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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진 가족

<어느 가족>: 그래서 가족은 무엇인가?

by 유녕
※ 브런치 무비 패스로 본 영화입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다시 가족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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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다행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팬과 볼 수 있었다.


나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잘 아는 편이 아니다. 기껏해야 대표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정도? 일본 컬처와 그렇게 잘 맞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일본 영화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물론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현재 일본 문화의 주된 흐름을 따라가는 사람이 아니다. 안 그러면 칸 황금종려상을 수상했는데도 아베가 그렇게 축하 멘트 한번 안 할 리가. 그는 일본의 쿨 재팬 문화 정책에 신물을 내면서, “그럴 시간에 부산국제영화제 같은 영화제 만들고 국립영화아카데미나 만들어!!”라 말하는 감독이다. 그는 이번에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와 같은 흐름으로 가족에 대해 질문한다. 스스로도 “10년 동안 생각해온 가족의 의미를 모두 담은 영화”라 정의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워낙 ‘정상 가족’ 프레임이 강한 사회라 이를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본다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각자 주워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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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를 말하기에 앞서,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이 영화의 제목 번역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일본 제목은 <만비키 가족>, ‘도둑 가족’을 의미한다. 이가 한국 제목으로는 <어느 가족>으로는 바뀌어서 개봉한다.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도 어떤 의미로 붙인 것인지는 감이 온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소위 ‘정상 가족’의 프레임에 맞는 가족은 아니다. 그럼에도 가족이기 때문에 ‘어느 가족’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 같다. ‘도둑 가족’보다는 훨씬 거부감은 덜 느껴지는 제목이다. 그러나 ‘도둑 가족’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놓치는 제목 번역이라 아쉽다.


여기 어느 가족이 있다. 가족 구성원은 총 5명, 그러나 혈연으로 묶여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집은 전 남편의 연금을 받는 할머니, 하츠에 시바타(키키 키린)의 것이지만 다른 이들도 산다. 부부인 오사무 시바타(릴리 프랭키)와 노부요 시바타(안도 사쿠라), 하츠에(정확히는 전 남편)의 손녀 아키 시바타(마츠오카 마유), 그리고 부부에게 입양된 아들 쇼타(죠 카이리)가 작은 집에 모여 산다. 이 가족은 혈연으로 묶은 것도 아닐뿐더러 풍족하거나 사회의 기준에 맞게 살지도 않는다. 그나마 전 남편의 연금으로 연명하는 하츠에는 나은 편이다. 오사무는 입양한 아들 쇼타에게 도둑질을 가르치고, 노부요는 세탁소에서 일하면서 가끔 물건을 훔치고는 한다. 집에서 가출한 아키는 유사 성매매 업소에서 돈을 벌며 산다. 그들의 삶은 사회 속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 하츠에의 낡은 집에는 훔친 것들과 빌려온 것들과 주운 것들이 넘쳐난다.


그리고 다시 주워온 아이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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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무와 쇼타가 집에 오는 길에, 집 마당에 나온 여자아이를 만난다.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부모에게 맞은 흔적이 잔뜩 있는 여자아이에게 오사무는 고로케를 권하고 집에 데려온다. 처음에 노부요는 “이게 유괴 아니야?”라 말하지만, 아이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갈 때 부모가 싸우는 소리를 듣고는 결국 쇼타처럼 여자아이를 집에 데리고 온다. 원래 이름이 ‘쥬리’였던 아이는 ‘유리’가 되고, ‘린’이 된다. 다른 가족들처럼 어디선가 주워진, 잉여의 ‘린’은 도둑질을 배우고 자신의 역할을 한다. 그러나 자신의 ‘원래’ 가족과 다르게 린을 사랑을 배운다. 때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도, 새 옷을 산다고 해서 꼭 맞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노부요에게 배운다. 쇼타와 오사무에게는 땅따먹기 놀이와 행운을 배운다. 그렇게 린은 ‘어느 가족’ 속에서 웃는 법을 배운다.


완벽한 가족은 없다


린과 가족.jpg


물론 그들의 관계는 불안정하다. 경찰은 실종된 ‘쥬리’를 찾아다니고, 오사무와 쇼타의 도둑질은 항상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 하는 것이다. 노부요는 ‘슈리’를 데리고 있기 때문에 세탁소를 그만둔다. 오사무는 건설 일용직을 뛰었다가 다리를 다치고, 돈은 점점 떨어진다. 가족들과 함께 바닷가에 놀러 간 바로 다음 날, 하츠에가 숨을 거둔다. 그러나 이 가족은 하츠에의 장례식을 치러줄 비용이 없다. 그래서 결국 땅에 묻는다. 극이 진행될수록 이 가족은 위태로워진다. 똑똑한 쇼타는 점점 ‘아빠’ 혹은 ‘오사무’의 도둑질에 가담하는 것에 주저하고, 결국 그 주저함이 이 ‘비정상적인 가족’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된다.


하츠에와 아키.jpg


그렇게 경찰이 이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어느 가족’의 치부가 드러난다. 오사무와 노부요 부부는 노부요의 전 남편을 죽인 적이 있다. 물론 이는 정당방위였다. 노부요의 전 남편이 둘을 살해하겠다고 협박하는 중이었으니까. 아키는 할머니인 하츠에가 돈 때문에 자신을 데려왔을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된다. 쇼타는 ‘학교는 집에서 공부 못하는 아이들만 간다’는 오사무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게 된다. 그들의 가족은 완벽하지 않다. 오히려 치부와 죄가 그들을 묶었을지도 모른다.


이 영화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가족’과는 대비되는 ‘정상 가족’들이 등장한다. 그 ‘정상 가족’들도 제각기 다르다. 구성원만 부모와 아이로 구성되었을 뿐 모두가 불행한 ‘쥬리’의 가족, 부유하고 행복한 부모와 딸이 있지만 누군가는 사라져 버린 가족, 경찰들의 말에서 나오는 ‘정상 가족’ 프레임까지. 그러나 이 영화는 굳이 ‘어느 가족’이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전작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처럼 의문을 던진다. 가족은 꼭 혈연으로 맺어져야 하는가? 그렇게 치면 ‘쥬리’는 친부모에게 돌아갔어야 하는가? 그렇다면 오사무와 노부요가 ‘쥬리’, 아니 ‘린’을 데려온 것은 정말 ‘유괴’에 불과한가? 정말로?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하려는 말은 간단하다. 완벽한 가족은 없다. 혈연이 없기 때문에 기대가 없기도 하고, 친부모가 아닐 지라도 더 따뜻하기도 하다고. 혈연으로 묶여 있지 않아도, 치부가 있을 지라도 행복한 가족일 수 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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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가족은 흩어진다. ‘린’은 다시 ‘쥬리’가 되어 친부모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고, 쇼타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있는 시설로 간다. 그러나 가족은 쉽게 흩어지지 않는다. 오사무는 쇼타와 함께 5년 징역을 받은 노부요에게 면회를 간다. 이때 노부요는 쇼타를 어디서 데려왔는지 말해주고, 오사무는 진심으로 쇼타에게 미안하다 말한다. 이때 오사무는 다시 ‘아저씨’로 돌아가겠다고 말하지만, 그때에서야 쇼타는 오사무를 ‘아빠’라 부른다. 정상적이지 않은 가족은 사회의 압박에 의해 해체되지만, 완전히 해체되지는 않는다. 아키는 텅 비어 있는 할머니의 집에 다시 찾아오고, ‘슈리’는 여전히 가족에게 배운 땅따먹기 노래를 흥얼거린다.


‘쥬리’는 분명히 예전과 다르다. 친엄마가 새 옷을 사준다고 해도 더 이상 얌전히 맞지 않는다. 혼자 땅따먹기 게임을 하다가 저너머를 바라보는 슈리의 시선이 기억에 오래 남을 듯하다. ‘쥬리’는 다시 ‘린’이 될 수 있을까? 다시 자신의 ‘어느 가족’에게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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