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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녕 Oct 28. 2016

전등을 켜기 위해 꺼둔 사람들의 이야기

<혼술남녀>를 보내며

1.  드디어 월요일, 화요일 밤마다 기다리던 <혼술남녀>가 끝났다. 16부작이라는 게 정말 아쉬울 정도로 본방을 그렇게 챙기면서 봤는데. 이제는 “퀄리티 떨어지게”를 반복하던 진 교수도, 너무 착한 탓에 ‘노그래’라 불리던 박하나도, 가난 때문에 궁상 떨고 알바하는 공시생 동영이도, ‘공부나 하시지’를 남발하던 채연이도 매주 만날 수 없다. 항상 진 교수의 혼술(이라 쓰고 먹방이라 읽는다) 오프닝도 볼 수 없는 게 너어무 너무 아쉽다.아, ‘너어무 너무’를 쓰던 원장님도 무지 그리울것 같다.


2. 나는 <혼술남녀>를 첫 회부터 보지 않았다. 본방은  6, 7회부터 봤다. 2회 때 등장했던 동영이와 5년 만난 여자친구(aka 하연수)의 씬이 각종 SNS에서 엄청난 화제가 되면서 궁금해졌다. 지상파 드라마들은 퓨전 사극으로 현실도피에 정신 없는데, Tvn은 왜 미쳤다고 노량진을 배경으로 9급 공무원 공시생들은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안 그래도 우리가 지독히 맞닿아 있는 현실을, 굳이 드라마에서까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할까. 더불어 노량진 강사들의 삶을 사람들이 궁금해 할까.


3. 는 내 기우에 불과했다. 이 드라마, 정말 대본 찰 지게 잘 쓴다. 서울에서 신림과 더불어 암울하기로는 다섯 손가락에 꼽는 동네인 노량진을, 참 재밌게 풀어낸다. 다른 대학 동창들보다는 조금 늦게 노량진에 입성한 공명이가, 기범이와 동영이와 함께 노량진 오락실에서 노는 장면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처가에 들어가기 싫어하는 원장님도, 남 동창회 몰래 왔다가 들켜서 쫓겨나는 공시 3인방도, 1타 강사인 진상한테 ‘노그래’ 소리를 듣는 초짜 박하나도. 덕분에 항상 <혼술남녀>를 보고 나면 당장은 웃는 얼굴로 침대에 들어간다.


4.    그러나 웃는 것도 잠시. 이 드라마, 정말 현실적이다. 이 드라마를 보게 된 계기인 동명이와 여자친구의 이별 씬도, 기범이가 할머니 생신잔치에 가지 못해서 옥상에서 술에 취한 채로 춤을 추는 장면도, ‘진상’이라 불리던 진정석이 알고 보니 자기가 믿던 대학 선배들에게 두 번이나 배신 당했다는 진실도. 지독한 우리의 현실을 담고 있다.


5.    박민규의 소설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모든 사람은 얼굴에 전등이 있다고.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 전등이 켜지는데, 우리가 사랑을 하지 않는 이유는 모두 전등이 꺼진 사람들의 얼굴만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6.    <혼술남녀>는 얼굴에 전등이 꺼진 사람들의 드라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다시 전등을 켜기 위해서 전등을 꺼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공명이는 박하나를 짝사랑하지만 ‘시험에 붙은 후에 쌤의 남자친구가 될게요’라고 말한다. 동영이는 이미 취직한 여자친구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5년 동안 만났던 인연을 잠시 끊는다. 기범이는 정채연을 꽤 오래 짝사랑했지만 시험 때문에, 그리고 엇갈린 인연 때문에 맘을 접는다.

정채연이야 말로 공시생들 중에서 ‘전등을 꺼둔 사람’에 제일 가깝다. 명문대를 나왔지만 취업이 안 되어서 9급 공무원을 준비하고, ‘노량진까지 왔으면 공부나 하시지’만 냉정하게 말하는 정채연. 공명을 만나고 잠시 전등을 킨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그 역시도 다시 꺼진다. ‘빨리 노량진을 떠날 거야’라는 명분 때문에.


7.    노량진 강사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겉으로는 성대모사나 하는 비인기 강사였던 민진웅은, 남몰래 홀어머니를 뒷바라지했고 그의 전등은 ‘가짜’였다. 섹시 컨셉을 앞세우던 황진이는 5년 사귄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지 못해서 안달이다.겉으로는 모자란 것 하나 없는 진정석도, 사람에게 상처받아 항상 전등을 꺼둔 채로 혼술을 했다. 박하나 역시 굳은 다짐을 하고 노량진에 들어왔지만, ‘노그래’라 불리는 현실에 전등이 깜빡깜빡한다.

 

8.    때문에 이 드라마를 보고 나면, 처음에는 웃다가 숙연해졌다. 대학교 삼학년, 아니 ‘사망년’인 내게도 <혼술남녀>의 등장인물들처럼 ‘전등을 꺼둔 사람들’, 소중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언젠가 전등을 다시 켜기 위해서 전등을 끈다. 언제 다시 켜질지도 모르는 미래를 위해.


9.    그리고 드라마 속의 정채연처럼, 예전처럼 사람들을 잘 보지 못한다. 다들 제 갈 길 가느라 바쁜 현실을, 이 드라마는 ‘혼술’로 표현했다.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직업이라서 혼술이 좋다는 진정석이지만, 사실‘혼술’은 드라마에서 이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보고 싶은 사람을 보지 못할 때, 내 맘을 알아줄 사람이 없을 때, 혼술이 날 위로기 때문에 사람들이 혼술을 한다. 혼술을 하는 드라마 속 인물들은, 다들 전등이 꺼진 진솔한 모습으로 술을 마신다. 그렇게라도 위안을 받고 싶어서.


10.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내 사람들을 떠올렸다.

 

나는 한때 나와 같은 길을 가고 싶어했던,

그러나 ‘국가를 고민하는 철학자’가 되고 싶다며 공부를 하는 친구를 떠올린다.


나는 같은 길을 가고 싶어 했던,

그러나 이제는 ‘뭘 해야할지 모르겠어, 돈이 최고야’라 자조적으로 말하는 친구를 떠올린다.

 

나는 내년이면 이제 신림에 들어갈 것이라며,

같이 신림 들어가는 행정학과 친구가 두 명이나 있다며 잘 되었다고 말하는 친구를 떠올린다.

 

나는 한때 눈부시게 웃던,

그러나 마주칠 때마다 하루하루 표정이 무너져 가는 그대를 떠올린다.


11.  그리고 그들이 생각날 때쯤, 조금씩 눈물이 나기 시작한다.

그들이 가여워서 인가. 단순히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그들이 "나"고, 계속 전등을 유보할 수 밖에 없는 “우리”다. 그래서 눈물이 나는 게다.

그래서 이 드라마가 오래오래 기억날 것 같다.

전등이 꺼졌음에도 불구하고 울고 웃는, 우리를 담아준 감사한 이야기라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등을 켤 수 있을 것이라는, 따스함까지 있는 이야기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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