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움직일 때의 쾌감이란
“피구공을 가장 잘 피하는 애”
나는 운동을 좋아한다. 그리고 좋아했다.
내 기억에서 처음 했던 운동은 발레다. 미국에서 살 때 주에서 운영하는 발레단의 발레 스쿨을 열심히 다녔다. 여자아이들이 가장 우아하게 할 수 있는 운동이지만, 내가 예전이나 지금이나 무용이라는 장르를 좋아하는 데에는 이때 발레를 배운 게 클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에 와서도 발레를 배웠는데,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조금 뻣뻣하지만 표현력이 좋다는 칭찬을 듣고는 했다.
한국에서 처음 배운 운동은 수영이다. 지금은 그렇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때만 해도 체벌이 ‘사랑의 매’로 여겨지던 시대라 엄한 수영 선생님에게 매번 맞아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발레와 달리, 수영을 처음 배울 때에 있어서는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 워낙 바다를 좋아해서 지금도 수영을 좋아하고 많이 활용한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러나 나와 비슷한 나이의 여자들이라면, 학창 시절에 가장 많이 했을 운동은 피구일 것이다. 누군가는 남자아이들이 드넓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할 동안에 여자 아이들은 좁은 곳에서 피구를 했다고 분노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피구가 그렇게 나쁜 기억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팔 힘이 약해서 공을 잘 던지지는 못했지만, 남자아이들이 함께 껴서 피구를 해도 최후까지 잘 살아남는 애였기 때문이었다. 공을 열심히 던져도 잘 피해갈 때 다들 분한 얼굴로 쳐다보고는 했는데, 그때는 그게 그렇게 짜릿했다. 공을 이리저리 잘 피하는 데다, 공을 던지는 사람에게서 뒤돌아 있어도 공을 피해서 별명이 ‘피구 할 때만큼은 뒤도 보이는 애’였다.
지금 돌아와서 생각하면, 그 별명이 운동할 때 나의 첫 자부심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운동을 하려면 넘어야 하는 것들
물론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맘 편하게 운동을 한 기억이 없다. 그나마 재단 사정이 좋은 사립 학교였어서 간단하게 골프도 배워보았지만, 운동보다는 친구들과 수다를 떨고 드라마 이야기를 하는 게 보편적인 여고를 다녔다. 대학 입시에 대한 부담은 덤이었다. 가끔 아빠와 수영장을 가고는 했지만, 그마저도 고3이 되고 나서는 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모든 것은 ‘대학에 가고 나서’로 미루어지던 시절.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듯이 ‘대학에 가면’이라는 전제가 항상 이루어지지는 않는다. 대학에 가서 살이 빠지고 예뻐졌다는 소리는 조금 들었지만, 아쉽게도 1학년 때 학교의 좋은 헬스 시설을 즐기지는 못 했다. 그나마 캠퍼스나 집 주변에서 조깅을 하거나 배드민턴 수업을 듣기는 했지만, 여전히 운동에 재미를 들이지는 못 했다. 피구는 철 지난 운동이 되어버렸고, 내 또래 여자 아이들은 몸에 근육이 생기는 걸 무서워했다. 원피스가 맞지 않을까 봐, 여자 몸에 복근이 생길까 봐 무서워했다. 그다지 멀지 않은 2014년도만 해도 그랬다.
하늘을 보고 물에 몸을 담글 때
자타공인 워커홀릭이라고 불리는 내가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을 때는 바로 미국 교환학생 시기였다. 캠퍼스에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전거를 타고 이동을 하고, 캠퍼스에 3개의 수영장이 있는 곳은 운동에 습관을 들이기에는 천국이었다. 무용학과가 따로 있는 종합대학이었기에 비전공자를 위한 현대무용 수업도 수준급이었다. 현대무용 수업 2를 들을 때에는 미국의 Alvin Ailey 부단장 출신 선생님이 가르쳤는데, 그분에게 복근 운동을 배울 때의 고통스러움이란. 그러나 그 시기에 다시 운동을 처음 배울 때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일부러 공강을 만든 금요일마다 학교의 무료 수영장에서 하늘을 보며 배영을 할 때, 무용 수업의 일환이었지만 Alvin Ailey Theater의 놀라운 공연들을 볼 때, 산을 오를 때의 즐거움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미국 교환학생에서 남미사 수업, 좋은 친구들 등 다양한 것들을 얻었지만 운동할 때의 즐거움 역시 중요한 수확이었다.
다시 넘어야 하지만
그 이후로 한국에 돌아와서도 다행히 습관을 유지했다. 학교 헬스장에 등록해서 틈틈이 러닝머신에서 뛰었고, 예술사회학 수업에서는 직접 무용 대중화를 주제로 팀 보고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대학 정규 학기는 끝나고 코로나 시국에서 취준을 하는 지금도, 여전히 운동이 즐겁다. 분명 변명해야 하는 순간들이 있기는 하다. 암 투병 이후로 50kg을 넘어본 적이 없는 엄마에게 내 운동을 설명할 때가 있다. 그러나 내가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가 바뀐 점도 분명히 있었다. 주변에 주짓수를 배우는 친구들이 늘기 시작했다. 주짓수와 태권도를 배우면서도, 여전히 여자 팀 스포츠는 대학에서 크게 발전하지 않을 것 같아 아쉽다고 말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나에게, 그리고 나의 친구들에게 운동은 하나의 정체성이 되어갔다.
어제는 오랜만에 치과를 가고, 가족들과 외식과 쇼핑을 하고, 친구와 뮤지컬을 보느라 운동하지 못한 하루였다. 그러나 오늘은 분명히 집에서 스트레칭이라도 하려고 한다.
나는 운동으로 다져진 내 허벅지와 팔 근육이 좋다.
시대를 모르고 한국의 여성복들은 계속 사이즈가 줄어들지만, 나는 여전히 뻐근한 나의 근육이 좋다.
그저 그 근육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요소라는 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게 조금 아쉬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