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인>: 다르게 바라볼 수 있는 세상
※ 브런치 무비패스로 본 영화입니다.
※ 약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니가 지우니?
정우성과 김향기 주연만으로 기대되는 영화였다. 게다가 정우성이 자폐 장애를 앓고 있는 학생에게 절절매는 노총각 변호사라니, 이게 무슨 컨셉이냐고. 한편으로 걱정되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여전히 한국 사회는 장애를 ‘극복해야 할 무언가’로 인식하고, 그동안 한국에서 자폐장애인이 등장했던 <말아톤>, <맨발의 기봉이>와 같은 영화들은 그 한계가 분명했다. <영주>에서 김향기의 연기를 인상 깊게 봤기에 그의 연기는 믿었지만 어떻게 연출되느냐는 다른 문제니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우였다. 이 영화는 내가 본 한국 상업영화 중 자폐 장애에 대한 이해도가 가장 높은 영화다. 김향기가 맡은 지우는 서번트 증후군(자폐증이나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이 암산, 기억, 음악, 퍼즐 맞추기 등 특정 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현상)이 있는 자폐 장애인인데, 지우에 대한 묘사에서 거슬리는 부분이 정말이지 없었다. 그리고 비장애인인 변호사 수호와 지우가 서로 마음을 여는 과정 역시 더없이 따뜻했다.
“그러지 않으면 지우가 아니죠”
변호사 순호는 자신이 맡은 사건의 증인으로서 지우를 만나게 된다. 그래서 이 영화의 큰 축은 3개 정도 된다. 민변에서 대형 로펌 변호사로 옮겨가는 순호 개인의 과정, 순호가 맡은 사건의 법정 싸움, 그리고 순호와 지우가 인간 대 인간으로서 마주하는 과정 정도로 보면 되겠다.
지우는 이웃집의 살인 사건을 유일하게 본 증인이지만, 자폐 장애인이기 때문에 그 신빙성을 쉽게 인정받지 못한다. 순호는 자기 의뢰인의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해 지우에게 접근하지만, 오히려 순호는 지우를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게 된다. 지우는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자폐 장애인이기 때문에, 말은 어눌할지 언정 퍼즐 맞추기나 기억력에 있어서는 뛰어난 재능을 보인다. 순호는 퍼즐과 퀴즈를 좋아하는 지우와 소통하면서 지우의 능력에 오히려 감탄한다. 지우를 만나면서 순호는 자폐 장애인인 지우를 단순히 ‘정신병자’가 아닌, 능력이 다른 ‘사람’으로 보게 된다.
영화 곳곳에서 자폐 장애에 대한 심도 있는 자료 조사가 돋보인다. 순호가 유튜브에서 “자폐 장애인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는 장면이나, 이를 활용해서 지우가 법원에 들어가는 장면의 연출 등이 세심하다. 지우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순호 주변에는 지우를 더 잘 이해하는 인물들 역시 존재한다. 자폐 장애인 동생을 두고 지우와 소통하는 검사 희중(이규형)이나, 지우를 평생 돌봐온 엄마 현정과 순호의 씬들은 자폐장애인과 주변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이에 더해 순호도 병이 든 아버지를 혼자 돌보고 있다는 설정 역시 허투로 들어간 설정은 아닌 듯하다.
지우가 충격으로 쓰러져 순호가 병원에 데리고 간 날, 순호는 지우의 어머니 현정에게 물어본다. 저렇게 똑똑한 아이인데, 장애만 없었다면 하고 바랄 때는 없었느냐고. 다른 영화 같았으면 현정이 그 질문에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혀 다른 답이 나온다.
“그러지 않으면 지우가 아니죠.”
<증인>은 장애를 극복되어야 하거나 없어져야 할 무언가로 보지 않는다. 한 개인의 정체성으로 본다.
한국 상업영화에서 이만큼 진보적인 주제의식을 엿본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번뇌는 당신의 것이자 나의 것
김향기의 연기는 이 영화에서도 놀랍지만, 사실 극을 더 끌고 가는 인물은 순호다. 정우성이 아주 오랜만에 일상 연기를 펼친다는 점은 <증인>의 장점이기도 하다. 순호는 현실에 순응하는 인물이다. 오랫동안 민변으로 활동했지만 대형 로펌으로 옮긴 지 1-2년 정도 되었다. 아직 파트너 변호사로 자리잡지 못한 순호에게 로펌 대표가 준 기회가 바로 <증인> 속의 사건이다. 사건을 진행하면서 순호는 피해자의 아들이 있는 회계사의 고문 변호사 계약을 맺고, 파트너 변호사가 될 기회 역시 얻는다. 성공의 고지가 곧 보인다.
그러나 순호는 번뇌한다. 변호사답게 그가 번뇌하는 곳은 주로 광화문 광장이다. 드넓은 사회의 현장이자 개인들이 자주 모이기도 하는, 뿌리 깊은 역사의 현장에서 그는 번뇌한다. 성공의 고지에는 룸살롱과 거짓과 상실이 보인다. 순호는 성공을 얻는 대신, 오랫동안 사랑했던 사람들을 잃어버리고 지우를 배반할 자신을 본다. 순호의 번뇌는 그만큼 흔하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주제이다. 순호 같은 변호사가 한국 사회에 하나쯤은, 아니 꽤 있겠지. 현실에 순응하고 먹고살아야 한다는 핑계를 대면서.
개인적으로는 순호 캐릭터가 아쉽다. 지우의 입장에서 순호의 번뇌는 사치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순호에게 "당신은 착한 사람입니까?"라 묻는 지우는, 변호사가 되고 싶지만 자신의 장애 때문에 꿈을 잇지는 못한다. 그래서 순호가 여성 캐릭터였다면 지우와의 관계가 더 달라졌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순호가 여성 변호사 캐릭터였다면 이 영화가 상업영화로 못 나왔겠지. 로펌 대표가 순호를 밀어준다는 설정도 못 나왔을 것이고.
“정상인 척 안 해도 되니까”
그래도 결말은 영화답게, 순호가 결국은 ‘현실’에 저항한다. 순호는 지우를 믿고 진실을 밝힌다. 지우는 상황 진술 대신, 상황에서 들은 말들은 그대로 읊는다. 순호는 지우가 줄곧 진실을 말하고 있었음을, 그저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렇게 순호는 고지에서 성공을 포기한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 정장이 아닌 홀가분한 차림으로 순호는 지우를 만나러 간다. 지우는 특수학교를 다니며 더 행복해 보인다. 순호가 학교 생활을 물어보자, 지우는 답한다.
“다 이상한데, 그래서 좋아요. 정상인 척 안 해도 되니까.”
그 후 지우와 순호가 인간 대 인간으로 포옹하는 장면은 눈물겹다. 그래서 이 영화는 다른 한국 상업영화들이 주지 못하는 감동을 줄 것이다. <역전재판>을 떠올리게 하는 법정 씬들, 자폐 장애에 대한 세심한 접근, 그리고 사람 대 사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배우들의 연기까지. 2019년 겨울에 따스함을 느끼고 싶다면, 꼭 보시길.
PS 1. 김향기의 연기에는 한계가 보이질 않는다. 10년, 20년 후에는 어떨지 너무나 기대되는 배우.
PS 2. 김향기의 아역 모델 시절에 정우성과 처음 만났다는데, 당시 빵 광고를 재현한 모습마저 얼마나 사랑스럽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