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

by 김지현

매일 만보를 걷는다. 외출한 날은 밖에서 걷고 들어오고 집에 있는 날은 동네에서 걷는다. 동네에 걷는 코스들이 있다. 첫번째 코스는 산비탈의 마루이다.

몇 해 전 인부들이 산비탈에서 뚝딱거리더니 산 밑에서 꼭대기까지 계단이 놓였다. 왜 이런 데다 예산을 썼나 싶게 오가는 사람이 없는 덕분에 계단 중간의 널찍한 마루는 나의 개인 공간이나 다름없다. 마루의 크기는 가로 24보 세로 15보. 일직선으로 걸으면 혜화를 지나 종로와 을지로를 거쳐 충무로까지 가야 만보인데, 직사각형 마루에서 만보를 채우려면 250바퀴를 돌아야 한다. 주위의 풀과 나무에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가 익고, 낙엽이 지는 걸 보며 마루를 맴돌고 있으면, 녹색 목걸이를 한 고양이가 계단을 내려온다. 의자에서 세수하는 녀석이 놀라 가버릴까 봐 나는 멀찌감치 떨어져 작은 직사각형을 그리며 걷는다. 하지만 녀석은 금방 가버린다.

두번째 산책 코스는 스카이웨이다. 밤에는 어두운 풀숲을 지나기가 무서워서 산비탈에 안 가고 슈퍼 앞 도로를 걷는다. 도로 중간에 있는 잣나무 아래를 지날 때마다 습관적으로 가지를 올려다보게 된다. 가지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간 형태가 손가락 욕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데, 누가 나를 앞질러 뛰어간다. 옆집 청년이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나는 겨울 잠바를 꺼내 입었는데, 그는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다. 류길동. 혼자 사는 그의 집 문패에 적힌 이름은 그의 이름일까? 주말이면 그의 마당에서 최신 가요를 틀어 놓고 줄넘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의 귀에 꽂혀 있는 이어폰에서는 같은 음악이 흘러나올 것이다. 오르막을 뛰어 사라졌던 그가 금세 도로를 한 바퀴 돌아 반대편에서 뛰어온다. 도로의 짧은 구간을 오가는 나는 이번에는 그와 마주보고 걷는다. 눈코입이 흐릿한 계란형의 얼굴. 그는 코로나 이후에도 줄곧 쓰고 다니던 마스크를 최근 들어 벗었는데, 맨 얼굴이 여러 번 봐도 익숙해지질 않는다. 우리는 몇 년째 같은 도로에서 운동하지만 눈을 마주치지도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길 가장자리에 바싹 붙어 서서 서로를 지나친다. 그는 도로를 서너 바퀴 전력 질주한 뒤 집으로 들어가지만, 내게는 아직 7천보가 남아 있다.

밤 늦은 도로에는 배달 오토바이와 귀가하는 차만 드문드문 오간다. 검은 차가 다가와 속도를 줄인다. 주차를 하려는 것이다. 나는 눈을 찌르는 전조등을 피해 뒤 돌아섰다가 전조등이 꺼지고 나서 다시 돌아선다. 9인승 카니발의 문이 열리면서 중학생처럼 몸집이 작은 50대 남자가 내린다. 남자가 리모컨으로 차문을 잠근 뒤 몸을 좌우로 흔들며 걷는다. 실루엣으로 보이는 남자의 다리 한쪽이 조금 짧다. 그가 계단을 내려가고 나서 내가 도로를 두어 번 왕복했을까. 언제나처럼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그가 배가 땅에 닿을 것 같이 살 찐 웰시코기를 앞세우고 계단을 올라온다. 그는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목줄을 길게 잡고 웰시코기가 끄는 대로 끌려 다닌다. 둘은 오래 산 부부처럼 서로에게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각자 제 볼 일을 보다가 계단을 내려간다.

이제 도로에는 귀가하는 차도 배달 오토바이도 다니지 않는다. 텅 빈 도로를 걷는데 어두운 골목에서 60대 남자가 걸어 나와 슈퍼로 향한다. 슈퍼에서 나오는 그의 손에는 검정 비닐 봉지가 들려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비닐봉지 안에서 술병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그가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지자 슈퍼의 불이 꺼진다.

나는 불 꺼진 슈퍼 앞 의자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다. 그 자리가 막이 오르기 전의 관객석처럼 아늑하다. 조용히 어둠을 음미하는데 언덕 아래서 딸랑이는 소리를 앞세우고 빨주노초 색등으로 장식한 마을버스가 올라온다. 환한 버스 안에는 젊은 남녀 둘뿐이다. 버스에서 내린 남녀는 가로등 조명 아래에서 서로를 껴안는다. 드라마의 연인들처럼 여자는 남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남자는 여자의 정수리에 얼굴을 묻은 자세다. 남자는 키가 작은 편인데, 여자가 거기에 알맞춤하게 작아서 가능한 자세다. 남자는 매일 밤 여자를 바래다주고 다음 버스를 타고 간다. 그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남녀는 가로등 아래 포옹을 풀지 않는다. 그들을 쳐다보고 있기가 뭐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도로를 한 바퀴 돌아와도 두 바퀴 돌아와도 남녀는 시간이 멈춘 듯 같은 자세다. 도로를 네 바퀴째 도는데 마을버스가 지나간다. 남자가 그 뒤를 따라 전속력으로 달린다. 돌아보니 여자가 정류장에 서서 남자를 쳐다보고 있다. 버스가 다음 정류장에 멈췄다 출발하자 여자가 집으로 들어간다.

만보기를 확인한다. 10245. 점수 주위로 폭죽이 터진다. 나는 가로등 아래 텅 빈 무대를 지나 집으로 향한다.

이전 22화고소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