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

뽀삐-김지현

by 김지현

“어려운 부탁이 있어....... 빠삐 좀 맡아주라.” 진숙이 전화를 했다. 집주인과 갈등이 있는데, 개들 때문에 더 곤란한 처지라고 했다.


진숙이네 현관에 들어서면 8마리의 개들이 동시에 짖는다. 개들은 진숙을 따라 우르르 몰려다니다가 진숙이 침대에 누우면 그 주위에 방사형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눕는다. 그 모습이 흡사 목동을 따르는 양 떼들 같다. 나라면 그렇게는 하루도 못 살 것 같은데 진숙은 그런 생활을 10년 넘게 해오고 있다. 요즘은 진숙도 개들 수발에 지쳐서, 그 개들만 죽고 나면 다시는 개를 키우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곤 한다. 다행이라면 다행으로 개들은 다 고령인데, 문제는 개들이 통 죽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진숙의 애견 인생이 시작된 건 <뽀삐(2002)>로 인해서다. <뽀삐>는 애완견 뽀삐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로 진숙은 그 영화의 피디였다. 진숙은 그 영화를 하면서 애완견에 관심을 가지게 돼서, 촬영 끝날 때쯤에는 이미 여러 마리의 개를 키우고 있었다. 그 개들이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데, 그중에 빠삐가 최고령이다. 빠삐는 <뽀삐>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던 개인데, 당시 나이가 네 살이었으니, 올해 열일곱이다. 진숙은 빠삐가 늙어서 종일 잠만 자니 데리고 있는 게 힘들지 않을 거라고 했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감독이 주인공 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일이 드물지 않다. 주인공으로 캐스팅을 한다는 건 이미 호감을 전제하는 것이니 감독이 배우와 사랑에 빠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나는 처음부터 빠삐에게 별 호감이 없었다. 감독이 매혹되지 않으면서 관객을 매혹시킬 도리는 없는 법, 미스 캐스팅이었다.


개를 캐스팅하는 게 쉽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개 조련사에게 개를 빌렸다. 조련된 개가 아니라 종견이었다. 딱 보기에도 마르티스와 푸들의 잡종견에다 그 밖에도 여러 종류의 피가 섞였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런데 조련사는 순종 마르치스라고 했다. 그 개가 빠삐다. 우리가 처음 봤을 때 빠삐는 작은 케이지 안에 들어있었다. 빠삐는 다른 마르치스와 교미가 있을 때만 케이지에 갇힌 채로 바깥출입을 했을 것이다.


빠삐는 우리랑 촬영을 하기 전에는 한 번도 길거리를 걸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영역표시를 하면서 산책하는 장면을 찍으려는데, 전봇대에 다리 들고 오줌 누는 걸 안 했다. 이름도 없어서 진숙이가 부르는 빠삐가 이름이 됐다. 처음엔 사람과 눈을 맞추지도 않았다. 그러다 차차 다리 들고 오줌을 누게 됐고, 사람과 눈을 맞추게 됐다.


빠삐와 나는 촬영하는 동안 짧지 않은 기간을 같이 지냈다. 그러나 나는 빠삐에게 별 애정이 없었고, 피사체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한 번은 빠삐가 아파서 못 일어나는 장면을 찍느라고 빠삐에게 마취주사를 놓았다. 촬영이 길어져서 마취를 다시 해야 했는데, 마취약이 독해서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래도 강행을 하려는데 진숙이 화를 내면서 개를 안고 나가버렸다. 촬영이 끝난 후 진숙은 조련사에게 적지 않은 돈을 주고 빠삐를 샀고, 그 후 13년을 같이 살았다.


진숙의 전화를 끊고 고민이 컸다. 늙은 개와 한 집에 단 둘이 있을 생각을 하니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오죽하면 그런 부탁을 했겠는가? 게다가 나는 빠삐에게 야박하게 굴 입장이 아니었다. 빠삐는 2011년 내 영화에 한 번 더 출연했다. 그때 빠삐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여러 스태프들의 감탄을 산 바 있다. 빠삐에게 신세 진 게 많은 것이다. 빠삐뿐 아니다. 영화를 하면서 하도 여기저기 부탁을 하고 신세를 져서, 누구든 부탁을 하면 다 들어주리라 결심했다. 그러나 다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운 부탁만 골라서 하는지, 결심을 실천하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고민 끝에 다만 얼마간이라도 빠삐랑 같이 지내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진숙은 빠삐를 맡기지 않았다. 진숙은 다른 집으로 이사했고, 개들에게 방 하나를 내주었다고 했다.


그로부터 여러 달이 흘러 다시 진숙의 전화를 받았다. 빠삐가 며칠 째 밥을 안 먹는다고 오래 못 버틸 것 같다고 했다. 진숙이 <뽀삐> 촬영 때 얘길 했다. 그때 자기가 “빠삐가 촬영하느라고 고생해서 어쩌냐?”고 했더니, 내가 “맨날 케이지에 갇혀 있다가 바깥 구경도 하고 영화 출연도 하고, 촬영기간이 빠삐 인생에 제일 행복한 시간일 거”라고 했다는 것이다. 진숙은 그 얘길 자주 하는데,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영 거북하다. 자기가 필요해 데려다 쓰면서 은전을 베풀듯 군 게 찔려서다. 물론 진숙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진숙은 빠삐에게 촬영 때처럼 행복한 날들이 계속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렇게 빠삐는 종견에서 애완견이 되었고, 여러 개들과 어울려 무병장수하는 삶을 살았다.


얼마 후 빠삐는 진숙이네 뒷산에 묻혔다. 돌이켜 보면 빠삐는 참으로 성격 좋고 무던한 배우였다. 똑같은 걸 반복해 시켜도 짜증 한 번 내는 적 없었다. 같이 골목길을 누비던 기자촌 촬영이 마음에 선명하다. 삼가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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