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뒤에 테리우스>: 시선이 따뜻한 첩보물이라니
이토록 신박한 코미디 첩보물
처음 <내 뒤에 테리우스> 티저를 보았을 때, 걱정 반 기대 반도 아니고 걱정 9 기대 1이었다. 첩보물인데, 그것도 소지섭의 복귀작인데 코믹하다고? 이게 말이 돼?
그런데 웬걸, 정인선의 팬인 친구가 먼저 보기 시작하더니 너무 재미있다고 추천했다. 그리고 아무 기대 없이 1회를 보기 시작했는데, 어느 순간 깔깔 웃으면서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총 12회의 방송을 마친 <내 뒤의 테리우스>는, 올해 본 드라마 중에 제일 재미있게 본 드라마다. 최근 방영된 MBC 드라마들 중 2049 세대의 반응을 제일 많이 얻은 드라마이기도 하다. 드라마 왕국이라는 왕년의 별명이 무색하게 케이블 드라마들에 밀렸던 MBC 드라마로서는 큰 성과다.
소지섭의 드라마 복귀작, 국내 드라마 최초의 폴란드 로케이션 등 <내 뒤에 테리우스>를 수식하는 단어들은 많다. 그러나 <내 뒤에 테리우스>에 주목하고 싶은 포인트는 따로 있다. <내 뒤에 테리우스>는 다른 한국 드라마들이 갖지 못한 시선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시선이 <내 뒤의 테리우스>를 특별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다.
‘아줌마’의 반란
소지섭이 첩보물 주인공으로 캐스팅된 건 전혀 놀랍지 않다. 큰 키에 국정원 엘리트 요원에 어울리는 포스가 있는 배우다. 그러나 그 소지섭이 유치원 아이들의 베이비시터가 된다면? 이 컨셉은 아놀드 슈워제네거 주연의 영화 <유치원에 간 사나이>(1979)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누가 봐도 힘 잘 쓸 것 같고 마초적인 남자가, 정작 아이들을 돌볼 때는 당황스러워하고 적응해나가는 갭 차이는 예나 지금이나 웃음 포인트인가 보다.
그리고 김본의 육아 원정기를 뒷받침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준준 남매의 엄마인 고애린과 KIS(킹캐슬 아파트 아줌마 정보국)이다.
고애린은 한국 드라마에서 흔하지 않은 여주인공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경력단절 여성이 여주인공으로 등장한 시점은 꽤 오래되었지만, 쌍둥이가 딸린 싱글 맘이 여주인공인 설정은 여전히 드물다. 그렇다고 마냥 무능한 캐릭터도 아니다. 육아에 전념하는 경력 단절된 여성이 왕년에는 공대 나온 IT 개발자 ‘아줌마’였다는 설정이 한드에 흔하냐고. 경력단절 여성이기에 취업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막상 직장에서 워드/엑셀/PPT 다 잘할 수 있고 똑 부러진다. 그렇기에 드라마 속에서 고애린은 김본에 마냥 의지하지 않는 캐릭터가 된다. 똑 부러진 고애린의 캐릭터성을 살리는 데에는 정인선의 연기도 한몫한다. 고애린 역 캐스팅을 확정하기까지 오래 걸렸다고 들었는데, 91년생이라는 숫자가 무색하게 싱글 맘 연기가 호평을 얻고 있다.
톡톡히 웃음을 유발하는 KIS는 어떤가. 고애린의 옆집 남자 김본의 정체를 추리하느라 오지랖을 부리기도 하지만, KIS의 정보력은 국정원을 넘어서기도 한다. 고애린의 상사 진용태의 페이스오프를 KIS 일원이 먼저 눈치채고, J 인터내셔널의 가방 퀄리티 역시 국정원 요원보다 KIS가 더 잘 안다. 준준 남매가 납치되기 직전에 KIS가 네트워크를 풀가동하는 장면에서, 순식간에 퍼져나가는 준준 남매의 행방은 단순히 웃을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 드라마에서 ‘아줌마’의 정보력은 지나친 교육열과 오지랖, 님비 현상 등 부정적으로 묘사된 적이 많다. 그러나 <내 뒤의 테리우스>는 정반대의 시선을 고집한다. <내 뒤의 테리우스> 속의 ‘아줌마’는 무식하지도, 무능하지도 않다.
있는 그대로의 아이들
그러나 <내 뒤의 테리우스>에 가장 감사한 점은 아이들을 묘사하는 방식이다. 준준 남매는 TV에서 정말 오랜만에 마주한 천방지축의 아이들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 속 아이들은, 울지도 않고 떼쓰지도 않고 오히려 부모를 위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하다. 그러나 현실 속에 이런 아이들이 얼마나 있나? 1인 가구가 그 어떤 국가보다 빠르게 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배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아 예능 속의 ‘예쁜’ 아이는 귀여워하지만, 울고 떼쓰고 아픈 아이가 현실에 있으면 견디질 못한다. 그래서 <슈퍼맨이 돌아왔다>는 흥해도 ‘맘충’과 ‘노키즈존’은 늘어만 간다. 이런 현실을 반영한 한 듯 한국 드라마 속의 아이들은 가만히 있다. 골칫덩어리가 아닌 ‘예쁜’ 아이로.
준준 남매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집을 어질러놓고, 맘에 드는 물건을 사달라고 떼쓰고, 같이 장난을 치다가 비싼 백에 주스를 흘리기도 한다. “아이들이 너무 사고뭉치로만 나오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도 나오지만, 이런 아이들이 TV에 등장하기를 바랐다. 많은 가족극들이 하지 못한 일을 첩보물 <내 뒤에 테리우스>가 해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지만, 뭐 어때.
‘테리우스’가 풀어내야 할 과제들
남북관계를 방해하는 제3의 세력이 있고 이를 쫓는 엘리트 첩보원은 한국 첩보물에서 수도 없이 나온 내용이다. <내 뒤에 테리우스>는 자칫 하면 뻔한 첩보물이 될 뻔했지만, 싱글 맘과 육아라는 키워드가 들어가면서 내용이 신선해졌다. 기분 좋게 출발한 <내 뒤의 테리우스>가 유종의 미를 거두려면, 이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첩보물/코미디물의 균형과 <내 뒤의 테리우스>만의 신선한 시선을 유지했으면 한다. 시터 본의 성장기는 물론이고!
PS. 기왕 이리된 거 준준 남매 옷 더 다양하게 입히면 안 될까요.
남자아이는 파란색 옷, 여자 아이는 분홍색 옷은 너무 식상하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