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면가왕 더 위너>: 말하는 대로 되더라
반가운 얼굴들
처음 복면가왕을 보던 날이 생각난다. 정말 신박했다. 토너먼트식 음악 예능이야 흔했지만 가수들이 가면을 쓰고 나오는 프로그램이라니.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었지만, 일단 재밌었다. 생각보다 가면 뒤의 가수들을 맞추는 일은 쉽지 않았고, 가수의 얼굴을 가림으로서 승부를 예측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가족들과 항상 일요일 5시 복면가왕 본방을 보았는데, 아빠와 나는 웬만해서는 승패를 거의 맞췄다. 그렇게 복면가왕을 꾸준히 챙겨 본 지 2-3년이 지났고, 역대 출연자들이 등장하는 <복면가왕 더 위너> 공연을 본 것은 행운이었다. 그동안 <복면가왕>이 어떤 길을 지나왔는지 새삼 떠오르기도 했다. 그래서 공연의 처음을 연 이들이 터주 대감 조장혁과 김호영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했다. 그러나 MBC 예능의 터주 대감으로 자리 잡고, 태국과 미국에 수출된 <복면가왕>이 과연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이런저런 고민과 함께 <복면가왕 더 위너>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가면으로 치유받은 사람들
비록 몸 전체를 가리지는 않지만, <복면가왕>에서 얼굴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무대에 다시 설 용기를 얻는 사람들이 있다. <복면가왕 더 위너>의 출연자 중 <복면가왕>으로 인해 치유를 받은 출연자들이 있다. 첫 비 가수 가왕이었던 ‘니가가라 하와이’ 홍지민과 ‘불광동 휘발유’ 김연지가 그런 케이스다. 두 사람은 가왕전에서도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가왕들은 아니지만, 가면을 벗고 정체를 공개한 순간 많은 사람들이 반가워했다. 뮤지컬 배우인 만큼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하는 홍지민은, 산후우울증으로 인해 힘들어했지만 가면의 힘으로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불광동 휘발유’ 김연지도 비슷했다. 2000년대 가요계의 실력파 보컬 그룹 씨야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만, 씨야 해체 이후로 설 자리를 찾기 힘들었던 김연지에게 <복면가왕>은 기대가 되었다.
그래서 홍지민이 <말하는 대로>를 부르고, 김연지와 홍지민이 듀엣을 하는 모습은 <복면가왕>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대부분의 무대는 유명세와 이름값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복면가왕>에서는 이름값을 조금 내려놔도 상관없다. <복면가왕> 무대에 서는 가수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노래밖에 없다. 그렇게 이름값과 상관없이 감동을 주는 가수들은 다시 기회를 얻기도 한다.
가려도 보이는 사람들
반면, 충분히 유명하고 인정받은 가수여도 <복면가왕>에 출연하기도 한다. 이런 출연자들은 오랫동안 가왕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도 꽤 있다.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 김연우와 같이 소위 ‘레전드’라 불리는 가수들은, 겉으로만 보면 <복면가왕>에 나올 이유가 없어 보인다. 물론 가왕 기간이 끝난 이후에 투어 공연을 진행하기도 하지만, 만약에 <복면가왕>에 나와서 빨리 떨어진다면 오히려 명성에 금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 가수들이 <복면가왕>에 나오는 이유를 꼽아본다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유명해지면서 대표곡을 많이 부를 수밖에 없는 가수들은, 본인 노래 이외에 모든 노래를 부를 수 있는 <복면가왕>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다.
<복면가왕 더 위너>에서 이렇게 새로운 시도를 한 가왕들은 정동하, 소향, 그리고 환희가 있었다. 동방신기의 <미로틱(Mirotic)>을 정동하가 락으로 재해석해서 부르고, 환희가 태양의 <나만 바라봐>를 부르는 모습을 <복면가왕>이 아니면 어디서 볼까. 새로운 시도가 아이돌 노래로만 이어진다는 비판도 있지만, 마지막 가왕 방어전에서 판소리를 부른 김연우도 있다. 그래서 <You raise me up>을 같이 부르던 소향과 정동하의 모습은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처음에는 정동하가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지만, 이 두 사람의 듀오도 홍지민과 김연지처럼 의도된 것처럼 느껴졌다면 착각일까.
가면으로 더 빛난 사람들
그리고 가면으로 인해 더 빛난 사람들이 있다. 그동안 방송에서 자신의 노래를 보여준 적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기에 <복면가왕>에서 더 빛난 사람들이다. 바로 5연승 가왕 선우정아와, 가왕은 되지 못했지만 3라운드까지 올라간 배우 박진주다. 두 사람은 <복면가왕> 시청자들이 비교적 정체를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 출연자이기도 하다. 선우정아는 인디 씬의 디바지만 인지도가 높지 않았고, 박진주는 뮤지컬 공연에서도 활동했으나 노래 실력은 알려지지 않은 편이었다. 얼핏 봐서는 잘 안 어울릴 것 같은 선우정아와 박진주의 듀엣은, 가면으로 인해 더 빛난 사람들의 듀엣이다. 가면을 씀으로써 편견에서 벗어나 노래할 수 있던 사람들의 듀엣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가면의 행운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복면가왕>은 성공한 프로그램이지만, 더 새로움을 기대하긴 힘들다는 시선도 분명히 있다. 유명 가수들과 자신의 실력을 잘 보여줄 수 없던 가수들, 그리고 또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뭐지?
미국 FOX 채널에 <복면가왕>을 수입한 크레이그 플레스티스 스마트독미디어 대표는 LA 태국 음식점에서 태국판 프로그램을 보고 한국 MBC 원작을 찾았다. ‘아메리카 갓 탤런트’ ‘딜, 노딜’ 등 인기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해온 그는 “좋은 포맷은 20초 안에 설명할 수 있는 차별화된 특징이 있어야 한다”며 , ‘복면가왕’은 가면이었다”라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미국판 ‘복면가왕’ 일본판 ‘굿닥터’가 잘 나가는 이유)
<복면가왕>은 그 어떤 예능보다 넓은 폭의 출연자를 자랑한다. 그리고 <복면가왕> 특유의 기발한 가면을 쓰고 나오는 사람들은 가면의 이름대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수 김연지는 ‘불광동 휘발유’처럼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OST 퀸이 되었고, 김연우는 ‘화생방실 클레오파트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가왕 기간이 끝나고 자신의 입지를 다시 굳혔다. 따라서 ‘말하는 대로’ 되는 <복면가왕>은 ‘가면’이라는 정체성에 충실하되 조금씩 변화를 주면 된다. 그래서 할리우드 배우 라이언 레이놀즈의 출현 등도 좋지만, 한 번쯤은 오디션판 <복면가왕>도 보고 싶다. 가수의 꿈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면의 행운을 조금 나눠줄 수도 있는 법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