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토의 천국-자코 반 도마엘
한 줌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지는 토토. 그는 경쾌한 움직임이 되어 춤추듯 하늘로 날아오른다. 삶이 무거웠던 만큼 죽음 이후의 가벼움이 주는 해방감은 대단하다.
토토는 <토토의 천국>(1991/자코 반 도마엘)의 주인공이다. 그의 삶을 그토록 무겁게 한 건 집착이다. 사랑과 복수에 대한 집착. 토토는 가난한 집 아이다. 부잣집인 옆집엔 그와 같은 날 태어난 알프레도가 사는데, 토토는 자신이 신생아실에서 알프레도와 뒤바뀌었다고 믿는다. 알프레도는 그에게서 부자아버지를 훔쳐간 도둑인 것이다. 알프레도와의 악연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알프레도는 그의 사랑마저 훔친다. 그는 누나 엘리스를 사랑하는데, 어느 날 엘리스가 알프레도와 데이트하는 걸 목격하게 된다. 토토가 미친 듯이 분노하자, 엘리스는 토토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알프레도의 집에 불을 지른 뒤 불길에 휩싸인다.
긴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토토. 그는 여전히 엘리스에 대한 그리움과 알프레도에 대한 미움으로 산다. 자신의 운명 전체를 도둑질한 알프레도. 재벌 총수가 된 알프레도가 암살자들에게 쫓긴다는 뉴스를 본 그는 알프레도를 찾아간다. 복수할 기회를 암살자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토토를 비롯한 영화 주인공들의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 차있다. 생이 고통스러운 건 집착 때문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들은 집착의 화신이다. 그런데 그들이 집착하는 건 예외 없이 사랑과 복수 같이 거창한 것들이다. 그들은 첫사랑을 죽을 때까지 못 잊고, 가문의 원수에게 복수하기 위해 평생 칼을 간다. 그러나 영화 밖 현실에서 사랑과 복수에 대한 집착은 그다지 수명이 길지 않다. 사랑이니 복수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시들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우리 생만큼이나 길고 질긴 욕망은 따로 있다.
학창시절 나는 수업시간에 졸아본 적이 없다. 수업을 열심히 들은 건 전혀 아니다. 그저 조금도 졸리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이 늘 의아했다. 밤에 잠을 안자고 뭘 하는 걸까? 물어보면 하나같이 새벽까지 라디오를 듣는다고 했다. 잠을 안자고 라디오를 듣는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나는 매일 밤 9시면 잠자리에 들었다. 자는 게 제일 좋았고, 졸린 데 못자는 게 제일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라디오 따위를 듣자고 잠을 포기하다니, 이해가 안 될 밖에. 어릴 적부터 나는 자는 걸 유난히 좋아했다. 그게 집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건, 진경을 보면서다.
진경은 먹는 걸 유난히 좋아한다. 역시 어릴 적부터 그랬다고 한다. 중학교 동창의 증언에 의하면, 중학교 소풍 때 자기 머리보다 더 높이 올라오는 70리터 배낭을 짊어지고 왔더란다. 산에서는 고기를 구워먹어야 한다는 평소 신념에 따라 삼겹살에 부루스타, 프라이팬, 각종 쌈, 양념장을 싸 간 것이다. 고기에는 술이 빠질 수 없으므로 맥주까지. 그게 다가 아니다. 자기는 술을 마시면 자야한다며 베개까지 챙겨왔더란다. 그리고는 선생님들까지 불러 지글지글 고기를 구워 먹고는 한 잔 걸친 맥주에 얼굴이 벌개져서 준비해온 베개를 베고 나무 그늘에 누워 자더라는 것.
지금도 진경은 소풍 한 끼를 위해 70리터 식량을 짊어지기를 마다않던 그 자세로 매끼를 먹는다. 맛있는 걸 먹는 건 좋은 일이다. 문제는 매끼 맛있는 걸 먹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진경은 맛없는 음식을 못 참는다. 맛없는 걸 먹을 때마다 화를 내는데 하루 세끼가 맛있기란 쉬운 일이 아니니 하루 세 번 화를 내는 날도 적지 않다. 진경은 하루 세끼, 한 달에 90끼, 일 년에 1080끼, 48년 간 51,840끼(본식 못지않게 화려한 간식은 편의상 계산에서 뺐다)를 결코 마모되지 않는 욕망으로 맞는다. 매일의 잠에 대해 내가 그렇듯이.
나는 잠자기에 최적화된 조건을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다.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매일의 잠자리를 지켜내는 건 쉬운 노릇이 아니다. 통제 불가능한 변수들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기대는 번번이 좌절되고 만다. 좌절된 욕망은 분노를 부르는 법이다. 나는 자는 걸 방해받을 때마다 사자처럼 분노한다. 잠이 소중할수록 잠을 앗아간 자들에 대한 분노는 크고, 분노하느라 잠 잘 시간이 줄어든다는 초조함에 분노는 더욱 커진다.
화를 내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분노보다 더 힘든 건 불안이다. 잠을 자는 게 너무 중요하다 보니, 잠 못 자는 상황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늘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래서 아침 약속이 잡히면 약속이 잡힌 그날부터 일찍 일어날 걱정에 시달리다 약속 전날은 그 스트레스로 잠을 못 자기 일쑤다. 다른 걱정으로 잠을 못 잔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약속이 있는 밤이면 거의 습관적으로 잠을 못 잔다. 잠을 못 자게 될까봐 걱정하느라 잠을 못자는 것이다.
진경과 나는 유독 일찍부터 머리가 세기 시작했다. 내가 잠에 대한 집착에 시달리느라 머리가 허예지는 동안, 진경은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을 긴 세월 지고 다니느라 머리가 허예진 것이다. 하루 한 번의 잠을 욕심껏 자기가 이렇게 힘든데, 하루 세 끼나 되는 밥을 욕심껏 먹기란 얼마나 힘들겠는가. 먹는 데는 자는 데 비해 필요한 게 또 좀 많은가. 진경에게 가슴 깊이 동병상련을 느낀다. 평생을 잠탐에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 다니지 않았던들, 어찌 친구의 식탐을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 늙은 토토가 늙은 알프레도에게 가지게 된 마음이 이런 것이었으리라.
토토는 주머니에 권총을 숨긴 채 알프레도를 찾아간다. 머리가 허예진 두 친구가 수 십 년 만에 마주앉게 되는데, 그 자리에서 알프레도는 뜻밖의 고백을 한다. 자기는 평생 토토의 삶을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친구의 고백을 듣고 토토는 처음으로 친구를 자기의 운명을 훔쳐간 도둑이 아니라, 한 여자에 대한 그리움과 친구에 대한 질투심에 평생을 묶여 산, 늙고 회한에 찬 인간으로 보게 된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토토는 친구를 거울삼아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그는 자신이 뒤바뀐 운명을 사는 비극의 주인공인 줄 믿어왔다. 그런데 복수의 순간, 그는 자신이 뒤바뀐 운명이라는 시나리오에 맹목적으로 사로잡힌 희극적 인물, 너무 진지해서 우스꽝스러운 희극의 주인공이라는 걸 깨닫는다.
토토는 마지막으로 자신이 열연해온 희극 무대의 대미를 멋지게 장식하기로 한다. 바로 알프레도가 되어 죽는 것이다. 토토는 암살자들의 표적이 되고자 알프레도의 옷을 입고 알프레도의 집으로 들어간다. 탁자 위에는 엘리스가 남긴 종이장미가 놓여있다. 그는 종이장미를 들어 향기를 맡는다. 또다시 효과 빠른 약기운처럼 그리움이 밀려들고, 그는 그 익숙한 감정에 자신을 내맡긴다. 지독한 되풀이. 그런데 ‘탕!’ 총소리가 울리자 그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종료된다. 수 천 수 만 번씩 반복되던 그리움, 분노, 질투와 회한의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
한줌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뿌려지는 토토. 그 순간 호쾌하게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토토의 웃음소리다. 그는 살아생전 경험해본 적 없는 경쾌한 움직임이 되어 들판 위로 나뭇가지 사이로 춤춘다. 아, 죽음이란 이토록 가볍고 홀가분한 것이로구나. 육체가 없으므로 그것은 홀가분한 느낌마저 없는 홀가분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