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랑 요다랑 물에 빠지면 누굴 구할 거야?” 내가 물었더니 진우가 대답했다. “요다는 내 자식이야.” 요다를 구하겠다는 뜻이었고 진심이었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무조건 진우를 구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진우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에 빠진 게 전두환이라 해도 나는 전두환을 구한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전두환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옛날 이야기에는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동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람을 해치려는 지네와 맞서 싸우다 죽는 두꺼비, 사람을 구하기 위해 종에 자기 머리를 부딪치는 까치 등이 그렇다. 사람이 동물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도 적지 않다. 그러나 부러진 제비 날개를 고친다거나 잡은 잉어를 놔주는 식으로 큰 수고를 하지 않는 선에서 그렇게 하는 거지,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동물을 구하는 경우는 없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동물들은 현실에도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는 오수의 개다. 사람들은 의견비까지 세워 그 값진 희생을 기린다. 그런데 현실에는 동물을 구하고 죽는 사람들도 있다. 나 어릴 적에는 겨울철이면 얼음물에 빠진 개를 구하고 죽은 아이들의 기사가 신문에 실리곤 했다. 그런데 아이들의 죽음은 값진 희생이 아니라 개죽음으로 여겨졌다. 귀하디 귀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찮은 동물이 희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거꾸로는 바보짓이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과 동물이 물에 빠지면 당연히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감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상상조차 한 적 없다. 그런데 요다와 내가 물에 빠지면 요다를 구하겠다니, 진우의 대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주위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해보았다. 내 또래는 대체로 나와 같은 선택을 했는데, 젊은 사람들은 달랐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나한테 더 소중한 존재를 구할 거 같아요.”
나보다 나이가 한참 어린 수연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래도 사람을 구해야 하는 게 아닌가?”
“요다를 안 구하고 전두환을 구하겠다니 너무해요.”
처음 대화를 시작할 때는 수연의 선택 기준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대화를 하면서 그의 기준이 좀 더 자연스럽고 합리적으로 보이기 시작하더니, 짧은 대화가 끝났을 땐 요다가 아니라 전두환을 구하겠다는 좀전까지의 내 생각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즈음 ‘무인도그’라는 유튜브를 보게 됐다. 유튜버 덕곡은 11마리의 개와 같이 남해안의 손바닥만 한 무인도에 살고 있었다. 멀쩡한 청년이 그러고 사는 까닭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튜브 대문에 사연이 적혀 있었다. 집에서 키우던 암캐 두 마리가 동시에 새끼를 낳았는데 도저히 집에서 다 키울 수는 없고 분양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서 개들을 데리고 있을 곳을 찾아 무인도로 들어갔다고 했다. 그가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기 위해 뭍에서의 삶을 포기했다면 훌륭한 청년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개를 돌보겠다고 무인도로 들어가다니 선뜻 납득이 되지 않았다. ‘젊으나 젊은 사람이 왜……’ 유튜브를 보는 내내 그런 의문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하는 생각이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와 같다는 걸 깨달았다. “젊으나 젊은 사람이 생산적인 일을 해야지 고양이만 끼고 시간 낭비해서 되겠니.” 그건 엄마가 맨날 나에게 하는 잔소리였다. 엄마는 자기도 고양이들을 돌보고 있고 고양이들 밥시간에 늦을까 봐 외출할 때마다 집에 들어가기 바쁘면서도 동물을 돌보는 건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 엄마를 답답하게 여겼는데, 나도 다를 게 없었다.
섬 생활은 빡셌다. 물 한 방울 나지 않는 곳이라 물을 포함한 생필품 일체를 배로 실어와야 했고 섬 꼭대기의 텐트까지 그것들을 져 날라야 했다. 모든 일은 덕곡의 몫이었다. 개들은 그를 쫓아다니며 장난치고 훼방만 놨다. 개들을 타이르는 그의 경상도 말씨가 다정했다. 그는 운반해 온 닭을 삶아 일일이 뼈를 발라 개들에게 먹이고, 밤이 되자 자는 개들의 옷을 꿰맸다. 개를 구하려고 얼음물에 뛰어들었던 아이들이 30년 후 다시 태어난다면 그런 모습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