가로 성장한 장미래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 그만큼 장미래의 성장이 너무 절실하고 힘들면서도 감동적이었거든. 그러나 영화 속 장미래는 성장하지 않았다. 이백합과의 화해도 얼렁뚱땅 넘어갔고, 현재희와의 재회도 예고되지만 이 장미래가 성장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마도 친구들과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 정도?


알맹이를 하나, 둘만 남겨놓고 영화화했어도 이 정도로 빈 영화가 나오지는 않았을 거다. 알맹이는 없고 조그마한 아재 개그와 어설픈 힐링만 남았네. 말 그대로 ‘한국 영화화’ 되었다. 그나마 시사회로 봐서 다행이지, 내 돈 주고 봤으면 아까웠을 거다. 원작 팬이라면 더더욱 안 보는 걸 추천한다. 허스토리 보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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