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키네 집

미얀마 태국 여행 2018-2019 6화 방콕

by 김지현

유혹만큼 사람을 힘들게 하는 게 없다. 그런데 나는 어리석게도 지독히 유혹적인 상황에 자신을 몰아넣은 것이다. 여행하면서 안 걷는 건 불가능했다. 다리 눈치를 보면서도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고, 다리가 아프도록 돌아다니고 나서는 욕심만큼 못 돌아다닌 게 억울했다. 그렇게 여행 내내 안 걸을 수도 없고, 양껏 걸을 수도 없는 이중의 괴로움에 시달렸다.

미얀마 한 달 비자가 만료되는 날 방콕행 비행기에 올랐다. 이제 방콕에서의 한 달이 남아있었다. 여행을 하는 한 나를 숙소에 붙잡아 둘 수 없을 것이고, 지금까지의 괴로움이 고스란히 계속되리라. “비행기 날짜를 바꾸고 싶은데요, 한 달 후 방콕에서 인천 가는 비행기푠데, 그걸 오늘 가는 거로 바꿀 수 있을까요?” 승무원에게 물었다. 방콕 공항에서 곧바로 서울로 돌아갈 작정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까지 가는 셔틀버스에 올랐다. 미얀마 북쪽 도시에 비해 남쪽의 방콕은 확연히 따뜻했다. 얼굴에 닿는 공기가 부드럽고 향긋했다. 이런 곳을 두고 춥고 어두운 12월의 서울로 돌아가려 하다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된 것이다. 나는 짐을 찾아 방콕 시내로 들어가는 택시에 올랐다.

다닐 만큼 다녔으니 방콕에서는 정말 숙소에만 있자고 결심했다. 종일 호텔방에 있는 건 생각만으로도 답답해서 에어비앤비를 예약하기로 했다. 에어비앤비는 현지인들이 사는 집에 방 하나를 빌리는 것이니 현지인이 사는 모습을 볼 수 있고 현지인과 사귈 수도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에어비앤비 사이트에서 사원 옆에 있다는 집이 눈에 띄었다. 호스트는 자기 집을 태국의 절 생활을 경험할 수 있는 곳으로 소개했다. 명상센터에서 나온 뒤로 동남아의 절 생활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었는데, 바로 내가 찾던 집이었다. 호스트에 대한 댓글도 칭찬 일색이었다. ‘최고의 호스트’, ‘푸키에게 받은 친절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친절한 사람은 내 생애 처음 만나봤다.’ 서둘러 예약 버튼을 클릭했다.

에어비앤비는 호텔에 비해 체크인하기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다. 무엇보다 주소만 가지고 집을 찾기가 쉽지 않다. 푸키의 집에 도착하던 날도 택시에서 내려 푸키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잠시 후 절 옆으로 난 좁은 골목으로 중년의 뚱뚱한 여자가 뚱뚱한 사람 특유의 팔자걸음으로 느릿느릿 다가왔다. 푸키였다. 집은 골목 안쪽에 있었는데, 자갈길이라 트렁크가 끌리질 않았다. 호텔 같았으면 날렵한 직원이 짐을 들어 어깨에 지고 앞장섰을 것이다. 그러나 푸키는 나 이상으로 몸이 안 좋아 보였다. 우리는 같이 손잡이를 맞잡고 트렁크를 끌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방을 예약할 때 방이 1층에 있는지, 만약 1층이 아니라면 엘리베이터가 있는지를 반드시 확인했다. 푸키의 집은 미리 확인했던 대로 단층. 그런데 현관에 이상한 구조물이 있었다. 현관을 빙 둘러 50센티 높이로 쌓인 벽돌. 뭘까, 이 구조물은? 그것의 정체는 제방이었다.

몇 년 전 태국에 큰 물난리가 났다. 북쪽에서부터 시작된 물로 태국 전역이 잠겼는데, 북쪽에서부터 방콕 외곽의 그곳까지 물이 내려오는데 한 달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물난리에 대비했다. 마을 입구에 모래포대로 제방을 쌓았고, 푸키는 집 현관에 50센티 높이로 벽돌 제방을 쌓았다. 그러나 물은 간단히 제방을 넘어 마을을 휩쓸고 50센티 벽돌을 넘어 푸키의 집으로 들어왔다. 한동안 사람들은 배를 타고 다니고 개들은 헤엄쳐 다녔다. 물이 빠지고 나서 벽돌 제방은 체리의 집이 되었다. 체리는 푸키네 개다.

물과 개는 가볍게 넘어 다니는 그 제방을 푸키와 나는 코끼리처럼 무겁게 넘었고, 트렁크를 그 너머로 넘기기 위해서는 앞뒤에서 트렁크를 껴안고 안간힘을 써야 했다.

간신히 트렁크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은 칸막이가 없는 원룸이었다. 푸키가 한쪽에 놓인 침대와 소파를 가리키며 거기가 내 자리라고 알려줬다. 예약사이트에서 셰어하우스라고 적힌 걸 보긴 했는데, 부엌이며 화장실은 같이 써도 방은 따로 쓰는 줄 알았다. 내 몫의 소파에 트렁크를 올려놓고 내 몫의 침대에 걸터앉아 푸키를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푸키는 말하는 걸 좋아했다. 푸키는 영어를 잘 했지만 태국식 억양이 강한데다 말이 빨라서 알아듣기가 쉽지 않았다. 재미난 얘길 하는 것 같은데 다 알아듣지 못해서 아쉬웠다. 더듬더듬 이해한 바로 푸키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푸키는 고등학교 때까지 테니스 선수 생활을 했다. 꽤 잘하는 편이라 국제대회에도 나가고 신문에도 났다. 벽에 신문에 난 사진이 붙어있었다. 허공으로 날아올라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고 있는 흑백사진. 푸키는 그 시절의 날씬한 모습을 자랑스러워했다.

한동안 보석 공예를 하기도 했다. 푸키가 각종 장식을 좋아한다는 건 집에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있다. 벽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진열장에는 푸키가 만든 장신구부터 인형, 액자, 조화, 불상이며 연꽃 같은 불교 장식품들이 선반이 휘도록 놓여있었다. 특히 원색을 좋아해서 옷걸이에 걸린 수십 벌의 원피스, 카펫, 커튼, 침구가 모두 빨갛고 노랗고 파랗게 알록달록했다. 그런 취향이니 절에서 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푸키는 절에서 20년 넘게 살다가 이 집을 얻어 절 밖으로 나왔다. 절 밖으로 나온 지는 꽤 됐지만 에어비앤비를 시작한 건 일 년이 안 됐다. 푸키는 손님들이 태국의 절 문화를 경험할 수 있도록 자기가 도울 수 있는 걸 돕고 싶다고 했다.

“너 불교신자야?”

푸키가 물었다.

“아니지만 미얀마에서 열흘간 명상센터에 있었어.”

내가 대답했다.

“명상을 계속할 마음이 있어?”

“응.”

푸키가 절의 하루 수행일정을 줄줄이 읊더니 곧 행선 시간이라면서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12월 30일이었다. 절은 신년기도를 하는 신도들로 인산인해였다. 내가 서울에서 가본 절 중엔 길상사가 제일 큰데, 방콕에는 웬만한 절들은 그 이상의 크기에다 그런 규모의 절이 걸어서 십여 분 거리마다 하나씩 있다. 왓상하탄은 그중에서도 규모가 큰 편으로 신년을 맞아 수백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그 안에서 먹고 자며 생활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모두 위아래 흰 유니폼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 때문에 얼핏 추적60분에 나오는 사교 집단처럼 보였다.

오전 8시 반이 가까워지자 신도들이 길 가득 몰려나와 줄지어 섰다. 곧 행선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스피커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행선의 주제곡이었다. 전주가 나오자 개들이 여기저기서 “우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절집 개들은 찬불가를 부를 줄 알았다. 절집 생활이 길어지면서 나도 그 노래가 나올 때마다 따라 흥얼거리게 됐다.

푸키가 걷는 법을 알려줬다. 행선은 한 번에 한 발씩 천천히 걷는 것으로 걷는 동안 두 발 중 한 발이 허공에 떠 있게 됐다. 두 발로도 균형을 잡기가 쉽지 않은 나로서는 동작을 따라 하기가 쉽지 않았다. 못하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예전엔 왜 이런 것도 못하나 그랬는데, 나도 이젠 이게 어려울 수 있다는 걸 이해하게 됐어.” 푸키가 말했다. 원숭이띠로 나와 동갑인 푸키는 비만 때문인지 나만큼이나 다리가 부실했다.

우리는 행렬에서 빠져나와 식당 앞에 앉았다. 식당 안에서 식사준비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푸키가 절에서 밥을 먹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 될 거라면서 기다렸다가 아침을 먹자고 했다. 배식에는 순서가 있었다. 맨 앞이 스님들, 그다음이 절 안에 거주하는 흰옷 입은 신도들, 맨 마지막이 우리 같은 사복 순이었다. 배식이 시작되자 수십 명의 스님 뒤로 흰옷의 줄이 끝이 안 보이게 이어졌다. “신년행사 끝나면 사람이 없지 않아? 그때 다시 오면 안 될까?” 기다릴 엄두가 나질 않아 내가 말했다. “집 안에 있는 거보다는 밖에 나와서 무슨 일이 있는지 보는 게 훨씬 낫지.” 푸키가 체험학습지도 선생님처럼 말했다.

시간이 지나자 줄이 줄긴 줄었다. 흰옷들이 거의 들어가자 우리도 자리에서 일어나 맨 뒤에 섰다. 배식 순서는 엄격하게 지켜졌다. 흰옷이 올 때마다 사복 아주머니들이 수선스럽게 자리를 양보했다. 마침내 흰 옷들이 다 들어가고 사복 차례가 되었다. 그런데 마지막 흰옷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식당 스태프들이 잽싸게 철문을 닫아걸었다. 다시 문이 열린 후의 아수라장을 보고서야 스태프들이 문을 닫아건 까닭을 알 수 있었다. 흰옷들의 배식이 끝나고서야 다시 문이 열렸는데, 문이 열리자마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아우성치는 바람에 문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몸싸움에서 이기고 먼저 들어간 이들은 준비해온 솥과 비닐봉지에 음식을 쓸어 담았는데, 그 기세가 어찌나 맹렬한지 도저히 그 틈에 끼어들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이 시간엔 동네 가난한 사람들이 밥을 가지러 와.” 푸키의 설명이었다. 그들이 한 차례 휩쓸고 간 자리엔 남은 음식이 거의 없었다. 푸키와 나는 귤 몇 개를 챙겨서 밖으로 나왔다.

식당에서 음식을 못 챙겼다고 서운할 것은 없었다. 문 앞에서 한 아주머니가 자기 몫의 바나나와 바나나 밥을 빈 그릇에 넣어주었다. 또 식당 앞에 줄줄이 늘어선 포장마차에선 공짜 음식을 나눠주고 있었다. 신년을 맞아 복을 지으려는 이들이 음식을 준비해 나온 것이다. 꼬치를 굽고 야채를 튀기고 아이스크림을 푸는 부지런한 손길들에서 나는 몇 해 전의 촛불광장을 떠올렸다. 우리가 그 예외적인 나눔에 감격하고 흥분했었던 데 반해 이곳에선 그런 일들이 일상적이고 담담하게 행해지고 있었다.

그날 밤엔 신년맞이 법회가 철야로 계속됐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법문은 자정을 넘어 한두 시가 지나도 끝나질 않았다. 몇 시나 됐을까. 스피커가 잠잠해져 겨우 잠이 들려는데 이번에는 푸키가 일어나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새벽에는 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나가서 봐봐.” 푸키가 또 체험학습지도 선생님처럼 말했다.

말 잘 듣는 학생처럼 밖으로 나갔다. 새벽 5시, 흰옷의 무리가 절 여기저기에 가득했다. 어슬렁거리며 절을 돌아다니다가 야외법회를 하는 중앙광장에 이르렀을 때는 해가 뜨고 있었다. 중앙광장 맨 앞에는 스님이 앉는 좌대가, 좌대를 빙 둘러 바닥에는 대중들을 위한 카펫이 깔려있었다. 광장 사이사이에 높이 솟은 나무에서는 새들이 지저귀고 그사이를 신도들이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로 오갔다. 나는 광장을 가로지르며 생각했다.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녹야원의 모습이 이와 같지 않았을까. 더운 지역에 사셨던 부처님도 뜨거운 한낮을 피해 선선한 아침저녁으로 대중 설법을 하셨을 테고, 당대 최고의 스타 구루였을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자 찾아온 대중들이 이처럼 넓은 광장을 가득 메웠을 것이며, 대중들 주위에는 이처럼 키 큰 열대 나무들이 그림자를 만들고 나무 위에선 새들이 지저귀었으리라. 이런 생각을 하면서 걷는데, 여러 명의 신도가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성난 얼굴로 소리쳤다. 신발을 벗으라는 거였다. 당장 신발을 벗지 않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날 분위기였다. 부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 규율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이토록 사납게 굴었을까? 황급히 신발을 벗고 가장자리로 가 눈치를 보았다. 그런데 큰 개들 몇 마리가 광장을 제멋대로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무도 개들에겐 훈계하려 들지 않았다. 부처님 당시에도 개들이 광장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법문하시는 부처님 앞을 제멋대로 돌아다녔을 개들을 떠올리니 멀고 먼 녹야원이 정답게 다가왔다.

절에서 나와 숙소로 가다가 푸키를 만났다. 푸키가 아침을 먹으러 가자고 해서 따라가 아침을 먹고, 큰 스님을 뵈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해서 거기도 따라갔다. 푸키가 스님께 드릴 아침밥을 사면서, 내게는 꽃을 사라고 했다. 꽃을 사 들고 냄새를 맡았다. 그러자 푸키가 스님께 드리는 꽃은 냄새를 맡는 게 아니라고 했다. 존경의 뜻으로 드리는 건데 냄새를 맡는 건 그 꽃을 드리기 전에 내가 먼저 꽃을 써버리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냄새가 닳는 것도 아닌데.’ 나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제사에 올릴 전을 부치다가 집어먹으면 엄마는 조상님께 올리는 음식은 제사 전에 먹는 게 아니라며 야단을 치곤 했다. ‘제사 끝나면 식어서 맛없는데.’ 나는 몰래몰래 집어먹으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드리기 전에 음식을 먼저 먹지 않고 냄새조차 먼저 맡지 않는 존경의 마음을 나는 도무지 모르는 사람인 것이다.

1월 1일 아침. 곧 탁발이 시작될 모양이었다. 신도들이 길 양옆에 자리를 잡고 스님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 가게 앞에서 푸키가 스님께 드릴 선물세트를 사라고 했다. 통조림, 두유, 라면 같은 저장식품들을 비닐봉지에 넣어 입구를 리본으로 묶은 선물세트. 잠시 후 스님들이 우리 앞을 지나갔다. 신도들이 앞다투어 스님들께 선물을 드렸다. 저 많은 선물을 다 어떻게 들고 가실까?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스님들은 받은 선물을 뒤에 선 남자가 든 포댓자루에 넣었다. 스님들이 지나간 길 뒤로 포댓자루들이 쌓이자 트럭이 따라오면서 그것들을 트럭에 실었다. 트럭이 나른 포댓자루는 여자들이 둘러앉아 분류해 정리했다. 그런 일들이 착착 진행되는 동안 스님들의 탁발은 계속됐다.

탁발이 끝나자 푸키가 명상하러 같이 가자고 했다. 명상엔 푸키의 또 다른 게스트가 동행했다. 예의로라도 웃는 표정을 짓는 법이 없는 무뚝뚝한 러시아인이었다. 푸키는 집 근처에 프라이빗 룸을 두 개를 운영했는데, 거기에 묵는 게스트였다. 그는 그날 방을 비워야 했는데, 며칠 더 머물며 명상을 계속하고 싶어 했다. 푸키가 좋은 생각이 있다면서 텐트를 빌려주겠다고 했다. 명상이 끝난 후 푸키가 집에 들러 텐트와 침구를 챙겼다. 나도 베개를 들고 따라나섰다. 러시아인이 절 공터에 텐트를 치는 동안 나는 베개를 들고 서 있었다.

그런데 푸키는 왜 이토록 열심히 절 생활을 안내하고 수행을 하도록 돕는 것일까? 나는 처음 며칠은 푸키가 절에서 외국인 포교 업무를 맡아서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그건 아니었다. 혹시 종교 공동체 특유의 태도일까? 그러나 절이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난 태국인들도 하나 같이 처음 만난 외국인을 멀리서 온 친척이나 친구 대하듯 대했다.

친구가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했는데, 외국 손님이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직접 데려가고, 닭백숙 식당을 물으면 퇴근 후에 식당에 데려가 자기는 닭을 먹지도 않으면서 마주 앉아 말동무한다고 했다. 친구가 그런 얘길 할 때마다 나는 오버하지 말고 돈 받은 만큼만 일하라고 충고했다. 관계마다 친절의 적정선이 있어서 그 이상의 친절은 오히려 관계를 불편하게 만들고 자신에게도 부담이 된다는 게 나의 주장이었다. 그래도 친구의 행동까지는 이해해줄 수 있었다. 그런데 만약 친구가 나와의 저녁 약속에 손님을 데려오고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면, 정말 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푸키는 손님이 아프다고 하면 병원에 데려가고 손님과 매끼를 같이 먹다시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딜 가든 손님을 데리고 다녔다. 그리고 푸키가 가자고 하면 어디든 사양 않고 따라다니는 가장 대표적인 손님이 바로 나였다.

푸키는 대부분 시간을 손님들과 어울렸다. 아침이나 점심 식사 약속에 따라가 보면 개인실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몇 달째 장기 투숙하는 로렌조와 자주 어울렸는데, 나도 그 모임의 일원이 되었다. 로렌조의 여자친구까지 4명이 택시 정원을 꽉 채워서 같이 다녔다. 점심에는 큰길가에 있는 이슬람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다니고, 로렌조가 근처 쇼핑몰에 핸드폰 수리를 하러 가거나 병원에 갈 때도 같이 다녔다. 우리는 체력면에서 잘 맞았다. 58세의 로렌조는 푸키와 나 이상으로 다리가 좋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느릿느릿 걸었고, 그나마도 잘 걷지 않았다. 나는 짧은 거리도 택시를 타겠다는 여행 전의 결심을 그때까지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는데, 로렌조는 걸어서 5분 거리도 택시를 탔다. 체력이 비슷한 사람들과 같이 다니니 무리할 일이 없어 몸과 마음이 편했다.

푸키가 지방에 갈 때도 다 같이 갔다. 방콕에서 차로 세 시간 거리의 국립공원에 위치한 리조트. 일종의 명상테마파크였다. 파고다 또는 우주선을 흉내 낸 구형의 방들이 파이프 모양의 복도를 따라 이어졌다. 둥글게 모양을 낸 벽은 놀이공원의 인공암석과 같은 소재로 되어있고, 창틀이며 문 같은 건축자재도 싸구려라 호텔이라기보다 세트 같았다. 단체 명상실도 있었는데 방치된 지하실처럼 습하고 퀴퀴했다. 적지 않은 부지에 적지 않은 돈을 들여 그토록 엉터리 건축물을 짓다니 한심했다.

리조트를 돌아보고 나서 리조트 대표에게 점심을 대접받았다. 대표는 건축가이기도 했는데, 직접 리조트를 설계하고 시공했다고 했다. 푸키가 고엔카 명상센터 출신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대표는 그렇게 모기한테 뜯기고 더운 데서는 수행이 안 된다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엔카 명상센터에 있을 때 에어컨이 한 대만 더 있었다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조교들이 워낙 문단속을 잘 해 모기는 없었다. 대표는 마음을 닦으려면 우선 환경이 완벽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부처님이 깨달은 부다가야가 얼마나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인지, 스님들이 명상하는 동굴은 습도와 온도 모든 면에서 또 얼마나 쾌적한 곳인지 말하면서, 명상을 위한 최선의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리조트를 만들었다고 했다. 그는 리조트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구경 잘 하고 점심까지 얻어먹으면서 그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장구칠 수 없어 곤란했다.

푸키가 거기 간 건 대표와 아는 사이라 리조트 운영에 관해 컨설팅을 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푸키는 왜 그런 자리까지 우리를 데리고 다니는 것일까? 염치불구하고 따라다니면서도 나는 계속 그게 의아했다.

처음 보는 외국 손님들을 어디든 데리고 다니며 구경시켜주려 드는 것은 푸키만이 아니었다. 처음 만나던 날 큰 스님은 같이 타마린을 먹다가 당신이 명상센터를 운영하는 깐짜나부리에 타마린 나무가 많다면서 날 잡아 그곳에 같이 가자고 하셨다. 그리고는 바로 다음 다음날로 날을 잡아 연락하셨다. 나야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른 게스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며칠 후 큰 스님을 찾아뵀더니 불상 얘길 하시다가는 불상 깎는 걸 같이 구경하자고 하셨다. 이번에는 대형 택시를 빌려 푸키의 게스트들이 모두 따라나섰다. 언제나처럼 푸키가 통역과 가이드 역할을 했다. 내가 친구에게 충고했던 대로 돈 받은 만큼만 일하기로 하면 푸키가 하는 대부분의 일은 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었다. 스님도 우리를 데리고 다닐 아무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푸키와 스님은 왜 우리에게 이런 친절을 베푸는 것일까? 나로서는 그들의 친절이 끝내 의아하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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