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라디오에도 매력이 있나요?
왜 하필 라디오일까
6월 주제가 라디오라고 들었을 때 고민이 많았다. 왜 하필 라디오일까. 스스로 워낙 음악 취향이 확고해서 스스로 만든 멜론 플레이리스트를 반복하는 게 습관이었다. 정해진 시간에 라디오를 듣는 것도 별로 끌리지 않았고, 어릴 때부터 차에 타면 라디오를 틀기보다는 최근에 산 CD 앨범을 넣어서 계속 듣는 편이었다. 물론 MBC 라디오하면 <배철수의 음악캠프>나 양희은, 서경석의 <여성시대>와 같이 생각나는 대표 프로그램들은 있었다. 그러나 라디오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답할 수가 없었다. 라디오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MBC FM4U 청춘 콘서트와 환경 콘서트를 다녀왔지만, 여전히 감이 오지 않았다. 점점 더 VR 등을 비롯한 시각 기술이 화려해지고 융합 콘텐츠가 다양해지고 있는 지금, 라디오가 보여줄 수 있는 매력은 무엇일까?
주파수 속에는 사람이 있다
생각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굿모닝FM 김제동입니다>에 참관했을 때였다. 평소보다 훨씬 이른 시각에 일어나 피곤했지만, 아침 시간의 라디오 진행을 직접 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듣는 2시간의 긴 라디오 프로그램이다 보니, 코너가 다양했다. 모든 방송이 그렇듯이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했다. 참관 중에 김제동 씨가 청년시청자위원회의 사연을 고를 때도, 말이 길어질 법한 사연보다는 짧고 강렬한 사연들이 더 많이 뽑혔다. 그러나 라디오의 확실한 매력을 알았으니, 바로 ‘사람 냄새’였다.
TV에서는, 특정 프로그램들을 제외하고 시청자의 직접적인 참여가 어렵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의 문자 투표나 음악 방송의 응원 문자 정도가 전부다. 여기서 더 나아가 프로그램 진행자와 시청자가 직접 대화를 나누거나 소통하는 경우는 더더욱 보기 힘들다. JTBC <한끼줍쇼>, <패키지로 세계일주>와 같은 예능들은 시청자를 직접 찾아가기도 하지만, 선정되는 시청자도 극히 적다.
그러나 라디오의 확실한 매력은 TV 프로그램에 비해 프로그램의 진행자/제작자와 시청자의 소통이 훨씬 자주,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DJ의 선곡에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것도, DJ에게 신청곡을 틀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것 역시 라디오 플랫폼이다. 당장 수요일에 참관한 <굿모닝 FM 김제동입니다>에서도 커피소년이 ‘장가갈 수 있을까’, ‘행복의 주문’ 등을 라이브로 불렀을 때, 시청자들의 기쁨이 컴퓨터 화면에 그대로 전해졌으니 말이다. 후에 라디오 PD 중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 자신의 학창 시절에는 라디오에 사연을 보내거나 신청곡을 보내서 뽑히면 학교에서 온통 난리가 났는데, 이제 라디오를 듣는 학생들은 괴짜 취급을 받는 것 같아서 너무 슬프다고. 나도 주파수 속의 사람을 놓친 것은 아닐까. 나도 누군가의 추천으로 들을 노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놓친 것은 아닐까.
라디오의 다양화를 위하여
그렇다면 나는 왜 라디오를 오랫동안 접하지 못했고, 왜 매력이 없다고 느꼈을까? 라디오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기도 했고, 라디오를 듣는 습관이 없었던 것도 맞다. 그럼에도 내가 왜 라디오의 매력을 쉽게 느끼지 못했는지에 대한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무려 MBC 라디오국에 34년 근속한 조정선 부국장의 강연을 들은 후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강연은 단순히 라디오 체계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아이디어들과 라디오의 미래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가장 인상 깊었던 이야기는 다른 나라와의 라디오 프로그램 비교와 라디오의 미래였다. 현재 한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사연을 많이 받고 신변잡기 식으로 곡 선정이 이루어진다면, 미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장르 세분화가 훨씬 많이 이루어져 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미국에서 우버를 탈 때, 라디오에서 누군가의 사연이 나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대신 틀어져 있는 라디오의 채널에 따라 우버 운전자의 음악 취향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EDM을 좋아하는 사람,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 심지어 고향의 인도 음악 전용 라디오 채널을 틀어놓는 사람까지 다양했다. 반면, 한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아직 그런 세분화가 잘 보이지 않는다. 미국 라디오 시스템은 음악 장르에서 확실한 타켓이 있지만, 광범위한 음악과 사연 위주의 한국 라디오 시스템은 나와 같은 음악 마니아에게 확 이끄는 매력이 없었다. 팟캐스트라면 몰라도 한국에서 힙합/알앤비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은 아직 본 적이 없는 걸.
전문화와 사람 냄새가 함께 있는 라디오
언젠가는 라디오 채널도 전문화/세분화되고, ‘사람 냄새’도 남아 있는 한국 라디오를 만나고 싶다. 그리고 이 두 요소를 모두 잡는 라디오 채널이 MBC에 있다. 앞서 언급한 조정선 PD가 직접 진행하는 <조PD의 비틀즈라디오>와 배우 한예리가 진행하는 <FM영화음악 한예리입니다>가 그런 프로그램들에 속한다. <조PD의 비틀즈라디오>는 프로그램명에 걸맞게 선곡표를 보아도 거의 모든 선곡들이 비틀즈의 노래다. 비틀즈의 노래들을 정주행하고 밴드 비틀즈의 비하인드 스토리까지 듣고 싶은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길 추천한다. 스스로 배우 한예리의 팬이기도 하지만, <FM영화음악 한예리입니다>에서 소리만 듣고 어떤 영화의 장면인지 추측하는 코너는 꽤 신선하고 흥미로웠다. 영화나 드라마 OST를 좋아하고 음악감독이 누군지 줄줄이 꿰는 영화 마니아라면, 시간 편성도 저녁 8-9시니 추천한다. 전문화와 사람 냄새를 동시에 잡는 라디오 프로그램들이 더 많아질 때까지, 꺼진 라디오도 다시 보자.
PS. 그런 의미로 어서 한국에서도 힙합/알앤비 전문 라디오 프로그램 빨리 보고 싶습니다. MBC에서 나오면 더 좋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