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

시-이창동

by 김지현

미자는 중풍 노인의 도우미로 일하면서 작은 아파트에서 중학생 손주와 둘이 산다. 미자는 문화원에서 시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강의 마지막 날까지 시 한편 쓰기를 과제로 받는다. 어떻게 하면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을까? 그러나 아름다움을 찾는 그녀를 덮친 건 거대한 불행이다. 미자는 치매진단을 받게 된 데다, 손주가 같은 학교 여학생을 집단 성추행하는 데 가담했으며 그 여학생이 끝내 투신자살한 걸 알게 된다. 사건을 둘러싼 현실을 추악하기만 하다. 죄의식 없는 아이들, 자기 아이를 보호하는 데만 급급한 학부모. 모두가 사건에 연루돼있지만, 누구도 피해 소녀의 죽음을 아파하고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 오직 미자 홀로 소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말한다. “어느 누구도 남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기를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미자는 남을 위한 존재다. 그녀에겐 자신을 돌보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녀는 치매 진단을 받고도 자기 병은 돌볼 생각을 않고 손주가 저지른 일의 뒤처리로 분주하다. 손주를 대신한 속죄도 그녀의 몫이다. 미자는 소녀가 투신한 곳에 다녀오던 날 중풍 노인과 성관계를 맺는 것으로 대속 의식을 치른다. (남자들이 지은 죄를 꼭 여자가 대속하게 하고, 그것도 몸을 바쳐 대속하게 하는 것의 시대 착오성에 대해서는 길게 말하지 않겠다.) 미자의 희생은 손주의 인생을 대신 사는 데 그치지 않는다. 미자는 이제 죽은 소녀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야 한다. 미자는 시를 쓰고 싶어 하는데, 미자에게 시를 쓴다는 것은 죽은 소녀의 고통을 공감하고 소녀가 되어 소녀를 대신해 말하는 것이므로, 시 쓰기의 성공은 자신의 죽음을 뜻한다. 결국 미자는 시를 완성한 뒤 사라진다. 자신을 부정하고 또 부정한 끝에 타인들 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영화는 미자의 사라짐이 아름답다고 말한다. 영화는 미자의 자기 희생을 이상화한다. 이상화의 예외 없는 효과는 현실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영화의 현실은 부도덕하고 추악하다. 특히 성욕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소년들의 성욕이 그렇고 성욕에 사로잡힌 중풍노인의 뒤틀린 육체가 그렇다. 영화는 추행당한 소녀의 육체에 대해서도 결코 너그럽지 않다.

영화는 강물에 떠내려가는 소녀의 시신에서 시작된다. 그렇게 소녀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소녀를 죽인 건 소년들이 아니다. 소년들의 폭행은 소녀를 죽을 만큼 다치게 하지는 않았다. 소녀를 죽음에 이르게 한 건 강간에 대한 소녀의 해석이다. 소녀는 강간이 죽을 만큼의 고통이라는 생각, 강간당한 여자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 죽음을 통해서만 더럽혀진 명예를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여성의 성에 대한 이와 같은 사회적 통념들이 소녀에게 자살을 결심하도록 한 것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에서 추행당한 여자는 살해됐다. 더럽혀져서 자기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게 아니라는 얘기다. 한국영화에서 추행당한 여자를 번번이 자살하도록 그리는 것은 더럽혀진 여자는 죽어야 한다는 사회적 통념에 통념을 더하는 것이다. 여성을 이토록 무기력하게 재현하는 것이야말로 소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쁜 건 이런 재현이 추행당하고도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들이 부끄러워하도록 은근히 강요한다는 점이다.

오래전 인터뷰 기사에서 이창동 감독은 자신의 영화가 사회적 약자들을 대신해 그들의 목소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게 가능할까? 다른 건 몰라도 그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여성으로서 나는 그가 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낸 여성들은 나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인물들은 여성에 대한 감독 자신의 욕망을 말할 뿐이다. 나는 나 자신이 그렇게 재현되고 대변된다는 데 대해 매번 모욕감을 느낀다.

타자의 목소리가 되고자 하는 그의 도덕적 열망은 고스란히 미자에게 투사된다. 현실에서 불가능했던 소망을 영화에서 미자가 성취한다. 자기 욕망 없이 남의 인생을 대신 사는 어머니의 장기를 십분 살린 성과라 할 것이다. 그러나 묻고 싶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 느끼고 타인을 대신해 그의 목소리가 된다는 것은 과연 바림직한가? 사람은 더불어 사는 존재이므로 이웃과의 공감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나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기에, 타인에 대한 사랑도 자신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해야 한다. 자기 고통보다 타인의 고통을 더 아파하는 건 얼핏 숭고해 보이지만, 그러느라고 미자는 한 번도 자기 자신이 되어보지 못했다. 미자를 비롯해 우리 각자에게 요청되는 최우선의 도덕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이 만들어 놓는 규범들에 덮어놓고 울고 웃으며 인생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그게 자신에게 정말 기쁘고 슬픈 일인지 차분히 성찰하면서 자신의 도덕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랬다면 미자와 소녀는 죽지 않고 살아 이 세계에 그녀들만의 고유한 색깔을 더할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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