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다는 시도 때도 없이 밖에 나가고 싶어 했고, 밖에 나가면 나가자마자 풀을 뜯어먹었다. 요다 먹일 풀을 화분에 심어 기르기로 했다. 다이소에서 천 원 주고 캣그라스로 나온 귀리 씨앗을 샀다. 귀리 키우는 법을 검색해보니 씨앗을 심기 전에 먼저 물에 불리라고 했다. 봉지에 든 씨앗을 전부 물에 쏟았다. 그런데 준비된 화분은 그 십 분의 일도 심을 수 없는 작은 크기였다. 블로그의 사진에서 본 파랗고 싱싱하게 자란 귀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게 자랄 수 있는 씨앗들이 싹도 틔워보지 못하고 썩게 생긴 것이다. 씨앗을 불리는 내내 고민하다가 씨 뿌리는 날 긴 텃밭용 화분을 들여왔다. 요다를 먹이는 데는 그렇게 많은 풀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실용적 판단보다 씨앗을 살리고 싶은 마음이 더 힘이 셌다. 요다를 먹이려고 씨앗을 샀다가 그만 씨앗을 살리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힌 것이다.
맹자는 측은지심,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보면 깜짝 놀라 걱정하게 되고 속상해하는 마음이 생기는데, 인간이라면 누구도 이 마음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맹자는 이 마음을 근거로 인간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선한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위험에 처한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의 피할 수 없는 본성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요다가 아프고 부터 요다에게 아침 먹이는 일로 하루가 시작됐다. 내 무릎에 앉아 밥을 받아먹는 요다의 윤기 없는 털을 보고 있으면 그 위로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떡진 머리가 겹쳐졌다. 아버지는 늘 아팠다. 워낙 몸이 약하기도 했지만 일 년 365일 술을 마시니 안 아플 수가 없었다. 엄마는 술에 취한 아버지와 싸우고 허구한 날 신세 한탄을 했는데, 내가 이혼하라고 하면 자기마저 버리면 누가 아버지를 돌보겠냐면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엄마가 그러고 사는 걸 여자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탓으로만 여겨왔다. 엄마의 돌봄이 유독 아버지에게 집중된 건 가부장제의 영향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를 돌보는 마음은 가부장제와 비교할 수 없이 오랜 기원을 갖는다. 자궁을 가진 동물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데서 비롯된 그 마음으로 우리는 아이만이 아니라 가족과 이웃 그리고 농작물과 가축을 돌본다. (여기서 자궁을 가진 동물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 나아가 포유류를 가리킨다. 더 넓게는 우리와 전혀 다른 진화의 과정을 거쳤으나 우리처럼 새끼를 돌보는 습성을 지닌 조류나 개미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개미가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개미도 유충을 돌보는 바로 그 마음으로 버섯과 진딧물을 돌보는 게 아닐까.) 이혼하라고 할 때마다 고개를 젓던 엄마를 나는 뒤늦게 이해했다. 일찍이 맹자가 말했던 그 마음을 엄마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리라. 피할 수 없는 그 마음이 우리를 서로에게 연루시키고 꽁꽁 묶는다. 엄마가 술 마시는 아버지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같이 살고, 내가 요다를 데려와 굳이 질 필요가 없었던 의무를 지고 사는 일이 다 그 마음 때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