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산>: 21세기 한국의 오이디푸스, 래퍼가 되다
※ 브런치 무비패스로 미리 본 영화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준익, 현대의 청춘으로 돌아오다
2015년에는 <동주>, 2016년에는 <박열>로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을 그리던 이준익 감독이 2018년에는 21세기 한국사회의 래퍼를 주인공으로 한 <변산>으로 돌아왔다. 처음에 주인공이 래퍼라는 소리를 들었을 때는 걱정이 많았다. 한국 힙합 특유의 awkwardness도 있는데, 하물며 이를 영화 소재로 <쇼미더머니>와 지방 사회와 래퍼라니…. 괜찮을까. 이준익 감독의 능력은 믿어 의심치 않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포스터에서 <동주>, <박열>과 함께 청춘 3부작임을 강조하는 점이나, 영화 속의 대사들을 보며 ‘어설픈 청춘 영화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영화를 보고 난 소감은 이랬다. 이준익 감독이 어설픈 청춘영화를 만들 거라는 생각은 기우였다. 굉장히 한국적이고 이준익스럽고 독특하다. 분명 잘 만든 영화다. 생각보다 <쇼미더머니>와 한국 힙합을 굉장히 이해를 잘했고(=사전조사를 많이 한 티가 나고), 웃기고, 잘못하면 뻔한 이야기를 여러 요소를 버무려서 독특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호불호는 확실하게 갈릴 것 같다. 현대의 청춘을 웃프게 재현하고 공감 가는 캐릭터를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모두가 공감할 것 같진 않거든.
영화로 스며든 <쇼미더머니>식 힙합
<변산>이 음악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OST가 없다는 이유로, 랩 문화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는 비평을 보았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오히려 이준익 감독은 <쇼미더머니>의 본질을 꿰뚫었다. <변산> 속에서 배우 박정민이 직접 리코딩한 랩들은 중독성 있는 훅이 있거나 강렬한 보컬이 있는 곡들은 아니다. 그리고 이는 의도된 바에 가깝다. 박정민 씨가 어떤 래퍼들을 참고했는지 눈에 다 보일 정도로 사전조사를 했다는 티가 나고, 이런 스타일의 랩 스타일을 직접 골랐다고 생각된다. <변산>은 결국 학수(박정민)의 성장극이다. 즉, 이에 맞게 자전적 랩 형식을 선택한 것이다.
20대 후반에 대학을 중퇴하고, <쇼미더머니>에 여섯 시즌 째 출현하는 학수 aka 심뻑은 고향을 감추고 서울 출신인 척하는 래퍼다. <쇼미더머니> 시즌 6에서 심사위원 매드클라운(ㅋㅋ)과 안면이 있는 사이로 나오는데, 매드클라운은 심뻑에게 “너 흥분하면 사투리 나오잖아”라고 하지만 부정한다. 심뻑, 아니 학수에게 고향은 부정하고 싶은 존재다. 단순히 서울에 대한 열등감은 아니다. 학수에게 고향은 자신의 어머니가 한을 품고 죽은 곳이며, 장례식까지 어머니를 찾지 않은 아버지가 있는 공간이다. 그렇게 거의 5년 이상 고향을 찾지 않던 학수가,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전화를 받으면서 고향으로 내려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솔직히, 왜 이준익 감독이 처음에 시나리오를 거절했는지 감이 왔다. 21세기 청춘물 치고는 너무 오이디푸스 서사이지 않나. 심지어 이준익 감독은 부자 관계의 긴장감을 <사도>(2015)에서 충분히 다뤘다. 그러나 이런 서사를 푸는 방식으로 랩을 선택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다. <쇼미더머니>식 힙합의 근간은 미국 ‘본토’ 힙합의 현지화/식민화와 한국식 가족주의의 결합에 있는데, 이를 정확하게 잡아낸 거다. 오이디푸스 서사를 이 정도로 힙하게 풀어낼 수 있는 한국 영화감독은 흔치 않다.
별개로, 한국 힙합 팬이라면 재미있게 볼 요소들이 많다. <쇼미더머니> 심사위원으로 나오는 도덕(도끼와 더콰이엇), VMC의 던밀스 등은 물론이고 래퍼 겸 배우 앤덥이 학수의 친구 역을 맡는다. 박정민 씨의 랩이 수준급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지방 사회 안에서 나뒹구는 시
학수의 고향, 부안 역시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고향 친구들과 어르신들은 ‘래퍼’라는 직업과 <쇼미더머니>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학수는 그런 고향에 진절머리를 낸다. 학수는 고향에 내려와서 자신이 마주하지 못했던 청춘을 마주한다. 고등학생 때 자신의 노트를 훔쳐 등단한 선배는 지방에서 권력을 부리는 기자가 되어 있고, 어릴 때는 자신이 한참 부려먹던 용대는 떡대 있는 깡패가 되어 있다. 한때 부안을 호령했던 자신의 증오하는 깡패 아버지는 병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자신이 오랫동안 찾지 않았던 집은 거의 폐가가 되어 있다. 학수에게 있어서 서울과 힙합은 자신의 과거에서 도망치기 위한 방책이었는데,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다. 고향에는 아직 시와 랩 가사를 쓰며 방황하던 자기 자신이 남아 있다. 아버지에게 분노하고 어머니에게는 죄책감을 덜지 못한 자신이 남아 있다.
그래서 학수는 고향에서 계속 초라해진다. 경찰서에서 도둑으로 몰리고, 첫사랑 미경에게는 양다리를 당하고, 몇 년 만에 마주한 아버지와는 사이가 나아지지 않고, 용대와의 내기에서 져서 한동안은 용대의 운전기사로 일하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을 지켜보는 선미(김고은)는 “값나게 살지는 못해도, 후지게 살지는 말어!”라 날린다. 선미는 학수가 왜 바닥으로 내리치는지 알고 있다. 자기 자신을 마주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학수가 바닥에서 다시 올라오는 과정도 과거의 자신과 마주하는 데에 있다. 용대와 갯벌에서 맨몸으로 싸우고, 그동안 제대로 화내지 못했던 아버지를 대면하면서 학수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극복한다. 지방에서 나뒹구던 학수의 시는, 자신의 트라우마를 마주한 후에야 노을에서 살아난다.
추측이긴 한데, 학수의 서사가 <쇼미더머니> 시즌 4 블랙넛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학수가 블랙넛의 순화시킨 버전이라고 생각되면 너무 갔나? 블랙넛은 전북대를 자퇴하고 서울에 올라와 래퍼 생활을 시작했고, 학수 역시 지방 국립대 국문과를 다니다 중퇴하고 서울에 올라온 것으로 나온다. 학수는 어머니에게 가여움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캐릭터고, 블랙넛 역시 <쇼미더머니> 시즌 4 후반에 가면 식당을 홀로 운영하는 어머니가 강조되어 등장한다. 여성 혐오적 가사로 유명한 블랙넛이 거의 유일하게 약하게 대하는 여성이 자신을 키우느라 고생한 어머니다. 이준익 감독이 진짜로 블랙넛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영화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한국 힙합과 전라도 지방 사회를 독특하게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본질은 결코 낯설지 않다는 게 함정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나?
선미는 왜 노을만 바라보는가
이쯤 되면 예상이 가겠지만, <변산>은 페미니즘적 스탠스가 강한 사람에게는 별로 추천하지 않는 영화다. 애초에 학수라는 중심 캐릭터의 서사가 매우 남성 중심적일뿐더러, 학수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히로인(?)인 선미 캐릭터는 너무 실망스러웠다. 선미는 자신만의 서사가 없는 여성 캐릭터다. 고등학교 때 학수를 짝사랑하면서 같이 노을을 좋아하게 되었고,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학수에게 아버지를 찾아오라고 처음 전화를 한 사람도 선미였고, 학수가 다시 래퍼로서 자신감을 찾게 도와주는 것도 선미다. 그러나 영화 내내 선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이지는 않는다. 선미의 동력은 첫사랑 학수 혹은 학수의 아버지밖에 없다.
객관적으로 선미가 학수보다 사회/경제적 환경이 더 좋다는 설정에는 더 기운이 빠진다. 아니, 공무원에다가 등단에 성공해서 거액의 상금까지 받게 된 선미가 왜 래퍼로서 제대로 성공하지 못한 학수만 사랑해야 하는가? 고등학생 때 첫사랑이라서? 처음으로 선미가 소설을 쓸 수 있게 해 준 사람이라서? 극 중 선미와 학수는 무려 29살이다. 고등학교 졸업한 지 10년이나 지났다고. 선미가 마지막으로 만난 지 10년이나 된 학수를 계속 짝사랑한다는 설정, 후질뿐더러 설명도 안 된다. 선미는 학수의 첫사랑 미경과 계속 대비되는데, 미경은 그나마 전형적인 썅년 캐릭터와는 차별화된다. 그치만…모르겠다. 기왕 김고은이 캐스팅됐으면, 나 같으면 선미를 훨씬 더 좋은 캐릭터로 만들어주고 싶었을 것 같다.
선미는 이준익 감독의 전작, <박열>의 후미코(최희서)와 더더욱 대비된다. 같은 감독이 만든 여성 캐릭터 맞나 싶다. 박열과 동등한 투쟁의 동지이자 파트너인 후미코, 심문 중에도 망설임 없이 “메이킹 라부”라 말하는 후미코, 간수가 강간하겠다고 위협하자 오히려 옷을 벗어제끼고 사자후 하는 후미코는 어디로 갔단 말인가.
21세기 한국 지방 래퍼가 금의환경(錦衣還京)하기까지
학수는 선미와 어머니의 무덤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고향을 떠난 남자들은 금의환향 콤플렉스가 있거든”이라 말한다. 그리고 학수는 서울로 돌아와서 <쇼미더머니> 무대를 하는 데 성공한다. 어머니라는 프리스타일 주제에 버벅거리던 학수는, <쇼미더머니> 무대에서 어머니와 선미를 위한 노래를 부른다. 그리고 엔딩 크레딧은 학수와 선미의 결혼식으로 끝난다. 짠내 나는 청춘물은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그러나 모두를 위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변산>은 영리하고 중심이 잡힌 영화지만, 그 중심이 마음에 들지 않네.
PS 1. 그렇지만 이준익의 개그는 여전히 살아 있다.
PS 2. 오늘도 열일하는 김준한의 연기.
PS 3. 사실 김고은의 데뷔 때부터 닮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는데, <변산>을 보러 간 날도 같이 보러 간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다. 스스로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