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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야 Jan 06. 2023

일흔둘의 노학자가 세상에 보내는 박수

자라는 모든 것에 사랑을 보냅니다.

강원도 어느 스키장에서 2023년 새해 첫날을 보내며 온 가족이 쉬이 잠들지 못하던 밤, TV 모니터를 향해 있던 모두의 눈길이 너무나 싱그러운 여름 정원의 풍경으로 시작하는 한 다큐 프로그램에 고정되었다. 소녀 같은 해맑은 웃음을 지으며 넓디넓은 정원에서 홀로 열심히 풀을 메는 한 할머니와 드론샷으로 보여주는 그곳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내일의 여정이 기다리는 늦은 밤이었지만 그 정원과 할머니에 대한 궁금증을 쉽게 떨쳐낼 수가 없었다.


경기도 여주에 위치한 1만 제곱미터의 '여백(如白)서원'을 홀로 가꾸는 할머니는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전영애 명예교수였다. 전영애 교수님은 학자이자 시인이며 괴테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로 여백서원과 주변을 괴테 마을로 조성하여 마음의 쉼이 필요한 누구에게나 그곳을 내어주는 것이 꿈이라고 하신다. 현재 여백서원 역시 매월 마지막 토요일은 모두에게 오픈된다고 하니 날씨가 좀 풀리면 꼭 한 번 찾아가 보고 싶다.


출처 : KBS 다큐 인사이트 [인생정원 - 일흔둘 여백의 뜰]


다큐가 끝나고 찾아본 교수님의 업적이나 여백서원의 규모에도 감탄했지만 무엇보다 은퇴 후 젊은이들을 위한 '박수부대'로 남아 세상과 사람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전하고 있는 '전영애'라는 한 사람에게 엄청난 매력과 감동을 느꼈다. 칠십을 넘긴 나이에도 낮에는 몸으로 하는 노동을 마다하지 않고, 밤에는 새벽 3시까지 글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에 괜한 걱정이 들 정도로 교수님의 작지만 단단한 몸과 정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세상을 향한 사랑과 열정이 모니터를 통해서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자라는 모든 것이 박수'라는 교수님은 부모님께 받은 극진한 사랑과 정성을 생각하면 어찌 바르게 살지 않을 수가 있겠냐고 하셨는데 유년 시절에 받은 사랑의 힘으로 고되고 지난한 삶을 견뎌낼 수 있었다고 하셨다. '사람을 마지막 실족에서 물러서게 하는 것이 유년 시절의 사랑이다.'라는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유년 시절에 받은 그 절대적인 사랑은 몸에 아로새겨져 있고 그 힘으로 살게 되니 유년 시절의 아이들은 정말 많이 사랑해 줘야 한다고 힘주어 말씀하시는 교수님을 보며 또 한 번 아이들에게 주어야 하는 절대적인 사랑에 대해 깊게 생각해보게 되는 밤이었다.


어린 시절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한 사람들이 받는 부정적인 영향은 굳이 서술하지 않아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성인이 되어 여러 가지 이유로 힘들어하거나 자식에게 온전한 사랑을 전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원인 중 많은 부분을 유년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발견할 수 있음을 여러 매체들을 통해 보고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아이들은 시련이 닥쳤을 때 스스로 견뎌내는 힘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세상이 어느 정도 허물어졌다고 해서 진짜 세상이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힘, 어떤 면에서는 내가 못나고 나를 미워하는 어쩔 수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내 가까이에 더 많다는 것을 아는 힘, 그런 것들이 유년 시절에 받은 극진한 사랑에서 나오는 것이라 믿는다. (그런 사랑을 주는 사람이 꼭 부모가 아니더라도 또 다른 가족이나 사회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면 부모의 결핍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고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이 '절대적인 사랑'이 사랑을 주는 사람의 '절대적인 희생'에서 비롯해서는 안된다고 보는데 서로가 수평적인 관계가 아닌 어느 한쪽으로 극도로 치우치는 사랑을 주게 되는 경우 사랑을 받는 사람은 자신밖에 모르게 되거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굉장히 나약한 몸과 마음을 갖게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이 너무나 귀한 요즘 집에서 넘쳐나는 사랑을 받는 아이들이 많은데 나의 딸 린아 역시 외동으로 자라며, 조부모나 우리로부터 부족함 없는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중일테다. 그래도 어느 순간순간 워킹맘일 수밖에 없는 엄마의 사랑이 혹시 부족하지는 않은지 걱정스러운 날들이 있기도 하고, 아이로부터 무조건적인 사랑을 요구받는 때가 찾아오기도 한다.


학원 셔틀버스에 내려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우산을 갖고 내려오라는 전화를 한다던가(셔틀버스를 하원하는 곳에서 아파트 현관까지 뛰어오는 시간은 1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데 어떤 장난감이 필요하다며 가져다 달라는 일종의 부탁 같은 지시(?)를 하는 때가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우산이나 장난감을 갖고 잠깐 내려가는 일이 뭐가 힘들다고 거절하거나 직접 집에 와서 가져가게 했는지 마음이 잔뜩 상해 있는 아이를 볼 때는 내가 너무했나 싶은 애처롭기까지 한 순간들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재택을 하면서 일을 하고 있는 중이기도 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에도 나는 늘 그 정도의 일쯤은 스스로 하게 하는 것이 철칙이기도 하다.


그런 철칙을 세운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길 바라서이다. 코로나19 이후 현재까지도 줄곧 재택업무를 하고 있는데 '엄마가 집에 있어도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니 너의 모든 것을 돌봐주기는 어렵다. 온라인 미팅 중일 때는 엄마가 필요한 일이 있어도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엄마의 일을 방해하면 안 된다.'와 같은 몇 가지 원칙을 알려주며, 내가 출근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는 환경을 어느 정도는 유지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덕분인지는 몰라도 린아는 엄마, 아빠의 삶과 시간도 존중해줄 줄 알고 자신의 할 일은 대부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아이로 잘 성장해주고 있는 것 같다.


넘치는 사랑을 받고는 있지만 부모의 과한 희생이 더해졌을 때 독립성이 부족해지는 주변 아이들을 보며 지나치게 부모에게 의존하고, 심지어 부모를 통제하고자 하는 모습까지도 확인할 수 있었는데 결국 부모와 아이의 갈등으로 이어지며 부모 자신이 크게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를 더러 보았다.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을 힘들어하는 부모가 주는 사랑이 과연 아이에게 온전하게 전달될 수 있을지 만무하다.


육아의 목표는 자립과 독립이라는 오은영 박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은 결국 독립된 인격체로 살아가야 하며, 스스로 결정하고 행하고 책임지며 사는 일을 평생 해나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다양한 스트레스를 언제까지 부모가 사전에 차단해 줄 수 없을뿐더러 인생에 휘몰아치는 숱한 스트레스를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내면의 힘을 기르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괴테가 남긴 부모가 자녀에게 주어야 할 두 가지는 날개와 뿌리라고 한다. 전영애 교수님은 그것을 붙들어두지 말고 날아갈 수 있는 꿈을 갖게 해 주고, 자기가 설 수 있게끔 뿌리내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라고 하셨다. 마지막으로 전영애 교수님이 괴테가 남긴 말 중 가장 좋아하신다는 구절을 교수님이 하신 말씀 그대로 옮겨보며, 교수님처럼 세상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어른을 더욱 많이 만나면서 살아가고 싶은 소망과 나도 그런 가식 없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는 어른으로 자라고 싶다는 다짐을 2023년 새해에 남겨본다.


"제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입니다. 여기는 그 반대말입니다. '올바른 목적에 이르는 길은 그 어느 구간에서든 바르다' 바르게 살면 손해 볼 것 같죠? 제가 조금 버릇없이 말하겠습니다. 살아봤더니 바르게 살아도 괜찮아요. 바르게 산다고 꼭 그렇게 손해 보고 사는 거 아니에요."

- 2022년 KBS 다큐 인사이트 [인생정원 - 일흔둘 여백의 뜰] 전영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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