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니

by 김지현

2022년

4월 9일. 하니가 엉덩이에 피를 묻히고 나타났다. 다가가 살펴보니 여섯 개의 젖꼭지 중에 세 개가 빨갛게 부풀어 있었다. 새끼를 낳은 것이다. 종일 마당에서 죽치던 하니는 새끼를 낳은 뒤로는 밥 먹을 때만 왔고 밥을 먹고 나면 바로 가버렸다.

6월 6일. 새끼들을 어디서 키우는지 알고 싶어서 하니의 뒤를 밟았다. 하니가 불안한 눈빛으로 계속 뒤를 돌아보며 언덕을 지나 풀숲으로 들어갔다. 길이 끊긴 풀숲은 빈집의 뒷마당으로 연결됐다. 하니가 마당에 들어서자 쥐방울만한 새끼들이 달려와 하니의 품에 파고들었다. 노랑과 아이보리 두 마리였다. 하니가 새끼들에게 젖을 먹이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다.

6월 23일. 하니가 우리 마당에 새끼들을 데리고 왔다. 젖 뗄 때가 돼서 밥을 먹이려고 데려온 것 같았다. 하니는 새끼들과 종일 붙어 지냈다. 눈앞에 새끼들이 보이지 않으면 단전에서 끌어올린 크고 굵은 소리로 새끼들을 불렀고, 새끼들은 그 소리를 들으면 어디서든 달려가 하니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여름 내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왔다. 새끼들은 감기에 걸려 눈물 콧물 범벅에 설사를 했지만 잘 먹고 잘 놀았다.

8월 7일. 모처럼 비가 그친 맑은 날이었다. 하니가 무릎까지 자란 풀숲에서 아이보리와 장난을 치며 놀았다. 노랑이는 한 켠에 웅크리고 있었다.

8월 8일 서울에 기상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많은 비가 내렸다.

8월 9일 노랑이가 마당에서 죽은 채 발견됐고 아이보리는 사라졌다. 하니가 며칠 동안 새끼들을 부르며 돌아다녔다.


2023년

3월 24일. 하니가 종일 야옹대며 집 주변을 헤매고 다녔다. 새끼 낳을 자리를 찾아다니는 것 같았다.

3월 25일. 하니가 지친 모습으로 마당에 나타났다. 엉덩이가 누런 액체로 젖어 있었다. 새끼를 낳은 것 같았다. 하니는 사료를 절반도 안 먹고 가버렸다.

3월 26일. 하니가 잠깐 와서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가버렸다. 하니를 뒤따라갔다. 하니는 내가 따라가는 걸 알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이 든 여자처럼 천천히 걸어서 빈 집 지붕 위로 사라졌다. 처음 새끼를 낳아 길렀던 집이었다.

3월 27일. 외출했다 들어가니 하니가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하니를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밥을 줬다. 하니가 밥을 안 먹고 침대에 올라가더니 웅크린 채 잠들었다. 그렇게 움직이지도 않고 다음 날 아침까지 잤다.

3월 28일. 하니는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나서도 밖에 나가려 들지 않았다. 새끼들이 잘못된 것 같았다.

4월 10일 하니를 병원에 데려가 중성화 수술을 시켰다.

4월 17일 마당에서 싸우는 소리가 나서 내다보니 흑두건이 하니에게 으르렁대고 있었다. 입에서는 침이 질질 흐르고 몸은 뼈가 드러나게 말랐지만, 성질은 여전했다.

내가 처음 야적장에 급식소를 차렸을 때부터 흑두건은 그곳에 밥을 먹으러 드나들었다. 처음 봤을 때 새끼 두 마리를 달고 다녔는데, 그 중 하나가 찰리였다. 흑두건은 그 뒤에도 해마다 봄가을로 새끼를 낳았다. 하니가 첫 임신을 했을 때도 같이 배가 불러서 다녔다. 하니와 같은 시기에 새끼를 낳았을 텐데, 그 새끼들은 보지 못했다. 한동안 흑두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늦가을 어둠 속에서 혀를 빼문 채 웅크리고 있는 흑두건을 보았다. 구내염에 걸린 것이다. 그런 상태로는 겨울을 넘기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흑두건은 겨울이 지난 뒤에도 가끔 마당에 나타났다.

어쩌다 흑두건의 가계를 옆에서 지켜보게 됐다. 내가 별 일 없이 서너 살을 먹는 동안 출산의 여왕이던 흑두건은 병들고, 찰리는 죽고, 하니는 두 번에 걸쳐 새끼들을 모두 잃었다. 그런 일들을 옆에서 보고 있노라니 내가 천년을 사는 은행나무가 된 것 같았다.

구내염에 걸려 혀를 빼물고 있는 흑두건

(그림 설명-흑두건은 매일 야적장에 밥을 먹으러 오면서도 나만 보면 하악질했다. 나한테만 그러는 게 아니라 긴코와 고소영한테도 그랬고, 한때 애지중지하던 찰리와 하니한테도 그랬다.

어느 날 어두운 골목에서 웅크리고 있는 흑두건과 마주쳤다. 흑두건은 구내염을 앓으며 두번째 겨울을 지나고 있었다. 더 마르고 더 더러워진 흑두건이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그냥 지나가려다 멈춰 서서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네. 어떻게 지냈어?” 흑두건의 경계하는 표정이 의아해하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는 나지막한 소리로 말을 계속했고, 흑두건은 긴장을 풀고 시선을 돌렸다.

흑두건은 그 겨울을 나고 봄을 지나 여름에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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