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쎈여자 도봉순>: 한국드라마와 페미니즘, 그 사이에서.
※ 이 리뷰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해당 드라마의 스포가 있습니다.
작년까지 해도 인생드라마로 뽑던 TVN <혼술남녀> 종영 이후 마음을 사로잡는 드라마가 없었다. 학창 시절만 해도 기기전결로 끝나는 영화보다 질질 끄는 드라마가 낫다고 생각했는데, 대학 와서 오히려 참을성 있게 드라마 보는 습관이 사라졌고 그냥 한번에 보고 끝내는 영화나 예능이 편해졌다.
그러다 우연히 JTBC <힘쎈여자 도봉순> 홈페이지를 뒤져보았다. 방영 첫 주가 지났을 때고 어쩌다 찾아보았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그러나 ‘프로그램 정보’와 ‘등장인물’을 누르는 순간 반쯤 경악 섞인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사건의 범인을 분명히 ‘여성혐오자’로 규정하는 것에 1차 충격. 드라마 포스터를 보면서는 더 충격받았다. 여성배우가 타이틀 롤(Title Role)에다가 이런 구도의 포스터가 한국드라마에서 나온다고? 진짜 정말 레알로???
도봉순의 직장상사 오동병 팀장(=오돌뼈)가 도봉순에게 하는 대사가 있다. “너 뭐니?”
솔직히 기획의도는 맘에 들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보다 나은 점은 털 많고 근육 많은 것 밖에 더 있어?” 라고 외치던 여자 팀장은 늦은 밤 회식 후 남자 부하직원이 집 앞까지 에스코트해주는 아이러니에 놓인다. 왜냐 그 털 많고 근육 많은 남자의 물리적 힘이 나쁜 남자 인간들에 의해 나쁘게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그래서 털 많고 근육 많은 그러나 좋은 남자에게 한없이 끌린다. 자기가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어서다.
가부장제는 단순히 남성의 물리적 힘이 여성에 비해 강해서 생긴 게 아니다. 한때 정설이었지만 페미니즘 학계에서는 깨진 지 오래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한없이 끌린다는 설명도 틀렸다. 여성 성 소수자는 어디 갖다 두고?
그러나 등장인물 소개를 보는 순간 다시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만만치 않은데?
그렇게 <힘쎈여자 도봉순>을 3회부터 보기 시작했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카타르시스
<힘쎈여자 도봉순>은 기본적으로 사이다 컨셉을 내세웠다. 도봉순은 성추행범을 잡고, 왕따 당하는 학생을 구해주고, 여성 운전자에게 폭언하는 남성 운전자의 차를 부숴버리고, 심지어 용역깡패들을 1:30으로 이기는 여성 히어로다. 어디 힘만 그런가. 회사 면접에서 국민연금, 구내식당을 당당하게 물어보며 남자 회사대표에게 생리휴가(!)까지 물어보는 여성 캐릭터 본 적 있나. 그리고 이를 연기하는 배우가 다른 누구도 아닌 ‘뽀블리’, ‘국민 여동생’으로 불렸던 박보영이다. 그 결과, 그동안 한국드라마계에서 볼 수 없었던 ‘땅콩 같은 킹콩’ 여성 캐릭터가 탄생했다.
이에 ‘고구마가 없어서 너무 좋다’, ‘다른 드라마들은 여자주인공이 민폐 캐릭터로 나오는데 여기는 속이 시원하다’ 등의 반응이 주를 이룬다. 후반에서 여성혐오범죄 사건이 늘어지는 바람에 ‘고구마 먹었다’는 반응들이 생기긴 했지만 로맨틱 코미디와 범죄 스릴러와 B급 코미디가 결합된 소위 ‘병맛’ 여성 히어로물은 꽤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겉으로 보면 <힘쎈여자 도봉순>은 하나만 있어도 자극적인 세 가지 장르가 모여 어마어마하게 MSG가 많이 들어간 인공 식품 같다.
진짜 그저 ‘힘쎈여자’일까
그러나 이 드라마의 의의는 단순히 여성 히어로가 갖다 주는 카타르시스에서 멈추지 않는다. 박보영이 인터뷰에서 이야기하듯이, 이 드라마는 도봉순의 성장기라고 봐도 무방하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첫 장면은 고등학생 안민혁이 고등학생 때 친모의 묘지에 방문하는 장면이다. 이때 안민혁이 탄 마을버스의 타이어가 펑크 나서 사고가 날 뻔하는데, 괴력 소녀가 나타나서 구해준다. 안민혁은 그녀를 핑크후드괴력소녀로 첫사랑 비슷하게 기억하게 된다. ‘후드’ 기억하시라. 이 드라마에서 상당히 중요한 아이템이자 키워드다.
시청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이 드라마는 1회부터 4회까지 다소 인내심을 가지고 봐야 하는 드라마다. 캐릭터와 사건 설정을 잡고 들어가는 기간이기도 하지만, 이 기간은 ‘힘만 쎈’ 도봉순을 봐야 하는 기간이다.
도봉순은 극 초반에서 자존감도 없고 힘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캐릭터로 나온다. 그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도봉순의 힘은 가족 내에서도 쓰면 안 되고 알려지면 안 되는 것으로 취급 받는다. 죄가 없는 사람에게 힘을 쓰면 각종 역병이 생기고 힘이 없어진다는 징크스 때문이다. 도봉 순의 엄마 황진이는 고등학생 시절에 힘을 삥 듣는데 쓰면서 힘을 잃었고, 도봉 순은 극 전까지 평생 힘을 숨기고 산 것으로 나온다. 슬픈 설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데 고졸 출신으로 콜센터 직원, 백화점 직원, 심지어 농부까지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사는 20대 후반 여성이 바로 도봉 순이다. <힘센 여자 도봉순>은 젠더적 코드와 청년실업 코드가 공존하는 드라마다.
왜 배경이 게임 회사일까
이 드라마의 주된 배경은 게임 회사다. 여기서부터 다시 만만치 않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국이 아무리 세계적인 프로게이머를 배출하고 게임 산업이 발달해도 게임 회사를 배경으로 하는 한국 드라마는 찾기 힘들다. 그것도 여성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라면 더. 그동안 한국 드라마계에서 여성캐릭터 중심 드라마여도 사극이 아닌 이상 여초 업계를 배경으로 하는 게 통념이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2005)에서도 김삼순의 직업은 파티쉐였으며, 커리어 우먼들의 연애를 현실적으로 그려낸 <로맨스가 필요해> 시리즈(2011-2014)에서도 메인 여주의 직업은 각각 호텔업계, 작곡가이자 음악감독, 홈쇼핑 팀장이다. 덕만(이요원 역)과 미실(고현정 역), 그리고 천명(박예진 역)이 타이틀 롤로 등장한 <선덕여왕>(2009)는 정치'사극'이기 때문에 예외적 케이스다. 현대극 중에서는 그나마 정치계를 무대로 한 시티홀(2009)과 여형사가 주인공이었던 히트(2008)가 파격이었다. 현대극에서 게임 회사 배경이 가벼이 넣은 게 아니란 소리다.
도봉순에게 게임은 하나의 탈출구다. 현실 속에서는 힘을 숨기고 살아야 하지만, 게임 속에서는 새로운 자신을 만날 수 있다. 때문에 그녀는 자기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게임을 개발하는 것이 꿈이 되었다. 1회에서는 도봉순이 혼자 게임하는 장면과 봉순이가 여자인 친구 경심이와 함께 게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5회에서 도봉순은 아인소프트에 입장하는 순간, RPG ‘알베르탄 연대기’의 여왕 지나에게 경례하며 지나의 삼지창을 거머쥐는 상상을 한다. 여성 게이머 혹은 게임 매니아가 한국드라마에 잘 등장하던가? 괜히 넣은 장면일까?
<힘쎈여자 도봉순>은 도봉순의 히어로서의 성장과 게임 회사에서의 커리어 성장 모두를 담아낸다(정확히 말하자면 ‘담아내야 했다’지만). 고로 <힘쎈여자 도봉순>의 서사는 도봉순이 깡패들의 횡포를 참지 못하고 힘을 발휘할 때, 그리고 개인 경호원을 필요로 하던 아인소프트 대표 안민혁이 이를 목격하는 순간 시작된다.
도봉순 엄마 황진이: 모녀 관계의 페미니즘
도봉순은 단순히 고졸 20대 후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짠내 나는 캐릭터가 아니다. 사실 이보다도 도봉순 주변 인물들이 도봉순의 자존감을 무너지게 한다. 대표적인 두 캐릭터가 엄마 황진이와 서브남주 인국두다. 인국두는 연애 관계 파트에서 다루도록 하고, 이 파트에서는 도봉순과 황진이의 관계를 다루고자 한다.
필자는 작가가 직접 부모로부터 성차별을 경험했거나 모녀 관계의 페미니즘을 공부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황진이는 한국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가 딸을 어떻게 대하는지 매우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20살 레슬링 선수였던 도칠구와 힘 잃은 역도선수 황진이가 사고 쳐서 얻은 이란성 쌍둥이가 도봉순과 도봉기인데, 하필 둘의 능력치가 극과 극이다. 힘이 너무 쎈 봉순이와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하던 봉기, 공부에 영 흥미가 없는 봉순이와 의대 나와서 레지던트하는 봉기. 봉순이네 가족은 어머니가 서열 1위, 봉기가 2위, 봉순이가 3위, 그리고 아버지가 4위다. 봉순이 아빠는 항상 엄마에게 얻어맞기 일쑤고 황진이가 봉기와 봉순을 대하는 태도 역시 하늘과 땅 차이다.
황진이가 도봉순을 차별하는 장면은 연속적이다. 출산 후 의사가 봉순이 보고 “공주님이십니다.”라고 말할 때 황진이가 대답도 안 하고 “머슴 애는 아직 안 나왔어요?”라 되물을 때부터 차별은 시작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도봉순은 “너 또 PC방 갔지? 아무리 청년백수 300만 시대라고 해도 그렇지, 그 300만 명 중에 내 딸이 있을 줄이야. 야 너 그냥 시집가!”와 “봉순아 (과일) 그만 먹어라. 봉기 좀 먹게 놔둬.”등등의 잔소리 폭탄을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에게서 들어야 한다.
황진이가 도봉순을 구속하고 오지랖 떠는 자세는 2회에서 더 심화된다. 도봉순 옆에 ‘정신 나가고 돈 많은 놈’ 안민혁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저 직장 상사와 호두파이 가게에 같이 왔을 뿐인데 황진이는 민혁의 차에 타는 봉순이를 보며 “어머 상태가 너무 좋아, 부처님 만세!”라 외친다. 황진이의 도봉순 외박시키기, 시집보내기 프로젝트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황진이는 안민혁을 ‘안 서방’이라 부르고 합방을 시킨다며 무당에게 부적을 받아온다. 연이은 부담스러운 행동에 봉순이는 결국 7회에서 엄마에게 화를 내는데 이때 황진이의 본심이 제일 잘 드러난다.
봉순: “엄마! 엄마가 나 키울 때는 남자 믿지 마라, 남자는 다 늑대다, 그렇게 키워 놓고서는 이제 와서 이렇게 방생하면 내가 어떻게 적응해?”
진이: “저 남자야. 저 남자에게 너가 아껴왔던 모든 것을 다 주라고 기집애야.”
황진이는 딸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관심이 없다. 그저 힘을 숨기고 평범하게 ‘시집이나 잘 가서’ 자신을 대리만족시키는 게 도봉순 인생 최대 목표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봉순이의 연애사 역시 좋은 남자를 만나기 위해 아껴야 했던 하나의 카드로 취급받는다. 안민혁이 도봉순 대신 칼을 맞고 황진이가 병실에 찾아왔을 때, “봉순이 드릴게요!”라 말하는 황진이는 그저 도봉순을 물건 취급할 뿐이다. 이때 도봉순 본인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황진이는 이 드라마의 과장된 분위기에 맞게 극대화되었을 뿐 현실적인 캐릭터다.
그런 도봉순과 황진이의 갈등이 누적되다가 결국 7회 중반에서 봉순이의 설움이 폭발한다. 봉순이가 고딩들을 괴롭힌다고 오해한 엄마가 구박하면서 도봉순이 오열하는 장면이 그렇게 탄생했다.
"엄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하는 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막 때리고 보는 건데. 나도 아퍼! 엄마는 왜 항상 봉기만 감싸고도는 건데. 소고기도 맨날 봉기 주고 나는 닭고기 주고, 맛있는 것 있으면 숨겼다가 봉기만 주고. 과일도 썩어가는 건 나주고 새 거는 봉기 주잖아. 나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같은 자식인데 왜 나만 차별해? 엄마도 여자면서 왜 나한테만 못 되게 구는 건데 왜!”
이 씬에 공감하면서 울었다는 반응이 꽤나 많다. ‘같은 장녀로서 너무 공감 갔다’, ‘봉순이는 아빠라도 잘해주지’부터 ‘봉기 반만 닮으라는 대사에 눈물났는데 가족들이랑 보고 있어서 티를 못 냈다’는 반응까지.
재미있는 점은, 7회에 등장한 외할머니의 입담을 보니 황진이의 젊은 시절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황진이의 세 오빠들도 다 지검장, 성공한 캐나다 이민 생활, 선생님 등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도봉동 친구들에게 오빠들에 대해서 말한 적이 없다. 고스톱을 치면서 황진이의 세 오빠 이야기를 늘어놓는 할머니와 화제를 돌리려는 황진이. 모계혈통 힘이 있는 집안이라고 한들 가정 내에서 여자들이 받는 차별은 다름없고 계속 이어져 내려왔다는 설정, 왜 이리 리얼하냐.
이 드라마는 복합 장르고, 그중 범죄 스릴러는 두 가지 사건으로 구성된다. 하나는 안민혁의 협박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연쇄 여성 납치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도봉순을 성장하게 만들지만 극의 끝까지 늘어지고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사건은 후자다. 더 나아가 여성혐오범죄는 도봉순이 각성하는 계기가 된다. 필자는 피해자의 비명을 들는 순간 우산과 맥주를 떨어뜨리고 비를 맞는 도봉순의 3회 엔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범인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여성혐오범죄’를 전면으로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범죄 스릴러가 그렇게 탄탄하게 만들어진 드라마가 아니다. 여성혐오범죄를 다룬 방식도 그렇게 만족스럽지 않다. 다만 이 드라마는 B급 코미디 코드와 뛰어난 캐릭터 설정이 엉성한 스토리 라인을 보완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백민경 작가가 종연 후 인터뷰에서 스스로 인정한 바이기도 하다. 필자가 여성혐오범죄 설정에서 칭찬하고 싶은 파트 역시 범인의 캐릭터 설정이다.
사이코패스 범인이 식상하고 새로울 것 없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다. 어느 정도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는 범인의 컨셉이 ‘여성혐오자’를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범인은 ‘겉으로 보기에 멀쩡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황진이는 “그 범인 분명히 못 생겼을 거야.”라고 말했지만, 범인 김장현 역할을 맡은 배우 장미관은 모델 출신이고 <힘쎈여자 도봉순> 출현 이후 ‘도봉순 임시완’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훤칠한 외모를 자랑한다. 젊은 나이에 폐차장 사장이 되고 약국의 약사와 일상적인 대화를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실제로 백미경 작가는 원래 김장현 역할을 못 생긴 사람으로 설정하려다가 오디션에서 장미관을 보고 설정을 바꿨다고 한다. 여성혐오자가 꼭 못 생길 필요는 없지 않느냐며. 15회에서 범인의 몽타주가 공개 후 행인들이 지나가며 ‘멀쩡하게 생겨서는’ 말하는 씬은 꽤 중요하다. 돈 많고 잘생긴 사람도 얼마든지 여성혐오한다. 자신보다 스무 살 어린 중학생 여성 아역배우에게 ‘오빠’ 호칭을 강요한 배우 강동원부터 탑 남성 연예인들의 끊임없는 성매매 및 성폭력 사건들만 보아도 그러하다.
여기서 멈췄다면 평이한 설정이지만, 김장현의 말과 행동 역시 생각보다 평범하다. 두 번째 피해자의 몸을 닦으면서 “2키로만 더 빼자. 다 예쁜데 종아리가 좀 굵어.”는 말도, 피해자들에게 “하루 한 끼만 먹자. 난 말 많은 거 딱 질색이야.”라 소리 지르는 것도, 인국두의 여자친구 조희지에게 도청기를 부착한 후 목소리를 감상하는 장면도, 도봉순에게 전화하며 웃으면서 “이쁘게 하고 나와~.”라 말하는 것도 생각보다 너무 평범하다. 가짜 용의자가 등장하자 “감히 내가 한 것을.”이라며 분노하는 장면까지도. 평범하지 않다고?
이 땅에 사는 수많은 여성들은 자신의 가족, 친구, 지인, 그리고 애인에게서 김장현의 말을 듣고 수긍하기까지 한다. 한국에서 여성은 생리 컵을 편하게 사지 못하지만 남성은 얼마든지 몰카를 살 수 있는 사회다. 한국에서 소라넷 등의 사이트로 여성 화장실 몰카를 보며 성적 쾌감을 느끼는 남성은 수치로 봐도 한 둘이 아니다. 최근 어떤 대통령 후보는 강간 모의를 자신의 자서전에서 대학 시절 좋은 추억 따위로 포장했다. 한국 사회는 여성을 동등한 주체로 대하는 사회가 아니다.
김장현은 생각보다 평범하다. 당신 역시 김장현 일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드라마의 고질병, 범죄의 포르노화
이 드라마의 여성혐오범죄 파트에서 아쉬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사이코패스 범인 설정, 엽기적 사건 전개 등등) 가장 크게 다루고 싶은 문제가 있다. 바로 범죄의 포르노화다.
한국 영화/드라마의 범죄 포르노화는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성범죄라면 극대화되는 건 뽀너스다. 성범죄 사건을 다루며 흥행했던 대표적인 한국영화 <도가니>, <한공주>도 이 이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특히 초반에서 범죄 포르노적 기법과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2회에서 김장현은 첫 납치 피해자의 옷을 다 벗기고 자신이 준비한 웨딩드레스를 입힌다. 6회에서 범인의 정체가 처음 밝혀지는 씬에서 김장현은 자신의 얼굴을 보이며 피해자에게 강제적으로 스킨십을 한다. 7회에서는 두 번째 피해자의 손발을 묶고 성희롱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전형적으로 성범죄를 포르노화하는 장면들이며 꼭 필요한 장면들이 아니다. 성범죄의 심각성을 드러내려면 범죄 사실만 드러내면 되는 것이지, 자세한 디테일까지 넣으면서 무서운 음악이나 감성적인 음악을 삽입할 필요는 없다. 더구나 이 드라마의 2회에서는 납치당하기 전의 발레 학원 선생이 탈의하는 장면도 있다. 여성혐오범죄 다루는 드라마에서 굳이 이런 씬 넣어야 하나?
<힘쎈여자 도봉순>는 그래도 시청자들의 피드백으로 인해 후반부로 가면서 이런 장면들을 많이 없앴다. 영화라면 없앴을까? 왜 성범죄의 포르노화가 위험한지, 다른 문화권의 영화와 드라마는 어떻게 성범죄 씬을 금기화하는지에 대해서는 필자가 구구절절 말하는 것보다는 더 잘 정리된 글 두 편을 읽어보시는 것을 추천한다.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 여성 간의 연대
애청자 입장에서 한 가지 변호하자면, 이 드라마는 끝까지 여성혐오범죄에 있어서 만큼은 여성의 주체성과 여성 간의 연대를 놓치지 않았다. 만약에 이것까지 놓쳤다면 정말 실망이었겠지만 다행히 그 지경까지는 안 갔다.
이 드라마에서는 쫓아오는 남성에 대해 여성이 공포를 느끼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인상 깊은 장면을 하나 뽑자면 5회에서 도봉순이 도봉동을 혼자 돌아다니던 장면이다. 4회에서 범인이 친구 경심이를 납치하려다가 도망간 이후다. 도봉순은 범인을 잡으려고 일부러 도봉동을 혼자 돌아다니는데, 이때 누군가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을 느끼고 공포심을 느낀다. 그러나 도봉순을 쫓아오던 건 김장현이 아니라 안민혁이었다. 그것도 도봉순이 몽유병이라도 있나 걱정되어서 따라온 안민혁. 아무리 걱정되어서 따라왔다고 한들, 아무리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고 한들 알기 전까지는 느낄 수밖에 없는 여성의 공포감. 5회 엔딩은 도봉순이 안민혁에게 힘을 제대로 쓰고 싶다고 말하며 각성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여기서부터 드라마가 재미있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여성 피해자들 간의 연대도 주목할 만하다. 7회에서 첫 피해자가 벽을 두드려가며 다른 피해자들과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장면과 9회에서 다 같이 소리를 지르며 구조를 요청하는 장면은, ‘여적여(여성의 적은 여자다)’ 프레임을 쓰는 다른 한드에서 기대하기 어려울 걸. 봉순이가 피해자를 구해주는 장면에서도 피해자들은 서로를 부축해주고 가장 오래 갇혀 있었던 첫 피해자를 끌어준다.
무엇보다도 ‘힘쎈여자 도봉순’은 끝까지 사건을 해결하는 주도성을 갖는다. 다소 코믹하긴 했지만 안민혁의 협박범을 잡는 과정도, 납치된 여성들을 구해내는 장면도, 김장현이 아인소프트에 설치한 폭탄을 날리고 불꽃놀이가 벌어지는 장면도(역대급 B급 코미디였다), 인천항에서 철창을 던지며 김장현을 잡는 장면도 모두 도봉순이 주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도봉순의 주체성을 살리는 과정에서 경찰을 지나치게 무능하고 부패한 집단으로 묘사한 것이 스토리 라인의 허점이지만, 개인적으로 그렇게 걸리는 포인트는 아니었다. 애초에 쪽대본 체제로 굴러가는 한국드라마에 개연성을 크게 기대하지 않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경찰들이 아주 없을 거라고 생각 안 하거든.
그러나 필자가 지금까지 말한 요소들은 가장 주시한 바가 아니었다. <힘쎈여자 도봉순>이 허점이 많은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가장 열광한 포인트는 도봉순의 히어로 스토리도 아니고 여성 혐오범죄사건도 아니다.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 젠더적, 페미니즘적 요소가 가장 잘 드러나고 빛나는 포인트는 바로 러브 라인 설정과 연애 관계 묘사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그냥 삼각관계 아니야? 무슨 말씀을.
한국드라마하면 연애, 연애라면 한국드라마다. 러브라인 없이도 직장인들의 공감과 함께 히트 친 TVN의 <미생>(2014) 이후 러브라인 없는 <김과장>(2017) 류의 드라마들이 등장했지만 연애는 여전히 한국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서사 중 하나다.
한국드라마의 러브라인을 이루는 가장 큰 축은 삼각관계다. 여기서 조금 변형된 사각 관계나 더블 커플 라인도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연애 관계는 삼각관계로 진행된다. 이 삼각관계는 신데렐라 판타지를 토대로 하며 주로 가난하지만 밝은 메인여자주인공과 경제적 배경은 좋지만 까칠한 메인남자주인공, 그리고 메인 커플이 이루어지기 전에 메인여주와 썸을 타고 도와주지만 결국에는 키다리 아저씨로 남는 서브남자주인공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사각 관계가 추가되면 서브여자주인공은 셋 중 하나다. 악녀거나 쿨하거나 아니면 둘 다거나. 최근에는 <연애의 발견>(2014)의 안아림 같은 순진무구형도 등장했다.
지금까지 한국드라마 시청자들은 <파리의 연인>, <꽃보다 남자> 등으로 대표되는 신데렐라 스토리에 열광했지만 모두가 동의했던 건 아니다. 이 프레임의 부작용으로 생기는 계층이 있으니 일명 ‘서브 남주병’ 증세를 보이는 시청자들이다. 이들이 주장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아니 왜 서브 남주가 더 친절하고 잘 이해해주고 심지어 메인 여주랑 같은 진로를 선택하는 경우도 많은데 왜 항상 여주는 까칠한 메인 남주한테 가냐고! 메인 여주 그럴 거면 서브 남주 나 줘!”
일리 있는 말이다.
고전적 삼각관계에 변화를 시도한 한국드라마들이 없지는 않다. 둘 중 하나다. 메인남주가 메인여주와 동갑이거나 연하며 이해심 많거나, 서브남주가 훨씬 마초적이고 츤데레거나. 후자는 SBS의 <상속자들>(2013)의 최영도가 있고, 전자는 tvn의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2014)와 <마녀의 연애>(2014)가 생각나는데 두 드라마 모두 30대 커리어 우먼의 애환을 다룬 드라마들이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는 필자의 인생드라마 중 하나다. 여느 한드 작가들과는 다르게 잔인할 정도로 연애를 현실적으로 묘사하는 정현정 작가도 좋아하지만, 메인 남주 주완(성준 역) 캐릭터는 필자의 인생 남자 캐릭터다. 주완은 메인여주 신주연(김소연 역)보다 6살 어린 미국 교포 출신 천재 뮤지션으로 시즌1과 2의 남주들보다는 훨씬 서브 남주스럽다. 11회에서 강태윤(남궁민 역)에게 매달리는 신주연에게 부탁하는 대사는 지금도 필자의 한드 명대사 탑 10에 꼽힌다.
“당신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라고! 내가 아니라도 좋아.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 당신이 추운지 안 추운지 걱정해주는 사람. 당신이 필요한 게 뭔지 알아보는 사람. 저 자식은 그냥 나빠. 나쁜 남자는 그냥 나쁘고 나쁘고 나쁠 뿐이야. 아니야, 이런 거 다 거짓말이야. 그냥 나는 저 나쁜 자식에게 당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39살 주간지 마녀 팀장 반지연(엄정화 역)이 주인공이었던 <마녀의 연애>는 어떤가. 메인 남주는 무려 14살 어린, 한때 의대생이었지만 여자친구가 의료 사고로 사망한 후 일용직 알바를 전전하는 25살 청춘 윤동하(박서준 역)다. 극 후반에서 지연의 섹시 속옷 7종 세트 주문을 발견하고는 “당신의 짐승남이 되겠어. 앙! 어흥!”하며 장난치는 윤동하는 귀엽고 솔직하다.
그러나 이 러브라인에도 한계가 있다. 여기서 서브남주는 주로 메인여주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많은 ‘멘토’의 성격이 강한 캐릭터다.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에서 신주연의 홈쇼핑 회사 선배로 등장하는 강태윤이 그랬으며 <마녀의 연애>에서 한때 반지연의 약혼자였으며 기자 선배인 노시훈(한재석 역)이 그랬다. <응답하라 1997>의 윤윤제의 형 윤태웅도 마찬가지다. 이 부드럽지만 우유부단한 성격의 서브남주는 타 드라마에 비해 마초성이 떨어지는 메인 남주의 ‘연하남 or 동갑남의 직진성, 저돌성’을 부각하는 역할을 한다. 결국 마초적인 남성상이 메인 남주 포지션에 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킬링 포인트는 한국드라마의 삼각관계를 정면으로 뒤집는 승부수를 띄웠다는 점이다. 한국드라마에서 메인 여주와 메인/서브 남주의 나이를 동일하게 맞춘 설정은 고교 청춘물이 아닌 이상 잘 등장하지 않는다. 필자는 나이로 상하관계를 규정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받아들였다.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소위 ‘여자보다 여자 같은’(필자의 워딩이 아니다. 중앙일보 기사 참고.) 안민혁을 메인 남주로 설정하고, 그 대척점으로 마초적 남성상의 끝을 보여주는 강력계 신입 형사 인국두를 서브 남주로 설정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한국드라마 삼각관계 중 이런 설정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비슷한 케이스는 덕만X비담의 <선덕여왕>이나 덕선X택의 <응답하라 1988> 정도인데, 이는 원래 메인 남주 유신과 정환을 이어주려다가 중간에 바뀐 경우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처음부터 설정을 잡고 갔다. 단언컨대 이건 혁명이다.
마초적 남성상이 서브로 추락하는 순간, 인국두.
필자는 등장인물 설명에서 인국두가 메인 남주 느낌이 많이 난다고 생각했는데, 예상이 맞았다. 백미경 작가는 원래 러브라인을 배제한 채로 메인 남주를 인국두로 설정했다고 한다. 그러나 <힘쎈여자 도봉순> 대본에 박보영이 관심을 가지면서 드라마를 괴짜 만화에서 순정 만화 톤으로 바꿨고, 그 과정에서 탄생한 캐릭터가 또라이 게임회사 대표 안민혁이라고. 박보영X박형식 케미가 아니었다면 로맨스가 안 들어갔을 거라는 작가님, 감사합니다. 로맨스는 신의 한 수였습니다.
서브 남주 인국두는 어떤 캐릭터인가? 앞서 말했다시피 인국두는 메인 남주의 특성이 강한 서브 남주다. 메인 여주의 소꿉친구라는 설정도, 경찰대 출신 강력계 신입형사라는 직업도, 자신의 마음을 잘 깨닫지 못하는 캐릭터라는 점도 하나 같이 메인 남주의 특성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서 인국두는 그렇게 매력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인국두는 황진이와 함께 도봉순의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캐릭터다. 최소 10년 이상 인국두를 짝사랑한 도봉순에게는 인국두가 뱉는 말 한마디 한 마디가 코르셋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학생 때 인국두가 “나는 하늘하늘 코스모스 같은 여자가 좋아. 지켜주고 싶잖아.”라 말하는 순간, 도봉순은 “의롭지 않은 일에 괴력을 쓰면 역병에 걸린다는 사실보다 몇 백배는 더 무서운 국두의 말 한마디로 나는 더욱 힘을 숨기고 살았다.”라고 고백한다. 방과 후 수업도 수예반을 신청하여 인국두를 위해 목도리를 짜는 고딩 도봉순은 적나라하다.
성인이 되어서도 인국두는 여전하다. 봉순이의 힘을 알기 전까지 “봉순아, 너 남자 너무 쉽게 믿는다. 남자는 친절하면 바람둥이, 불친절하면 사기꾼 그런 종족들이야.” “치마는 왜 이리 짧어. 옷, 화장은 이게 또 뭐고! 너무 이쁘게 하고 다니지 마.” 등등 국두의 입에서 나오는 주옥(^^) 같은 대사들은 분명히 한국드라마에서 많이 나온 대사들인데, 그전과 다르게 매력이 없다. 27살 성인 도봉순이 안민혁의 집에서 머무른다고 하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고, 안민혁이 도봉순 대신 칼을 맞아도 “난 왜 그 사람 하나도 안 고맙냐.”라고 말하는 국두는 매력 없는 오지랖일 뿐. 오죽하면 ‘국두 하는 말 우리 아빠 같다’는 반응이 나오겠나. 이건 칭찬이 아니다.
인국두는 마초적 남성상이 서브남주 포지션으로 가는 순간 얼마나 매력이 없어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다. 일종의 미러링이다. 인국두가 여자친구 조희지(설인아 역)을 옆에 두고 있는 설정 역시 인국두의 매력도를 떨어뜨리기 위한 장치 중 하나다.
필자는 이 드라마 엔딩을 보고 리뷰를 쓸지 말지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인국두 쉴드다. 작가가 배우 지수에게 많이 미안했는지 봉순이와 국두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를 ‘사랑은 타이밍’ 포장을 하고 말았는데, 아무리 봐도 그건 아니다. 16회에서 봉기가 국두와 농구하면서 한마디 한다.
“내가 얘기했음 둘이 달라졌을까?”
한드 판타지와 다르게 그 어떤 여성도, 아니 그 어떠한 인간도 자신을 함부로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사람과 연애하면서 진정 행복할 수 없다. 그 사람이 우리의 ‘힘쎈여자 도봉순’이라면 더. 도봉순과 인국두는 타이밍이 맞았다고 한들 둘 중 하나였을 거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실체를 안 국두와 봉순이 서로 맞지 않아서 금방 헤어졌거나, 아니면 봉순이가 오랫동안 짝사랑한 국두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코르셋 안에서 낑낑거리는 관계를 불행하게 지속했거나.
같은 맥락으로 국두에게서 봉기로 마음이 옮겨가는 조희지의 감정선도 좋았다. 필자는 국두에게 "나 흔들리고 있어."로 헤어진 후, 봉기에게 "나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요. 나랑 5번만 만나봐요. 그러다 아니다 싶음 미련 없이 그만둬요 우리.”라 말하는 당돌한 조희지가 싫지 않았다. 조희지는 악하지도, 쿨하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결말에서 해외 오케스트라로 떠나면서 봉기랑도 헤어지는 조희지는 그저 조희지일 뿐.
안민혁: 진부한 듯하지만 새로운 메인 남주의 탄생
한편, 안민혁은 그동안의 한국드라마 메인남자주인공들과 비슷한 듯 다르다. 준재벌급 집안의 혼외자 막내아들이라는 설정은 진부하지만, 그는 전형적인 ‘실장님’ 캐릭터와는 다르게 21살에 가출하여 27살에 대형 게임회사 대표가 된 자수성가한 인물로 등장한다. 안민혁은 월요일과 목요일에만 출근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놀고먹는 부러운 인생을 살고, 서브남주 인국두에 비하면 마초성이 많이 소거된 캐릭터이다.
안민혁은 그만큼 솔직하고 쿨한 캐릭터다. ‘똘미녁’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또라이 캐릭터이기도 하다. 인국두를 짝사랑하는 도봉순에게 “누가 짝사랑해달라고 했나, 지가 해놓고 나쁜 놈이래.”라고 돌직구 날리질 않나, 도봉순에게 자신의 협박범에게서 지켜 달라며 “나 무서워.”라고 말하는 메인 남주라니. 때문에 이 드라마에서는 안민혁 캐릭터를 통해 기존 젠더 프레임을 패러디하는 장면들이 몇몇 등장한다. 그중 기억나는 장면은 2회의 아울렛 씬과 4회 전설의 보디가드 패러디 씬이다. 아울렛에서 도봉순에게 온갖 명품 쇼핑백을 떠넘긴 다음에 기껏 도봉순에게 아이스크림 하나 사주는 안민혁은 얄밉지만, 다른 한드에 대한 성별 패러디라 봐도 무방하다. 4회에서 새총을 맞은 안민혁을 도봉순이 영화 <보디가드> 패러디로 들고 가는 장면도 이 드라마의 명장면으로 뽑힌다. 이때 슬로모션으로 실눈 뜨고 보다가 다시 기절한 척하는 박형식의 연기가 압권.
안민혁은 도봉순을 대하는 방식 역시 인국두와 다르다. 5회에서 봉순이가 국두가 준 호출 팔찌를 보여주자 “호출할 일이 없어야 할 텐데 그지?”라는 대사는 무심코 지나가지만 꽤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다. 여성혐오범죄가 발생했을 때 도봉순에게 옷과 머리스타일을 바꾸라고 말하던 인국두와 범죄 자체가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안민혁은 다르다. 주로 메인 여주의 커리어를 돕는 서브 남주의 역할이 메인 남주 안민혁에게 넘어간 것은 역시 당연하다. 6회에서 봉순이가 진상 남자 운전자를 혼낸 후 안민혁이 훈련을 제안하는 장면이 이를 보여준다.
“내가 (영화 킹콩의) 여자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기왕 이렇게 각 세워본 거 제대로 쓰자. 너 훈련이 필요해. 내가 널 진짜 지나로 만들어 줄게. 너의 힘을 어떻게 쓸 수 있을지 연구해보자.”
연애 관계에서도 안민혁은 메인 남주가 안 할만한 대사를 많이 한다. “나 좀 좋아해줘.”라든지 “나 여기 서 있을 건데, 여기로 올래?”라든지. 더 많이 좋아하기 때문에 도봉 순에게 맞추어서 식사습관을 바꾸는 등 사소한 변화들도 보인다. 13회에서 봉순이 혼자 여자들을 구하고 나서 빠져나오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인국 두는 도봉 순에게 보는 족족 화를 내지만, 안민혁은 여자들을 구한 후 폐차장을 유유히 빠져나오는 도봉 순에게 얌전히 차 문을 열어준다. 회사 도서관에서 싸우면서 뱉는 대사는 더하다. “널 사랑하려면 다른 남자와 내가 달라져야 한다는 거. 네가 위험한 곳에 혼자 가는데 막을 수도 없고 막아서도 안 된다는 거.”는 주로 메인 여주가 뱉는 대사 아니던가.
탑 케이블 방송사 황금 시간대 드라마가 키스 신을 아낀 이유
안민혁의 특이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JTBC는 지상파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탑 케이블 방송사고, <힘센 여자 도봉순>은 금토 11시에 방영된 황금 시간대 드라마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인기 16부작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에서 메인 남주가 10회 말에서야 고백하고 12회에서야 키스 신이 등장한다. 그것도 매우 풋풋한(?) 첫 키스로.
그 전에 키스 신이 나올만한 순간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7회의 링에서 훈련하다가 마주 눕는 장면, 8회의 안전벨트 씬과 ‘한걸음’ 씬, 9회의 병실 씬, 10회 봉순이의 꿈속 로미오-줄리엣 씬까지 제작진이 원했다면 얼마든지 키스 씬으로 이어질 만한 씬들이 있었다. 심지어 9회 병실 씬은 봉순이가 눈까지 감고 기다렸는데 안민혁이 “들어가서 자.”라고 하는 바람에 시청자들의 아우성이 난무(...)했다. ‘안민혁 진짜 게이설’과 ‘안민혁 고X설’ 기타 등등.
혹자는 요즘 드라마답지 않게 순수한 사랑을 보여줘서 좋다고도 말했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어찌 됐건 연애는 당사자들만 아는 거고 처음 만난 날 스킨십을 하건, 키스를 하건, 섹스를 하건, 연애를 시작하건 타인이 간섭할 권리는 없다. 서로 간의 상호 동의만 있다면.
자, 한번 현실적으로 안민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당신은 한때 플레이보이였지만 회사를 키우느라 연애를 오래 쉬었다. 오랜만에 관심 가는 여자가 생겼는데 하필 그 여자는 최소 10년 이상 소꿉친구를 짝사랑했다. 그래도 다가가 보고 싶긴 하다. 이때 당신이 해야 할 일은?
①처음부터 들이대면서 반강제로 스킨십을 시도한다.
②옆에서 지켜보며 연애 상담도 해주다가 스킨십 강제하지 않고 타이밍 맞게 고백부터 한다.
당연히 ②다. 사람 사이의 관계, 특히 연애 관계는 상호 동의와 이해가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한국드라마의 연애 관계들은 상호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았다. 손도 아닌 손목을 잡고 여자를 남자가 끌고 가는 장면은 한드에서 흔하지만 해외 팬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폭력적인 장면이다. 메인 남주가 메인 여주에게 반강제로 키스하는 장면은 흔히 ‘기습 키스’ 혹은 ‘박력 키스’ 따위로 포장된다. 더 웃긴 건 처음에 놀란 여자 주인공이 가만히 있다가 키스에 반응한다. 제발 그런 연출 좀 하지 마. 그거 성폭력이란 말이야 이 새끼들아.
안민혁이 다른 한드 메인남주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27살 되도록 인국두 짝사랑하느라 연애 한번 못해본 도봉순에게 다가가는 방식이 무척 현실적이라는 점이다. 안민혁은 도봉순의 마음이 자신에게 넘어오는 것을 느끼기는 해도 오랜 짝사랑을 생각해 연애적 스킨십을 강제하지 않는다. 7-10회 애정 씬들은 그런 맥락으로 읽어야 하고, 오히려 키스 씬이 바로 나오는 것보다 훨씬 큰 텐션을 갖다 주기도 했다. 안민혁은 고백 멘트도 “너 그 짝사랑 어서 끝내!”였다. 고백해도 포옹조차 강요하지 않고, 고백 이후 생각할 시간을 갖겠다는 도봉순에게 순순히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11회에서 인국두와의 약속이 펑크 난 도봉순 앞에 나타나 마음을 확인한 후에야 포옹하는 안민혁은 자신의 감정과 스킨십이 도봉순에게 폭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지하는 캐릭터다.
필자가 도봉순보다도 안민혁 캐릭터에 열광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초성과 애정을 함부로 강제하지 않으면서 사랑을 얻은 안민혁은 지금까지 한국드라마에서 당연히 존재해야 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아주 매력적이고 남다른 메인 남성 캐릭터의 탄생을 의미한다. 만세, 브라보.
안민혁의 복잡성 ①: 모성애 코드와 게이 코드, 꼭 그래야 했니.
안민혁은 꽤 잘 만들어진 캐릭터지만 동시에 복잡한 캐릭터이기도 하다. 단순히 작가의 역량 때문만이 아니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기존 한드 프레임과 젠더적 요소가 충돌하는 드라마다. 모순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중 안민혁은 이 드라마의 모순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캐릭터다. 안민혁의 컨셉은 한 마디로 ‘힘쎈 신데렐라에게 구원받는 외로운 왕자’다. 이를 위해 작가는 안민혁에게 두 가지 한드 클리셰, 모성애 코드와 게이 코드를 차용했다. 이들은 주로 한드에서 남자 캐릭터의 마초성을 줄이고 싶을 때 사용하는 코드들인데, 필자는 이 클리셰들이 안민혁의 매력을 반감시켰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사용하지 않았다면 안민혁은 훨씬 더 독립적이고 매력적인 캐릭터로 거듭났을 거다.
모성애 코드부터 보자. 안민혁은 준재벌가의 혼외자이며 친모는 6살 때 돌아가셨다. 그리고 도봉순과 안민혁이 처음 만난 사건은 안민혁이 어머니의 묘지에 가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할 때 도봉순이 구해주면 서다. 안민혁은 핑크후드괴력소녀를 “엄마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로 기억한다. 한편 도봉순에게 그 사건은 난생처음 자신의 힘을 제대로 써 본 사건이었다. 안민혁에게 이 사건은 모성애 코드가 얽힌 반면, 도봉순에게는 숨겨만 두었던 힘을 쓰는 계기가 되었다. 여기서 차이가 드러나지 않나?
안민혁은 불안한 가족 관계 때문에 21살에 본가를 나와서 회사를 키웠다. 이때 가족관계에 상처받은 안민혁을 위로해주는 건 도봉순의 몫이다. 뻔한 설정이지만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치자. 극 초반에 도봉순이 안민혁의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되면서 겪는 고난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비서 코스프레에다가 안민혁의 아침밥까지 해주는데, 안민혁이 도봉순이 차려준 아침밥을 먹으면서 “우리 엄마 밥 같네.”라 말하는 4회 씬은 저엉말 아니었다. 내가 젠더 이슈 다루는 드라마에서까지 남주들에게 밥해주는 여주를 봐야 하니. 아무리 봉순이가 엄마한테 구박 많이 받아서 요리 잘한다고 한들 너의 여성 애인은 제2의 엄마가 아니란 말이다. 인국두는 그렇다 치고 안민혁은 6년째 혼자 사는 거 맞니.
게이 코드는 문제가 한층 더 심각해진다. 모성애 코드는 주로 메인남주에게 적용되는 코드지만 게이 코드는 주로 서브 남주에게 많이 적용되는 코드다. 이렇게 민혁의 복잡성은 한 단계 더 높아진다. 물론 나쁜 의미로. 게이 루머를 ‘노이즈 마케팅’으로 생각하고 "저 여자 좋아하는 건강한 남자입니다."라 말하는 안민혁은 진짜 안 보고 싶었다. “나 여자 하면 아주 환장해.”라 말하던 안민혁을 한-참 들여 보다가 “이 가운 정-말 거슬려요.”라 말하던 도봉순 박수.
게이 코드가 안민혁에게만 적용되는 것도 아니다. 봉순이도 안민혁X인국두 꿈을 꾸고 나서 “더러워.”라고 말하고, 이불 부적에 걸려 애정 공세를 하는 두 남자 깡패도 그러하다. 안민혁을 짝사랑하고 신입사원 도봉순을 갈구는 오동병 팀장(aka 오돌뼈)은 이 드라마의 젠더 의식 한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캐릭터다. 왜 하필 도봉순을 갈구는 직장 상사를 소위 ‘여성스러운 게이’로 설정했나 생각해봤다. 보통 한드 같았으면 오돌뼈는 일하다가 시집 못 가고 히스테리 작렬하는 노처녀로 나왔겠지. 실제로 오돌뼈 캐릭터는 그전의 한드 노처녀 직장 상사들과 비슷하다. 그래도 작가 딴에는 젠더 이슈 다룬 드라마니까 차마 여적여 프레임은 쓸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낸 게 ‘진짜게이’ 캐릭터 오돌뼈일 텐데 … 댓츠 노노. 1인 2역 김원해의 다른 캐릭터 김광복과 겹치더라도 ‘개저씨’ 캐릭터를 넣는 게 차라리 나을 뻔했다. 한 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땜빵한다고 다른 사회적 약자를 끼워 넣고 성소수자 희화화 한 것 밖에 안 된다.
즉, 이 드라마의 젠더 문제의식은 여성을 사회적 약자로 인식하는 데는 도달했지만 성소수자까지 생각하지는 못했다. 이건 반성해야 한다. 여성혐오범죄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구체적인 게이 캐릭터 강준희(호야 역)가 등장한 <응답하라 1997>(2012)이나 게이 커플을 내세운 <인생은 아름다워>(2010)보다도 젠더 감수성이 떨어지면 쪽팔리지 않나. <혼술남녀>부터 눈여겨본 조연배우 김원해의 명품 연기가 이런 캐릭터에 소비된 게 통탄할 따름.
안민혁의 복잡성 ②:
완전히 소거되지 않은 마초성,
그리고 도봉순이 이를 대하는 방식.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민혁이 잘 만들어진 캐릭터라는 생각은 여전하다. 필자는 앞서 안민혁이 ‘어느 정도’ 마초성이 소거된 캐릭터라고 했지, ‘완전히’ 소거된 캐릭터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안민혁도 분명히 마초성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있다. 1회에서 도봉순을 개인 경호원으로 고용하기 전 팔씨름 테스트로 다치고도 이 꽉 물고 가오 잡던 모습 잊었나. 극 후반에서도 도봉순과의 연애 관계에서 안민혁의 마초성이 드러나는 씬들이 있다. 그러나 이 씬들은 의도적으로 나오는 장면들이다. 이때 도봉순이 보이는 반응은 통쾌하다. 12회에서 안민혁이 도봉순을 집에 데려다주는 장면과 14회에서 도봉순이 힘을 잃고 나서 안민혁과 대화하는 장면이 그렇다.
민혁: (봉순 어깨에 손을 올리며) 봉순아, 니가 아무리 힘이 세고 특별해도 나에겐 지켜주고 싶은 여자일 뿐이야.
봉순: (어깨에 있던 민혁 손을 내리며) 지켜주는 건 내 전공인데?
<14회>
민혁: 이제 무거운 거 내가 다 들고 힘쓰는 거 다 내가 하면 되잖아? 이 오빠 한번 믿어봐.
봉순: 음~오빠 좋아하네. 동갑인 거 제가 다 알거든요?
(당황하는 민혁)
봉순: 대표님~저 말 놔도 돼요? 말 놓을까요? 그러자~친군데. 어? (중략) 야 안민혁! 민혁아~안 대표님? 안 대표? 민혁아! 가자~.
도봉순이 힘을 쓰는 순간보다도 짜릿했다. 봉순아, 너 첫 연애 맞니. 캬.
다행히 안민혁은 수긍할 줄 안다. 12회에서는 “아.”라 수긍했고 14회에서는 “아 근데 반말하니까 설렌다 짜릿해.”라 반응한다. 인국두라면 절대 못 그랬을 걸. 그런 의미에서 이 드라마는 안민혁의 변화를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메인 여주를 만나며 맨 박스(Man box: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에게 가해지는 성차별적 코르셋)에서 벗어나는 메인 남주를 한드에서 볼 줄 누가 알았겠어. 16회 벚꽃 프로포즈 씬에서 도봉순이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나 기다려줬어?"라 묻자 "네 맘이 나한테 완전히 올 때까지 기다렸지. 근데...기다리는 동안 충분히 행복했어. 그리고 자신 있었어."라 답하는 이 캐릭터를 어떻게 미워해. 여성 히어로에게 "어쩌다 이 엄청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을까."라 고백하는 이 캐릭터를 어떻게 미워하느냔 말이다.
이렇게 복잡하고 매력적인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한 박형식에게도 박수갈채. 안민혁은 <선덕여왕> 비담과 <로맨스가 필요해> 시즌 3의 주완 이후 필자의 인생 남캐 리스트에 들어간다. 필자에게 <힘쎈여자 도봉순>은 박보영 때문에 보기 시작했지만 박형식을 재발견한 드라마이기도 하다. 참고로 박형식이 제국의 아이들 출신이라는 걸 최근에야 알았다. 소오름.
차세대 멜로킹의 귀환을 기대한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정리하면, <힘쎈여자 도봉순>은 힘만 쎘다 뿐이지 자존감도 없고 고졸 청년 실업자에 부모에게 성차별을 받고 마초적인 남자를 짝사랑하며 코르셋을 열심히 조였던 도봉순이, 여성혐오범죄에 의해 각성하면서 자신의 힘을 컨트롤하고 꿈의 게임회사에 취직하며 맨 박스에서 벗어나는 남성과 함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는 이야기다. 극 후반에서 김장현을 잡을 계획을 안민혁과 인국두와 상의하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저 도봉 순이잖아요.”라 자신 있게 말하는 도봉순은 초반의 자신감 없는 모습과 다르다.
앞서 필자는 ‘후드’가 중요한 아이템이라고 밝혔다. 필자는 이 드라마를 도봉순이 후드를 벗기까지의 여정이라고 이해했다. 후드는 안민혁이 도봉순을 기억해내는 장치가 되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도봉순은 항상 중요한 장면에 후드를 쓴다. 마을버스를 구하는 장면, 안민혁과 힘 조절 훈련을 하는 장면, 백탁파 깡패들과 1:30으로 붙는 장면, 폐차장에서 납치 피해자들을 구출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에 김장현을 잡는 장면까지 도봉순은 후드를 쓴다.
후드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신의 힘을 함부로 드러내면 안 되는 도봉순과 더불어, 여성에게 보편적으로 가해지는 억압을 상징한다. 자신의 힘을 숨겨야 하는 도봉순은 마을버스를 구하고 나서도 후드를 쓴 채로 기둥 뒤에 숨고, 피해 여성들을 구출하고 나서도 후드를 쓴 채로 유유히 폐차장을 나온다. 그러나 백탁파들을 다 물리친 후와 김장현을 잡고 나서는 후드를 벗는다. 따라서 16회에서 김장현이 감옥에 들어가는 장면과, 도봉순이 모계혈통 대대로 내려온 역량기와 함께 핑크 후드를 책장에 고이 넣는 장면은 괜히 겹쳐진 게 아니다. (여성 재판관의 무기징역 선고 내레이션도 인상 깊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이정미 재판관 영향이 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후드를 벗고 역량기에 “그 자식을 내 손으로 잡았다.”라고 쓰는 도봉순은 가부장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더 당당해진 여성상이다. 이는 감옥 안에서 분노하며 뒹구는 김장현과 대조를 이룬다.
그러나 도봉순이 진정 후드에서 벗어났을까? 16회 엔딩에서 도봉순은 사람들을 몰래 도우면서 여전히 핑크 후드를 입고 있다.
다른 건 다 용서해도 엔딩은 용서 못하겠다. 인국두의 포장도 그렇지만 <힘쎈여자 도봉순>은 좋은 소재 두고 결말에서 한국드라마의 표본로 돌아가고 말았다. 도봉순X안민혁의 결혼 엔딩은 황진이의 도봉순 시집보내기 프로젝트가 성공한 꼴 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진이가 힘 잃은 봉순이에게 위로 한번 해주면 단가. 훈훈한 가족애로 마무리하면 다냐고. 턱시도를 입고 앞머리 깐 안민혁과 웨딩드레스 도봉순이 그림 같아서 참고 봤을 뿐이다.
가장 마음에 안 드는 설정은 게임 <슈퍼걸 뽕순이> 개발 이후 도봉순이 게임 회사에서 그리 활약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기획 1팀 입사에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힘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돕다가 회사에 계속 지각하는 도봉순이라니. 그러다가 기획 1팀에서 잘리고 안민혁에게 애교 부리는 도봉순이라니.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다가 퇴근하고 나서 도우면 되잖아. 너무 슈퍼우먼을 바라는 건가.
필자가 원하던 엔딩은 이러했다. 도봉순이 아인소프트에 정직원으로 입사하고 몇 년 간 열심히 일하다가 돌연 사표를 내고 자신의 특기인 2D 게임을 주 무기로 인디 게임 회사를 세우고 성공하는 거지. 안민혁과는 게임 회사와 히어로 일 상부상조하면서 여전히 예쁘게 연애하고. 필자는 도봉순이 학력 콤플렉스와 유리천장을 깨고 안민혁에게서 독립하여 커리어에서 성공하길 바랬다. 여성 게임 회사 CEO라니 생각만 해도 설레잖아. 도봉순과 안민혁이 27살로 설정된 만큼 결혼은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았을 것 같다. 게임회사라는 좋은 배경을 두고 왜 써먹지를 못하나요 작가님.
도봉순은 완전히 후드를 벗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현실적이다. 젠장.
결론 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를 완전히 미워할 수 없는 이유
– 젠더, 페미니즘적 디테일들
읽으면서 느꼈겠지만, 페미니스트에게 <힘쎈여자 도봉순>은 완벽한 드라마가 아니다. 오히려 까라고 한다면 밑도 끝도 없이 깔 수 있는 드라마다. 그럼에도 필자의 애정이 상당한 드라마고 그만큼 애증도 심하다. <힘쎈여자 도봉순>을 보는 과정이 ‘단점이 보이지만 내가 더 많이 좋아해서 참고 만난 애인한테 마지막에 뻥 차인 느낌’이라고 한다면 이해될까.
혹자는 도봉순의 사이다가 좋았다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여성혐오범죄를 직접적으로 다루어서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보다도 이 드라마의 섬세한 젠더적, 페미니즘적 디테일들이 더 좋았다.
4회에서 도봉순은 영화 <로건>을 보면서 펑펑 운다. <로건>은 노쇠한 울버린이 프로페서 X와 함께 말년을 보내며 새로운 뮤턴트-엑스맨 세대 여자아이 ‘로라’에게 히어로의 역사를 물려주는 영화다. 8회에서 뉴스 속 여성 앵커는 영국의 페미니즘 운동 ‘Reclaim the Internet’의 역사와 맥락을 언급한다. 10회에서 모계혈통 대대로 내려오는 역량기를 도봉순에게 넘기는 순심여사는 여성들의 역사 계승을 상징한다. 게임회사 아인소프트 씬들에서도 게임 여성 캐릭터의 일러스트가 다수 등장하며, 11회에서 PT 하는 안민혁은 쌍둥이 남동생 바론을 구하는 여왕 지나에 대해 설명한다. 11회는 도봉순이 생리휴가를 말한 후 아인소프트 여직원 화장실에 무료 생리대가 등장하는 에피소드이기도 하다(물론 PPL이다). 13회 회사 도서관에서 깨알같이 소설 ‘히든 피겨스’가 나오고, 15회에서 도봉순은 ‘A girl is A gun’ 티셔츠를 입고 출근한다. 16회 벚꽃 프러포즈 씬에서 핑크색 재킷을 입은 안민혁과 파란색 원피스를 입은 도봉순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했던 연출 중 하나다.
참 소박한 건데, 영화도 아니고 한국드라마에서 이런 디테일을 볼 줄 생각 못했다. 페미니스트로서 이런 키워드들을 잡아내는 재미가 꽤 있는 드라마였기에 정을 못 떼는 걸 수도.
결론 ②: 박보영, One and Only 도봉순
<힘쎈여자 도봉순>은 박보영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흥행하지도 못했을 드라마다. 필자는 도봉순 캐릭터를 할 만한 한국 20대 여자 배우가 박보영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 드라마의 젠더/페미니즘적 정서를 박보영이 잘 끌어갔다 생각한다.
백미경 작가는 <힘쎈여자 도봉순> 초고를 C급 코미디로 잡았고 좋은 배우도 기대하지 않았는데 박보영이 대본에 관심을 가지면서 방향성이 많이 달라졌다고 밝혔다. 박보영은 ‘국민 여동생’, ‘뽀블리’ 등의 애칭으로 불리지만 그만큼 스테레오 타입에 갇히기 쉬운 이미지의 배우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미지 때문에 평소에도 웃고 다니지 않으면 바로 뒷말이 나온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처음으로 대중에 이름을 알린 <과속스캔들>(2008)에서는 미혼모 역할을 맡았고, <돌연변이>(2015)에서는 생선 인간이 된 전 남친을 인터넷으로 팔아먹는 구 여친이었으며, <열정같은소리하고있네>에서는 사회초년생 기자였다. 영화만 그랬나? TVN <오 나의 귀신님>(2015)에서 처녀 귀신에게 빙의되어 선우(조정석 역)를 덮치는 나봉선은 한국드라마에서 처음 20대 여성의 성적 욕망을 제대로 드러낸 주연급 여성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그만큼 박보영은 대중이 원하는 스테레오 타입에서 벗어나는 작품들을 골랐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박보영의 인터뷰를 읽으면서 생각이 복잡해졌다. 이 배우가 괜히 ‘도봉순’이 된 게 아니구나. 박보영은 <힘쎈여자 도봉순> 대본을 읽으면서 ‘키 작고 예쁘지 않은 아이’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고, 극 초반의 자신감 없는 도봉순에 공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힘쎈여자 도봉순>은 박보영이 여성 타이틀 롤로 결정되고 나서도 방송사 컨택도, 남자 주연배우 섭외도 쉽지 않아 5개월을 기약 없이 기다렸다. 박보영이 이제 보니 박형식을 만나려고 그랬던 것 같다고 너그레 떨긴 하지만, 이는 영화 <서프러제트>와 <히든피겨스>가 겪은 난항과도 오버랩된다. 할리우드에서 페미니즘 영화 만드는 것도 힘든데 한국드라마는 얼마나 더 힘들었겠어. 박보영이 <힘쎈여자 도봉순>의 시청률 공약으로 귀갓길 도우미 아이디어를 떠올린 게 우연일까. <힘쎈여자 도봉순> 종영 이후 여성 팬이 급속도로 늘었다며 웃는 박보영의 기분은 어떨까.
체구가 작아 남들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게 싫었고, 한국 영화/드라마에서 여성 캐릭터들이 소비되는 경향이 강하다고 말하며, 우리나라 미의 기준이 빡빡하다고 말하는 배우가 ‘도봉순’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필자는 <힘쎈여자 도봉순>의 성소수자 희화화에 대해서 곧바로 반성한다 말하고, 실제 도봉순이었다면 세월호를 들어 올렸을 것이라 말하는 이 배우를 좀 더 지켜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한국 영화계에서 독보적인 젠더 감수성을 가진 박찬욱 감독과 한 번쯤 영화 작업을 했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기왕이면 <아가씨>의 타마코나 숙희 같은 여성 성소수자 캐릭터로. 박찬욱 감독이 당당한 이미지의 여성 배우들을 선호하기 편이라 힘들 것 같긴 하지만 한번 기대해본다. 만약에 박보영 씨가 팬 사인회 하면 <82년생 김지영>과 <나의 페미니즘 공부법>을 선물로 들고 가려고 한다. 언니 페미니스트 각성하세요 제발.
Outro ①: <힘쎈여자 도봉순>,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들이 먹는 비빔밥
필자는 앞서 <힘쎈여자 도봉순>이 얼핏 보면 MSG가 다량 첨가된 인공 식품 같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이 글의 제목은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들이 먹는 비빔밥’이다.
SBS 스페셜 454회 <잔혹동화: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는 어디서든 여성혐오범죄의 공포에 시달리는 한국 사회 여성들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멘터리였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그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들이 주인공인 드라마다. 필자에게 이 드라마는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들이 먹는 비빔밥이었다. 기존 한드 프레임 한 컵, 젠더적 요소 한 컵, 변형된 신데렐라 판타지 반 컵, 자극적이고 익숙하지만 몸에는 안 좋은 모성애와 게이 코드 각각 한 젓갈, B급 코미디 참기름 많이, 로맨틱 코미디 고추장을 휘휘 저어 만든 비빔밥. 100% 좋은 것도 아니지만 100% 나쁜 것도 아닌, 그러나 익숙한 맛 새로운 맛 자극적인 맛이 다 하나로 섞여 먹게 되는 비빔밥. 그리고 그 비빔밥을 꾸역꾸역 먹는 불안한 나라의 앨리스들.
마침 이 드라마는 비빔밥 씬이 두 번(1,9회) 등장한다.
Outro ②: <힘쎈여자 도봉순>이 쏘아 올린 작은 공
– JTBC와 한국드라마
<힘쎈여자 도봉순>은 처음 한국드라마계에 등장할 때 주목받지 못했으나 JTBC 드라마 역대 최고 흥행에 성공했다. 처음 시청률 공약이 3%였는데 최종적으로 9% 이상이니 말할 것도 없다. 이 현상은 한국드라마계, 특히 JTBC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JTBC는 SBS와 더불어 젠더 이슈에서 비교적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는 방송국이다. 손석희가 진행하는 JTBC 뉴스룸은 전통적 뉴스 프로그램의 젠더 프레임을 바꾸었고 페미니즘 이슈 역시 자주 다루는 편이다. 현재 종영된 시사 예능 <말하는 대로>에서 손아람 작가와 곽정은이 진행한 페미니즘 강연은 장안의 화제였다. <힘쎈여자 도봉순>의 방영도 JTBC라 그나마 가능했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시스젠더 헤테로 남성의 호모 소셜 예능 끝판왕 <아는형님> 역시 JTBC의 간판 프로그램 중 하나다. 남성 호모 소셜 예능 논란은 <냉장고를 부탁해>, <비정상회담>, <한끼줍쇼> 등도 자유롭지 못하다. 아예 젠더/페미니즘 전문 소규모 언론인 여성신문, 닷페이스 등과 곧바로 비교하는 건 무리라도 JTBC의 포지션이 애매하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동안 JTBC 드라마 당국은 노조 문제 웹툰을 충실히 재현한 <송곳>(2014), 시한부 인생을 현실적으로 그린 <판타스틱>(2016) 등 사회 이슈를 다루고 퀄리티 높은 드라마의 제작까지는 성공했다. 그러나 같은 탑 케이블 방송사 TVN과 다르게 시청률에서 대박을 터트린 드라마는 없었으며 그나마 가장 높은 시청률 9.2%를 기록한 <무자식 상팔자>(2012-2013)는 김수현 작가 빨로 시청률이 나왔다고 봐야 한다. 손석희 사장이 제작진과 출연진에게 직접 뷔페와 밥차를 쏘고 발리로 포상 휴가를 보낼 정도로 성공을 거둔 <힘쎈여자 도봉순>은 무엇을 의미하나?
JTBC에서 젠더 이슈를 다룬 드라마들도 그동안 없었던 게 아니다. 오히려<힘쎈여자 도봉순>에 비해 훨씬 고차원적인 젠더 감수성을 가졌던 두 드라마가 있었다. 여성 배우 1명도 아니고 5명이 타이틀 롤로 등장했던 드라마들, <선암여고 탐정단>(2014-2015)과 <청춘시대>(2016)가 그러하다.
<선암여고 탐정단>은 선암여고 재학생 5명이 탐정단을 꾸려 미스터리를 풀어나가는 드라마다. 극 초반에는 여고에 침입하는 신종 변태 ‘무는 남자’가 등장하고 여고생들의 주체성이 두드러진다. 이 드라마에서는 청소년들의 왕따, 입시 문제를 다루기도 하지만 사회적 시선을 견디지 못해 불법 임신 중절을 선택하는 여고생과 자신들도 모르게 연애를 시작한 여고생 동성 커플이 등장한다. 11회에서는 동성 커플이 동네 서점에서 키스하는 장면도 있는데 방심위에서 짤렸다. 역시 대한민국 후진국.
20대 여성들 사이에서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킨 <청춘시대> 역시 젠더 이슈와 밀접하다. 5명의 20대 여성들이 셰어하우스 벨 에포크에 같이 살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담은 <청춘시대>는 그동안 한국드라마에 없던 캐릭터들을 만들었다. 대표적인 캐릭터가 강이나(류화영 역)다. 강이나는 5명 중 유일하게 대학생이 아니다. 그녀는 무려 ‘창녀’, 성 노동자다. 한국드라마에서 성 노동자가 주연급으로 등장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파격이다. 더 나아가 강이나는 자신의 언어로 삶을 규정할 줄 아는 주체적인 캐릭터다. 2회에서 강이나를 매춘에게서 구하겠다며 스토킹 하는 남자는 멋지기는커녕 찌질하며, 성매매 사실을 들키고 자신을 ‘걸레’ 취급하는 룸메이트 정예은(한승연 역)에게 “더러워? 네 입술 썩나 안 썩나 잘 살펴봐!”라 말하며 키스하는 강언니는 한드 어디에도 없었다.
연애호구 정예은의 똥차 자격지심 남자친구 고두영이 강이나한테 찝쩍거리면서 생기는 구도는 한 층 더 흥미롭다. 정예은에게 “양아치랑 당장 헤어져 이 찐따야!”라 버럭하고 고두영한테 “너는 니가 나쁜 남자 같지? 넌 그냥 나쁜 새끼야.”라 말하는 강이나는 결과적으로 정예은이 매달리는 첫 연애를 끝낼 수 있게 도와준 은인이 되었다. 11회에서 고두영이 정예은을 자신의 집으로 납치하고 테이프로 입을 막아버리며 “니가 뭔데 날 비웃어?”라 대답하는 씬도 명장면이다. 이 씬은 클립 영상이라도 보는 걸 추천한다. 소름 끼칠 정도로 현실적일 데이트 폭력 묘사.
그러나 두 드라마는 흥행하지 못했다. 겨우 시청률 1-2%를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었다. <힘쎈여자 도봉순>이 완전무결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경심여고 탐정단>과 <청춘시대>의 시도가 무의미했다고 말하려는 건 더 아니다. 시청률이 드라마의 절대적 척도라고 말하려는 건 더더욱 아니다. 냉정하게 현실 분석을 해보자는 거다. 왜 <힘쎈여자 도봉순>은 흥행에 성공하고 <경심여고 탐정단>과 <청춘시대>는 실패했는지.
2015년 메갈리아 사태 이후 한국사회의 뜨거운 페미니즘 물결에도 불과하고, 현재 한국드라마를 시청하는 대중들의 젠더 감수성 수준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지표 아닌가. 여성 히어로는 괜찮지만 여성 동성 키스 씬은 허락할 수 없는, 여성 배우 타이틀 롤 1명은 괜찮지만 5명은 안 되는, 88만원 세대 고졸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건 괜찮지만 성노동자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건 안 되는, 딱 그만큼의 젠더/페미니즘 감수성. 따라서 <힘쎈여자 도봉순>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젠더적 요소의 수위 조절을 잘해서(적절한 워딩은 아닌데 다른 표현이 생각 안 난다) 성공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한국드라마 삼각관계의 형식까지 깨지는 않았으며, 무거운 소재들을 B급 코미디와 로맨틱 코미디로 희석시켜서 시청자들이 거부감을 덜 느끼는 전략을 선택했다. 이는 미국식 국가주의와 흑인 페미니즘(Black feminism)을 결합시키고 NASA의 흑인 여성들이 겪는 차별을 흥겨운 흑인음악 OST와 함께 풀어낸, 그러나 백인 이성애자 남성의 기세도 어느 정도 살렸다고 비판받는 영화 <히든피겨스>의 전략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힘쎈여자 도봉순>을 과도기적 드라마다. 젠더 이슈를 다루고 여성 배우가 타이틀 롤로 등장하는 드라마가 김수현 작가의 전형적인 가부장적 가족극 <무자식 상팔자>의 시청률 기록을 갈아치웠다는 건 중요한 현상이다. <말하는 대로>의 페미니즘 강연 성공이 JTBC 예능계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힘쎈여자 도봉순>도 한국드라마계에서 비슷한 작용을 할 것이다. <힘쎈여자 도봉순>은 그동안 가부장적 프레임에 익숙했던 한국드라마계에 이제 그 프레임에서 벗어나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벗어나야 한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Outro ③: 도봉순의 쌍둥이 딸들이 살아갈 세상
<힘쎈여자 도봉순>은 도봉순이 안민혁과 결혼하여 똑같이 괴력을 가진 쌍둥이 딸 둘을 낳고 사는 것으로 끝난다. 한때는 인국두와 결혼하여 아들만 셋 낳고 싶었지만, 극 중반에서 외할머니와 엄마에게 기대어 “딸을 낳아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결말에서는 안민혁과 쌍둥이 딸 둘을 가진 봉순이의 모습은 마음에 들었다.
이 드라마에 대한 애정이 깊은 건 어쩔 수 없어서 어딘가에서 도봉순과 안민혁이 두 딸의 괴력을 감당하며 키울 모습이 상상된다(우리 민민 애도...). 이 글은 도봉순의 쌍둥이 딸들이 살아갈 세상을 꿈꾸며 마친다.
나는 도봉순의 쌍둥이 딸들이 ‘후드’를 쓰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
나는 두 사람이 여성이 있는 그대로 행복하고 사랑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
나는 두 사람이
<힘쎈여자 도봉순>, <경심여고 탐정단>, <청춘시대>가 식상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살았으면 한다.
나는 두 사람이
여성 성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한 정통 멜로드라마가 지상파에서 방영되는 세상에서 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 날이 올 때까지 페미니스트인 나는 열심히 싸울 거다.
<힘쎈여자 도봉순>의OST ‘슈퍼파워걸’을 흥얼거리면서.
♩힘을 내 슈퍼파워걸~더 이상 망설이지 마~지구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달려가아~~♪
PS1. 참고로 이형민 PD는 이전 대표작이 <미안하다 사랑한다>였다.
맞다. “밥 먹을래 나랑 잘래. 밥 먹을래 나랑 살래! 밥 먹을래 나랑 같이! 죽을래!”
요즘 같으면 데이트 폭력 취급받을 그 대사가 나왔던 그 드라마.
세월무상이다.
PS2. 아무리 <힘쎈여자 도봉순>이 허점이 많아도 그렇지. 그래도 명색이 젠더이슈 다룬 드라마로 뜬 박형식한테 ‘오빠(^^)’ 마케팅시킨 프리메라 홍보팀은 도봉순 마냥 하늘로 던져 버려야지. 그나마 요즘은 정상적인 우리은행 광고라도 많이 나와서 다행이다,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