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미러 시즌 5: 레이철, 잭, 애슐리 투>: 페르소나와 AI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타, 팬이 된다는 건
나는 자타공인 라이트 덕질의 달인이다.
정말 온갖 덕질은 다 해봤다. 중고등학교 때는 양방언, 언더 힙합 덕질은 엄청나게 했지. 한국에 딱 한번 온 카니예 웨스트 내한 공연도 가보고, 하루 전에 취소표 구해서 소울컴퍼니 해체 공연도 가고, 고등학생 때는 일리네어/AOMG/하이라이트에 미쳐 있었다. 요즘은 <쇼미 더 머니> 이후 언더 힙합 세대에는 별로 애정이 없고, 성인이 되고 페미니즘을 배운 후에는 더더욱 힙합 덕질에 소홀하긴 하지만. 그래도 재키와이 사랑해, 로직 사랑해.
그런데 사람 사는 게 참 재미있지. 오히려 학교 다닐 때는 잘 안 하던 아이돌 덕질을 요새 하고 열심히 있지 뭐야. 예전부터 아주 관심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남자 아이돌보다는 여자 아이돌들이 좋았다. 투애니원은 지금도 응원하고, EXID의 LE는 데뷔 전에 지기펠라즈 멤버로 활동할 때부터 팬이었고 지금도 EXID 최애다. 여자아이들의 귀여운 우기도 좋아하지만 누가 뭐래도 최애 오브 최애는 청하. 데뷔 이후 최초로 백금발 하고 컴백하는 우리 청하 마니마니 사랑해주세요.
<블랙 미러> 새 시즌 리뷰에서 왜 TMI 남발하면서 내 덕질 라이프를 말하고 있냐고? 내 삶에서 덕질은 안식처인 동시에 고민거리였다. 대학생활 내내 나의 힙합 취향과 페미니스트 정체성이 양립할 수 있는지를 고민했고, 어쩌다 케이팝 세상에 다시 발을 들였지만 매일 같이 아이돌 문화가 나와 맞지 않음을 체감한다. 남자 아이돌 산업은 더더욱. 나는 웬만해서는 덕질에 내 삶을 갈아 넣지 않는다. 지금까지 이게 내 덕질의 불문율이었고, 힙합이나 배우 덕질할 때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케이팝 세상은 이 불문율과는 엄청난 괴리가 있다. 케이팝, 특히 남자 아이돌 산업은 유사 연애와 자아 의탁과 ‘덕후’라는 집단의식에 기초한 사업이기 때문에 당연히 괴리가 생길 수밖에. 판을 바꾸기 위해 소속사와 가수에게 꾸준히 피드백을 요구했던 아미 페미니스트들은 여전히 존경한다. 그 동시에 아이돌들이 느끼는 괴리감도 궁금해졌다. 뮤지컬 배우, 언더 래퍼, 발라드 가수를 꿈꾸다 엄청난 감정 노동자이자 서비스직인 아이돌 가수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니까.
스타와 팬이란 무얼까.
도대체 무엇이길래 스타가 되기 위해 페르소나를 만들고,
팬들은 가수에게 열광하고 그들의 잘못을 덮어주려고 할까.
그래서 블랙 미러의 새로운 시즌이 다가오고 에피소드 3개의 줄거리를 봤을 때, 가장 먼저 보고 싶다고 생각한 에피소드가 <레이철, 잭, 애슐리 투>였다. 스타와 팬과 AI라니, 흥미진진한데? 그리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재미있었다. 그리고 이 에피소드에서 마일리 사이러스로 캐스팅한 건 신의 한 수다. 애슐리 역할에 이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 찾기도 힘들었을 텐데.
페르소나의 페르소나
<레이철, 잭, 애슐리 투>는 스타와 팬과 AI에 대한 이야기다. 힘든 상황 속에서 스타에게 의지하고 힘을 얻는 팬, 어릴 때부터 형성된 자신의 이미지와 자신이 원하는 이미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스타의 이야기는 별로 새롭지 않다. 그러나 이 에피소드를 특별하게 하는 것은 스타와 팬의 이야기에 AI가 개입된 점이다. 스타 애슐리 오(Ashley O)의 인격을 닮은 로봇 애슐리 투(Ashley Too)가 팬들에게 팔리고, 고모 캐서린은 애슐리를 기절시키고 투자자들에게 홀로그램 가수인 애슐리 이터널(Ashley Eternal)을 소개한다. 마냥 허무맹랑한 이야기 같나? 이미 일본에서는 AI로 여자 아이돌 그래픽을 만들고, 지드래곤이나 방탄소년단 역시 홀로그램 콘서트를 기획한다.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더 이상 AI와 홀로그램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레이철, 잭, 애슐리 투>은 조금 더 먼 미래를 보여줬을 뿐이다.
다만, <블랙 미러>의 다른 에피소드들에서도 나온 인격 복사 기술이 오히려 페르소나의 페르소나로서 스타 본연의 모습을 더 잘 보여준다는 점은 흥미롭다. AI와 스타라는 소재가 엄청나게 잘 어우러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애슐리의 일부만 보여줄 때는 레이철에게 희망과 실망을 동시에 주었지만, 리미터가 풀리고 애슐리와 완벽히 같은 인격을 지닌 애슐리 투는 오히려 레이철의 언니이자 하드 록 매니아인 잭을 마음에 들어한다. AI인 애슐리 투가 오랜 팬이었던 레이철보다도 애슐리 오를 더 잘 이해하는 상황이 참 아이러니하다.
I’d rather die than give you control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AI와 첨단 기술을 이용한 시도는 계속될 테다. 이 시도 자체가 나쁘다는 소리는 절대로 아니다. 그러나 엔터테인먼트 산업에서 애슐리의 고모 캐서린과 같은 사업가들이 줄어들었으면 하는 헛된 바람이 있다. 캐서린은 단 한 번도 누군가의 팬이 된 적이 없을 거라 예상한다. 안 그러면 조카를 데리고 사업을 저따위로 했을 리가 없어.
며칠 전에 우연히 <대화의 희열> 김영하 편을 봤다. 개인적으로 유희열을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래도 공감되는 말이 있었다. 팬들은 가수를 완벽해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팬들은 AI가 따라 할 수 없는 가수의 음정과 실수를 사랑한다고. 물론 빡세게 일하는 가수의 페르소나를 사랑하는 팬들도 많고, 나 역시 그런 면이 아주 없다고는 말 못 하겠다. 그러나 완벽한 가수보다는 의도치 않은 가수의 모습이 좋다. 홍대 롤링홀에서 공연하다가 스몰 토크를 하면서 팬들과 만두를 나눠먹는 래퍼 화나가 좋았고, 브이 앱에서 팬들에게 스릴러물을 잔뜩 추천해주는 청하가 좋아. AI로 가수가 만들어졌다면 문빈이 선미의 <24시간이 모자라>를 추는 직캠은 못 봤겠지. 아미들도 방탄이 없는 행사는 보이콧했다구.
우연마저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시대라지만 아주 사라지면 슬프잖아.
그래서 애슐리 오가 캐서린에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을 때 짜릿했다. 그리고 Ashley FUCK O로 활동하는 애슐리도, 함께 활동하는 잭도, 그리고 변한 애슐리의 모습조차 사랑하는 레이철 모두를 응원해. 많은 팬들은 Ashley FUCK O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했을 것이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라이징 스타였다가 숏컷과 파격적인 패션으로 모두에게 충격을 안겨줬던 마일리 사이러스처럼. 그러나 그들의 우연과 낭만을 응원해. 가끔은 삐에로도 진심으로 웃었으면 좋겠어.
God money I'll do anything for you
God money just tell me what you want me to
God money nail me up against the wall.
God money don't want everything he wants it all.
No you can't take it
No you can't take it
No you can't take that away from me
Head like a hole, Black as your soul.
I'd rather die than give you cont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