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녕 Mar 25. 2019

딸과 엄마에 대하여

내 인생을 구원하러 온 나의 파괴자

※ 타 매체에 실은 글을 재구성했습니다. 


수많은 모녀 관계, 그 속에 나



시청률 23%로 종편 드라마의 새 역사를 쓴 JTBC <SKY 캐슬>의 주인공은 강남권의 엄마들이다. 그들은 자식을 서울의대, 로스쿨을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SKY 캐슬>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큰 공감대를 얻었지만, 특히나 눈에 띄는 관계는 바로 모녀 관계였다. 극의 중심에 있는 한서진과 첫째 딸 예서만 하더라도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그려왔던 애틋한 모녀 관계는 아니다. 한서진은 시어머니를 비롯한 남편의 집안에서 인정받기 위해, 공부 잘하는 첫째 딸 예서를 서울의대로 보내고자 한다. 예서 역시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주로 묘사된 수험생은 아니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에서 수험생은 ‘순수’한 희생자로 그려졌으나, <SKY 캐슬> 속 고등학생들은 마냥 그렇지는 않다. 예서는 집안에서 지겹도록 들은 서울의대의 욕망을 내면화한다. 예서는 한서진이 시어머니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에게 헌신한다는 점을 알지만, 자신의 현재 목표 역시 서울의대이기에 엄마를 ‘이용’한다. 그러나 끊임없는 입시 스트레스 속에서 예서에게 엄마는 마냥 의지할 수는 없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감정적으로는 입시 코디 김주영 선생에게 더 의지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예서와 한서진의 관계는 애증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다. 고로 <SKY 캐슬>은 대학 입시 속 복잡한 가족 관계, 특히 모녀 관계를 잘 그려내는 드라마다.



사실, <SKY 캐슬>이 아니더라도 최근 한국 콘텐츠 시장에서 모녀 관계는 뜨거운 화두였다. 당장 교보문고만 가더라도 건강한 모녀 관계를 위한 해법을 제시하는 책들을 찾을 수 있다. <엄마,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 <나는 착한 딸을 그만두기로 했다>, <엄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 <딸은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다> 등 비슷한 책들은 교보문고의 한 코너를 차지할 뿐만 아니라, 판매량 역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또한, <SKY 캐슬> 이전에도 모녀 관계를 중요하게 다룬 한국 드라마들은 역시 최근에 많이 등장했다. <디어 마이 프렌즈>, 남녀 차별하는 어머니와 딸의 관계가 등장했던 <힘쎈여자 도봉순>, 같은 집에 살면서 30대인 딸에게 결혼을 강요하고 공부 잘하는 아들과 비교하는 어머니를 중요하게 다룬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까지. 모녀 관계는 한국 드라마의 중요한 키워드로 떠올랐을 뿐만 아니라 다양하게 변주되었다. 


그렇다면 왜 모녀 관계는 이제야 조명되는 것일까. 최근의 대중문화가 아니더라도, 그동안 모녀 관계를 대표하는 서사는 우리 사회에 존재하지 않았다. 부자 관계와 모자 관계의 애증은 수 천 년 전부터 오이디푸스 서사로 대변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부녀 관계는 제우스와 아테나/아르테미스의 관계로 표현되었다. 그렇다면 모녀 관계는? 하나로 뚜렷하게 대변할 수 있는 관계가 그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녀 관계는 가장 평면적으로 해석되곤 했다. 기껏해야 ‘친구 같은 엄마와 딸’ 정도의 애틋한 관계로 등장하기 일쑤고, 그 안에서 모녀관계의 갈등은 지워진다. 동화에서도 항상 갈등하는 관계는 친모가 아닌 계모와 양딸이다. 


그렇다면 왜 이제야 모녀 관계는 존재를 드러내는가? 왜 이제야 그 갈등이 나타나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아들딸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신조가 남자 형제 없이 자라난 딸들을 양성했고, 이에 아들 없는 자리에 딸이 들어왔다는 분석도 존재한다. 아들보다 조명을 덜 받던 딸들이, 예전보다 가정에서 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현재의 어머니들은 ‘양성 평등한 세상’ 속에서 딸만큼은 ‘뭐든 할 수 있게 하자’며 딸에게 교육의 기회를 주었다. 


그러나 굳이 학술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를 대지 않더라도, 

당장 내가 공감할 수 있는 서사이기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까.


나 역시 그러한 모녀 관계 서사를 공감하면서 본 사람이다. 모녀 관계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이자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여정에 대해서 지금부터 말하고자 한다. 나는 두 자매 중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언니와는 무려 10살 차이가 난다. 부모님이 오랫동안 고대한 아이였고, 딸이라고 차별당한 기억도 가정 내에서는 별로 없다. 여기서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흔히 거론되는 아빠, 오빠, 남동생 등의 남성 가족 구성원에게 차별받았던 딸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조금 더 내밀한, 어머니와 딸의 갈등과 애증 관계에 대한 나의 기록이다. 


'품 안의 자식'이자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


나와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언니는,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보다 떨어져 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자라난 언니는 성인이 된 이후로 한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한국에 들어와서 살 확률이 별로 없어 보인다.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식 교육을 받은 언니를 지켜본 엄마는, 10년 만에 나를 임신했을 때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 일부러 한국에서 낳았다. 남들은 다 미국 시민권 가지려고 미국 원정 출산한다는데, 엄마는 미국보다 열악한 환경의 한국 병원에서 나를 부득부득 낳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엄마는 나를 ‘미국 딸’로 키우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니는 한국어를 잘하는 편이지만 가끔 맞춤법을 틀렸고, 애인을 사귈 때 역시 인종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언니는 대학생 때도 방학을 제외하고는 한국에 머무르지 않았으며, 직장인이 되자 일 년에 한 달도 보기 힘들었다. 


누군가가 트위터에 썼듯이, 

언니는 엄마에게 

“유학비는 엄청나게 들었지만 돈 달라고 할 때만 연락하고 

설과 추석 때만 한국에 오다가 장례식에서 가식적으로 울 미국 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품 안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온전히 한국에서 교육받은 아이였으며, 언니와 달리 가족과 함께한 시간이 더 많은 딸이었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서 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은 엄마에게 나는 ‘열 아들 부럽지 않은 딸’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 잘하고 키 크고 트로피로 자랑할 수 있는 딸. 그러나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본다. 언니와 나의 위치가 달랐다면 어땠을까. 


내가 어릴 때부터 외국에 나가 살았다면? 

초등학생 때, 엄마가 미국 유학 갈 생각 없느냐고 물었을 때 있다고 대답했더라면? 




유치원 때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처음 유치원에 갈 때 언니는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서 며칠을 울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갔다고 한다. 심지어 옆에서 우는 애 달래다가 한 대 맞았다나 뭐라나. 지금도 미국에서 매일 부모님에게 보이스톡을 거는 언니와 다르게, 나는 어릴 때부터 가족에 대한 유대감이 큰 사람은 아니었다. 그만큼 가족의 속박을 싫어하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학창 시절에 엄마와 그래도 크게 싸우지 않은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나의 뜻과 엄마의 뜻이 어느 정도 일치했기 때문이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사학과를 가고 싶어 했던 나의 뜻과 대학 시절 철학을 좋아했던 엄마의 욕망이 맞았다. 어찌 보면 <스카이캐슬>의 예서처럼 엄마를 ‘이용’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니와 다르게 나의 저항 방식은 ‘뒤에서 호박씨 까기’였다. 언니는 부모와의 갈등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식이었다면, 나는 야자를 째고 몰래 힙합 콘서트에 가거나 부모의 정치경제적 의견에 동의하지 않고 묵묵부답을 하는 식으로 저항했다. 거꾸로 말하면, 언니는 가족에게 비밀이 거의 없었지만 나는 많았다. 그런데도 항상 의문이 있었다. 


왜 엄마는 나한테 저렇게 집착할까. 

왜 모든 집안일은 본인만 완벽하게 하려고 하고 도우려고만 하면 “너는 공부하는 게 나를 돕는 거야”라 말할까. 왜 나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 의문이 풀린 것은 대학 입학 이후였다. 


나는 엄마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1학년 때 기숙사에 입사하면서 안심했다. 

대학생이 되면서 드디어 엄마와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학에서 처음으로 페미니즘을 접했다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페미니스트가 된 이유로 연애 관계, 남성 가족 구성원과의 갈등, 직장에서의 성차별 등을 뽑는다. 그러나 나는 내가 페미니스트가 된 가장 큰 이유로 꼽으라면, 바로 엄마다. 이는 대체로 나의 개인적 경험에서 기인했다.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 공부 잘하고 키 크고 다가가기 힘든, 과 남자 동기들에게조차 ‘신여성’으로 불렸던 내게 또래 남자들은 별로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다. 현재도 방탄소년단 덕질을 하고, 표면적으로는 엄마보다 더 젠더 감수성이 높은 ‘신세대보다 더 신세대 같은 교수’ 아빠도 겉으로는 내 억압자가 아니었다. 


내 인생에 있어 젠더적으로 가장 큰 억압자는, 역설적으로 여성인 엄마였다. 


차라리 성적이나 진로에 대해서 엄마가 말하는 것은 괜찮았다. 나는 대학 등록금을 부모에게서 지원받고 있었고, 엄마의 지지로 인해 인문학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도 안다. 그러나 나를 못 견디게 만든 것은 외모에 대한 간섭이었다. 이는 곧 엄마가 나에게 휘두르는 가장 강한 억압이었으며, 대학 입학 이후로 더 강화된 억압이기도 했다. 


평생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전업주부로 산 엄마는 화장하지 않고 단발머리를 고수했다. 나 역시 엄마의 뜻에 맞게 고등학생 때까지는 화장하지 않고 엄마가 직접 잘라주는 단발머리를 했다. 분명히 편한 생활 방식과 스타일이었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정숙하고 순수한 딸이자 학생’의 상징으로 느껴졌다. 굳이 교복 치마를 줄여 입고 싶지는 않았지만, 패션 잡지를 챙겨보고 좋아하는 모델의 패션쇼를 즐겨보던 나에게 더 선택지가 있었으면 했다. 그래서 나는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기르고 파마를 하고 화장을 했다. 누군가에게는 여리여리한 복숭앗빛 메이크업을 벗어던지는 것이 자유였겠지만, 당시의 나에게는 음영이 진한 보라색 아이섀도와 빨간 립스틱을 바르는 것이 ‘정숙한 딸’로부터의 탈피였다. 


 어디 화장과 옷차림뿐인가. 안 그래도 마른 체질이었던 엄마는 암 투병 이후 167cm에 47~48kg의 몸무게를 유지했다. 대장암 투병 이후로 밤마다 소화 불량으로 고생하는 엄마는 50kg대의 몸무게를 가지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만, 어디 가서 살쪘다는 소리를 거의 들은 적이 없는 나를 억눌렀던 사람 역시 엄마다. 


매일같이 엄마가 하던 말. “3kg만 빼, 3kg만. 


그리고 엄마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를, 페미니즘 교양 수업 교수님에게서 추천받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에서 찾았다. 전통적인 아들과 딸의 역할을 모두 수행해야 하는 알파 걸과 그를 억압하는 어머니의 모녀관계를 담은 챕터, <어머니와 딸의 여성 혐오>를 읽는 순간 난 페미니스트가 되었다. 


내 인생의 중요한 파트가 설명되는 순간이었다. 



“어머니의 불만족감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무력함과 연결되어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저주하고 있음에도 비슷한 삶을 강제함으로써 딸의 증오를 산다. 딸은 어머니를 ‘절대 되고 싶지 않은 모델’, 즉 반면교사로 삼지만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타인(남성)의 힘을 빌려야만 한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무력감에 휩싸인다.” - 160-161p. 
“이런 어머니는 딸에게 ‘너를 평생 손에 쥐고 놓지 않을 테다’며 눈을 부릅뜨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너의 인생은 나의 것이다. 내 꿈의 시나리오대로 사는 것이 나의 분신인 너의 역할이자 운명이다. 딸이 어머니의 기대를 억압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가 아닌데, 어머니는 그걸 ‘애정’이니 ‘ 자기희생’이니 하고 밀어붙이니 악질도 이런 악질이 없다.” - 165p. 
“어머니의 기대에 답하든지 아니면 어머니의 기대에 저버리든지, 어느 쪽이든 딸은 어머니가 살아있는 한 어머니의 속박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어머니에게 복종하든 거역하든 어머니는 딸의 인생을 지배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자책감과 자기혐오로 나타난다. 딸에게 있어 여성 혐오란 언제나 어머니를 포함하여 스스로에 대한 자기혐오가 된다. 때문에 처방전은 노부타가 말하는 것처럼 어머니와 딸이 서로 마주 보고 ‘나는 당신과 다르다’고 통고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 174p. 


그러나 깨달음을 얻은 뒤의 상황은 더 복잡했다. 교환학생 등으로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은 어느 정도 확보할 수 있었지만,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하면서 나는 엄마와 더 싸우게 되었다. 여성의 옷차림과 행보로 성폭력 피해자에게 책임을 돌리는 엄마의 말을 듣고 싸우다가 2시간을 울면서 아빠에게 위로받았다. 그때 그 기분의 X 같음이란. 그렇게 싸우고 난 다음 날에는 항상 엄마는 잘못했다고 하며 화해했지만, 싸움의 원인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것을 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적되어 온 싸움은내가 3학년을 마치고 첫 휴학을 한 해에 제대로 터지고 말았다


"내가 왜 엄마 꺼야"


첫 휴학도 아빠의 지지를 받고 했으나, 그건 이슈가 아니었다. 싸움의 이유는 연애와 결혼에서 출발했다. 나는 언니와 달리, 그때까지 연애와 결혼관을 그때까지 엄마에게 제대로 말한 적이 없었다. 엄마가 언니의 애인을 맘에 들어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이를 보고 자란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친구와 벚꽃축제를 다녀온 어느 날, 농담 삼아 연애에 관해 물어보는 엄마에게 그날만큼은 솔직해지고 싶었다. 나는 결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내가 나 자신으로 살려면, 결혼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 거라 말했다. 그러나 엄마는 20대 초중반 딸에게 상상 이상으로 심하게 화를 냈다.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너는 왜 그렇게 남자를 일반화하니?" 

내가 말한 건 단순히 남자가 아니었는데 말이야. 그 제도 안으로 들어가고 싶지 않다는 거였는데 말이지. 


엄마는 그 말에서 30대 중반이 되도록 아직 결혼하지 않은 나의 언니를 보았을 것이다. 남편의 유학 생활에 돈을 다 대느라 힘이 빠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결혼하지 않고 혼자 쓸쓸히 늙어 죽는 불쌍한 여성을 상상했을 것이다. 아니라면, 그 정도로 엄마가 화를 내며 “그 말 취소해”라 말할 근거를 난 찾지 못했다. 


연애와 결혼은 새로운 억압의 기제로 다가왔다. 겨우 20대 초중반에. 


언제나 그렇듯이 그 말은 다시 묻어두었지만, 몇 달 후에 다른 사건이 촉발되었다. 어느 날 엄마가 아무렇지도 않게 던진 말이었다. 


요즘 애들 연애 안 하면 걱정돼동성애자일까 봐.”


아, 결혼하지 않겠다 말하는 순간 난 당신에게 ‘쓸모없는 딸’이구나. 그렇게 당신이 원하는 SKY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왔고, 진로에 대해서도 단 한 번도 게으름을 부린 적이 없는 내가, 쓸모없어지는구나. 당신은 내가 원하지 않는 삶을 사는 것보다 ‘결혼 못 하는 딸’이 되는 게 더 무섭구나. 동시에 눈앞에 많은 것들이 어른거렸다. 바이라고 커밍아웃했지만 어머니가 애써 무시한다고 털어놨던 친구, 서울 퀴어 문화축제에서 자원 활동가로 활동했을 때 보았던 많은 사람들. 스쳐 지나갔던 고등학교 동창과 중학생 게이 커플. 손을 꼭 잡고 있었던 한국-인도 여성 레즈비언 커플. 그 많은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 후심장에 칼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그때 나를 위로한 것은 한국의 모녀 관계를 솔직하게 담는 소설과 드라마들이었다. 남자 형제나 아버지 등 남성 가족 구성원이 설정에 빠져 있다는 점에서 가능한 서사들이었지만, 나에게는 오히려 그래서 더 공감되었다.  소설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사람 많은 스타벅스에서 펑펑 울어버리고 말았다. 레즈비언 대학 강사 딸과 몰락한 중산층 초등학교 선생 엄마의 관계를 보면서, 내 미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딸에 대하여>는 유독 읽기가 괴로운 소설이었다. 대부분 모녀관계를 담은 콘텐츠들은 딸의 입장에서 서술되는 경우가 많지만, <딸에 대하여>는 엄마의 입장에서 서술된다. 그래서 더 괴로웠다. 

소설 속 화자의 말이 꼭 엄마의 말처럼 들렸다. 


“네가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이미 많이 들었다. 무슨 말을 또 얼마나 해서 가슴에 대못을 치려는지 모르겠지만. 나한테도 권리가 있다. 힘들게 키운 자식이 평범하고 수수하게 사는 모습을 볼 권리가 있단 말이다.”
- 66p. 
“정말 속이 상해요. 그 애는 왜 평범하게 살려고 하지 않을까요. 왜 그런 노력조차 안 할까요. 나는 왜 그런 애를 낳았을까요. 내 딸은 하필이면 왜 여자를 좋아하는 걸까요.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한번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왜 나는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 84p. 


인생 드라마로 뽑는 <디어 마이 프렌즈>에는 더더욱 공감했다. 순수한 소녀 감성의 전업주부 조희자와 딸만 바라보고 사는 억센 장난희를 보면 엄마가 떠올랐다. SKY 어문과를 나왔지만, 프리랜서 번역가이자 작가로 살아가고, 사고로 장애인이 된 연인 연하와 결혼하지 못한 박완을 보면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사람들은 도피처로 유부남 선배 동진을 만나던 박완을 욕했지만, 나는 도저히 욕할 수 없었다. 부모의 반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지 못한 언니를 지켜보면서 그 상황을 너무나 이해했으니까. 


<디어 마이 프렌즈>에서 수십 번을 봤지만 볼 때마다 우는 장면이 있다. 동진 선배를 만나던 박완은 엄마 장난희에게 결국 들키고 만다. 그러나 박완은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장난희에게 6살에 왜 동반자살로 자신을 죽이려 들었냐고 묻는다. 자신이 신체 장애인이 된 연하를 버리고 엄마에게 돌아왔노라 고백하면서, 박완은 노트북과 유리병을 집어던지면서 절규한다. 



“난 엄마 거니까. 엄마가 하지 말란 짓은 못 하지. 엄마가 장애인 싫댔지. (중략) 여섯 살 때, 할머니 집 앞 들판에서... 약 먹을 때 내가 분명히 알았거든. 나는 엄마 거구나.... 그러니까, 무서워도, 약을 먹으라면 먹어야 하는 거구나....”
“잘못했다 그래, 나한테. 내가 엄마 거야? 엄마가 낳았으니, 엄마가 죽여도 돼? 말해, 나한테 왜 그랬어? 말해, 내가 왜 엄마 거야?! 왜 그랬어 나한테! 내가 연하랑 헤어진 건 다 엄마 탓이야! 내가 이렇게 된 거 다 엄마 탓이야! 놔, 이거 놔. 난 엄마가 정말 싫어!!!”

- tvN <디어 마이 프렌즈> 9화 中


도서관 화장실에서 몇 시간을 울던 나를 도와준 건 아빠와 나의 10년 지기 친구였다. 친구는 자신의 자취방을 보증금 없이 월 20만 원에 주겠다고 말했고, 아빠는 원하면 집에서 나가 살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박완처럼 엄마에게 소리 지를 자신은 없었지만 집을 나올 자신은 있었다. 


그렇게 <딸에 대하여>의 딸처럼 집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럼에도,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엄마와 화해했다. 그것도 아주 허무하게. 


인내심은 여전히 내가 엄마보다 한 수 위였다. 4학년 1학기가 끝난 방학에, 엄마는 ‘세상 시름을 다 얹은 것 같은 얼굴’ 좀 하지 말고 뭐가 문제인지 말하라고 했다. 나는 결국 울면서 말했다. 더 이상 못 견디겠다고. 엄마랑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고. 의외로 엄마는 잘못을 인정했다. 성소수자 발언은 스스로 기억도 못하고 있었고, 다 잘못했다고 말했다. 내가 심장내과에 가서 진료까지 받을 정도로 아팠던 점도 한몫했던 것 같다. 


그 사건은 엄마와 내 관계의 전환점이 되었다. 나의 두 번째 휴학도, 졸업 학년에 들어 갑작스러운 진로 변경에도 엄마는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엄마 입에서 “네 인생이지”라는 말이 나오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렇게, 나는 억압의 문턱을 넘었다. 




엄마는 왜 내 억압자가 되었을까. <스카이캐슬>에서 자식의 교육에 앞장서는 사람들은 엄마다. 아들과 딸 대신 입시설명회에 대신 참가하고, 공부하는 자식을 위해 간식을 일일이 만들고 챙겨주는 사람 역시 엄마다. 그러나 ‘자식이 대학을 잘 가야 한다’는 명제가 과연 엄마 개인에서 출발하는가? <스카이캐슬> 속 한서진이 그토록 첫째 딸을 서울대 의대에 보내고 싶어 하는 이유는, 남편 강준상의 집안에서 인정받기 위함이다. 한서진의 딸 예서 역시 서울대 의대에 가고자 하는 이유가 엄마에게 있다. 예서는 사람을 살리고자, 하다못해 안정적인 직장을 원해서 서울대 의대를 가려는 것이 아니다. 예서의 가장 큰 동기부여는 “서울대 의대에 가서 할머니가 엄마를 무시 못 하게 해야지”다. 그래서 한서진과 예서의 욕망은 서로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딸에 대한 엄마의 억압은 사회가 여성의 커리어를 막고, 가정 내에서 ‘엄마’로서의 역할을 강요하면서 시작된다. 그 사이, 양육자의 역할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아버지들은 방관자가 된다. 


한때 차별받는 딸이었던 엄마가 내 억압자가 된 것은, 가정에서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로부터 끊임없이 물려 내려온 ‘여성’의 역할이 엄마에게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항상 공부 잘하는 첫째 오빠만 편애했던 할머니를 엄마는 막내딸로서 미워했지만, 나에게 쏟아부었던 숭배 혹은 자아 의탁에 가까운 사랑이 억압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오랫동안 몰랐다. 영화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 속 주인공 칠월의 어머니는 딸에게 말한다. 


“여자의 삶은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가는 것밖에 없다.”


엄마는 집에서 벗어나는 삶을 겪어본 적이 없다.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박탈당했다. 수많은 어머니들이 딸에게 말하는 “나처럼 살지 마. 그래도 결혼은 꼭 하고.”라는 말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어머니는 딸들이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삶을 이루길 바란다. 이는 가부장제의 삶에서 벗어나는 커리어의 바람도 있지만, 동시에 어머니들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역할도 딸이 완벽하게 수행하기를 바란다. 이로 인해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된다. 


그래서 이제는 엄마가 나의 완전한 억압자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렇기에 설득이 가능했던 것이다. <딸에 대하여>의 엄마가 결국은 딸과 그의 동성 애인과 간병인 젠의 장례식을 함께 치른 것처럼. <디어 마이 프렌즈>의 장난희가 결국은 박완을 연하가 있는 크로아티아로 떠나보냈던 것처럼. 엄마에게 할머니에게서 차별받은 엄마, 결혼과 함께 커리어 펼칠 기회를 인생에서 놓쳐버린 엄마의 모습이 있다는 것 역시 안다. 엄마가 <82년생 김지영>과 <딸에 대하여>를 읽으며 나를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도 안다. 


서울 국제 여성영화제에서 영화배우이자 와이파이를 발명했던 여성 헤디 라머의 전기 영화, <밤쉘>을 보았을 때 엄마를 떠올렸다. 문과생이었지만 지금까지도 발명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나의 엄마. 지금은 삼성이고 LG고 쏟아내는 가정용 의류 드라이 세척기를 20년 전에 생각해냈던 엄마를 헤디 라머에서 떠올렸다. 


그래서 한때 나의 블로그 프로필 사진은 헤디 라머였다. 


가장 좋아하는 헤디 라머 사진


다시 서점에 수두룩한 모녀 관계 책과 드라마로 돌아가자. 교보문고에서 중요한 코너를 자리할 정도로 많은 모녀 관계 책들은, 이제야 모녀 관계가 제대로 조명받고 있다는 증거다. 신화에서도 부자, 부녀, 모자 관계에 밀려 잘 등장하지 않고, 나와 봤자 애틋하게 등장하는 모녀 관계는 이제야 그 복잡한 애증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이제야, “친구 같은 딸은 폭력”이라는 말이 사회에 들리기 시작했다. 


그 수많은 애증 관계 중에 나의 이야기를 이렇게 써 내리는 것은, 애증의 모녀 관계를 겪는 사람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다. 나와 비슷한 문제를 겪는 엄마와 딸은 너무나 많기에 엄마와 딸들은 혼자가 아니다. 


그래서 말하고자 한다. 

내일이면 다시 엄마와 치고받고 싸우고 우는 과정을 다시 반복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해법은 존재한다고. 

수많은 엄마와 딸들은, 우리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충분히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